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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herimo 2013. 4. 26. 00:32

#북리뷰




젠더 트러블

저자
주디스 버틀러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8-12-1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페미니즘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의 대표작 퀴어 이론의 창시자이자...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 섹스와 젠더의 계보학


-서지 정보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0[1999].

국역. 조현준 역,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파주: 문학수첩, 2008.


-별점: ★★★★★


-한줄평: 젠더는 참이나 거짓도, 실재적이거나 외양적인 것도, 원본이나 모방본도 될 수 없다. (국역본 350쪽, 원문 193쪽)


오랜만에 서평. 조금 깁니다. 이 서평은 조금 특이하게 구성돼 있는데 5월 5일에 올렸던 이전의 글을 9월 29일에 정리하고 다듬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사실상 두 명의 화자가 드러난다는 점을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 표시 없이 쓰인 글은 5월의 화자, [] 속이 9월의 화자의 발화입니다.


1. 페미니즘이 어쨌다구?


페미니즘이란 한국 사회에서 많은 남성들의 어그로를 끄는 용어일 것이다. 여성주의 혹은 페미니즘은 남성들로 하여금 '역차별'과 '피해의식'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비춰지기 일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한국의 페미니즘 특유의 선전 전략 등으로 인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그 스스로 '핍박받은 약자로서의 여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양성 모두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학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페미니즘의 언어는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약자로서의 여성의 '해방'을 강조한다. 적어도 우리가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페미니즘이란 그런 종류의 것들이다.


서울 소재의 내가 다니는 모 대학에서는 OT 혹은 새터 때 '반성폭력'을 논의하는 시간을 갖는다. 과/반 공동체의 일원이 되서 술자리를 함께 하고 나아가 1년 남짓한 공동체 생활 기간 중에 성폭력적 상황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합의를 이끌어내고 세부 규칙들을 정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몇몇 남학우로부터 '이건 좀 심한 것 같다. 마치 남자를 잠정적인 범죄자 취급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며 반성폭력이라는 기치는 성폭력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여학우들 중에서도 일부는 '정말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시간'이라는 의견을 주기도 했다.


나는 이런 반성폭력 세션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확실히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우려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정말로 이런 시간이 존재하는 게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학문에 걸맞은 것일까 하는 고민, 나아가서 '어떤' 페미니즘이 이러한 시간을 원할까에 대한 고민이다. 여성에 대한 (엄존하면서도 상존하는) 폭력의 역사는 뤼스 이리가레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이리가레가 아니더라도 많은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이 부권적 법/남성을 주체로 만드는 담론에 의해 피해를 입은 여성성과 양성성 및 인간성을 염려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 상황에 대한 면밀한 고민이나 분석 없이 그저 '표면상으로 합의된 내규'가 해결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안이한 생각. 그리고 암묵적으로 젠더를 이분법적으로 보고 이성애중심주의적 화자를 상정하는 것까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성은 여성에게 러브샷을 권하지 않는다.'는 규정은 '남성이 남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혹은 '여성이 남성에게'와 같은 다른 상황들을 거꾸로 괜찮다고 허가해버리는 꼴이 되어 버린다. 더욱 악의적이게도 그러한 발화는 '남성'과 '여성', 나아가 남성성과 여성성에 실재(the real)로서의 위상을 부여한다. 이분법적으로 구조화된 성별 체계의 재생산은 그 자체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폭력이지 않은가?


결국 이런 지점들이 언제나 문제가 되어 버리고 만다. 여성에 대해 생각하거나 여성 개념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여성 외의 다른 성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 버린다. 물론 이 경우 주체의 위치에 올라있는 '남성'은 여성의 존재로 인해 더욱 확실한 존재감을 부여받는다. 우리는 강제적 이성애 및 성별 이분법주의라는 '법' 앞에서 둘 중 하나의 젠더와 섹스, 섹슈얼리티의 '이름'을 받으며 찢겨 나간다. 버틀러 식으로 말하자면 찢겨나간 결과, 법의 위상을 공고히 한다.


결국 페미니즘이 성별에 천착하는 순간, 그것이 본질주의적이든 구성주의적이든 또 다른 차별에 발을 담글 가능성은 높아진다. 실제로 버틀러는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몸 철학에 반대한다. 그로츠의 학문이 여성의 존재를 구성주의적으로 재사유하지만 본질주의적 위상을 포기하지 않는 면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성에 대한 재사유가 또 다른 차별과 편견의 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이 부분에서는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 문제가 논쟁의 중심이 될 것이다).


버틀러는 이러한 페미니즘의 전제-여성의 존재와 여성에 대한 차별에 집중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여성의 문제를 포함하여 또 다른 소수자들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구도를 잡아간다. 버틀러의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은 소수자들을 위한 철학이며 <젠더 트러블>식으로 조금 더 엄정하게 표현하면 '비체화된 존재를 생산하는 법의 전복'을 꾀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나은 인간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 돌고 돌아 <젠더 트러블>에 이르기까지


언제 한 번 싸이 다이어리에도 썼던 얘기지만 현학적인 걸 좋아하고 뽐내기 좋아하는 나는 일병 초 무렵에 다시금 포스트모더니즘, 후기 구조주의 등의 빤딱빤딱한 사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데리다나 라깡, 알튀셰에 대한 개론서를 읽었다(《주체개념의 비판》). 이중에서는 푸코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론서들이 흔히 묶곤 하는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라캉, 푸코, 데리다 등) 중에서 유독 푸코는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정신병과 심리학》에서 '비정상'과 '정상'의 구분 짓기의 폭력성과 무분별함을 이야기했다. 그후 그의 기획은 이성-광기의 대립과 억압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조명하고(《광기의 역사》) 어떻게 인간을 규율로서 규제하고 생산하며(《감시와 처벌》) 그것이 어떻게 성(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영향을 주는지(《성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아직 <성의 역사 1>까지만 읽은 나로서는 그가 거대한 기획에서 다시 좁은 부분을 오밀조밀하게 들여다보며(상대적으로 '이성'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초기~중기 저작들은 거대기획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성의 역사 3부작은 다시금 핀 포인트 사격을 하는 느낌) 이를 기반으로 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지는 윤리학이라는 더 복잡한 기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 글은 꽤 오래 전에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푸코를 이해하는 나의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푸코가 《성의 역사》 시리즈를 집필한 이유는 그가 보다 특수화된 문제로 침전한 게 아니라 이성을 사유했듯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섹스/젠더/섹슈얼리티의 계보학을 탐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2권과 3권에서는 어떠한 계보학적 탐구 너머에 어떤 '윤리'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답변을 제공한다고 보여진다.]


권력의 개념 전환, 규율과 규제의 메커니즘 등을 치밀하게 추격한 푸코의 저작들은 그의 계보학적 방법론과 함께 페미니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그의 시각을 마초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난 도저히 이 부분에 동의할 수가 없다). 버틀러는 《에르퀼린 바르벵: 최근 발견한 19세기 프랑스 음양인의 자서전》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정해지지 않은 섹슈얼리티를 지나치게 이상화한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이렇게 푸코를 포함한 소위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을 다시 읽으면서 역시 다시 버틀러를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포스트-모던이라는 '한물 간 사조'의 마지막 세계적 학자라는 이미지가 있기도 했고(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판단이다. 하지만 버틀러 이후 포스트-모던 학자라 불리는 일군의 학자 중에서 버틀러만큼 다양한 지적 풍토에서 주목받은 학자가 없다는 면에서 이 판단이 그리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물론 성급하고 섣부른 판단이기도 하지만.**) 1960년대 학자들이 밝히지 않고 돌아가거나 도달하지 못하고 끊겨버린 기획을 이야기하는 학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내가 내렸던 이러한 판단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버틀러를 포스트-모더니즘의 틀 안에 넣으려고 했던 것. 버틀러는 해체라는 독해 방법을 사용하는 후기구조주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것 같다. 또 하나, 포스트-모던이란 말이 리요타르의 죽음 이후에 어떤 상징적 지위를 위협받은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러한 위협이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후기식민주의의 문제틀을 와해시킨 것은 아니며, 문제틀의 제공이라는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 사유 방식의 한 축을 형성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 역시 운명인지 입대 전에는 그렇게 구하기 힘들었던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국역본과 원서가 너무나 쉽게 구해졌다. 그렇게 《젠더 트러블》을 읽기 시작했으나 예상대로 난관에 부딪쳤다. 사용하는 개념이 어려울 뿐더러(따라서 영문판을 술술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사학과 교수답게 한 문장이 한 문단을 이루기도 하고 그 문장을 끊어 번역하다 보니 국역본은 여기저기 문장 구조가 어색하고 모호한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일단은 어려운 개념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옛날에 사뒀던 《섹스화된 몸》이란 책을 꺼내들게 됐다.



3. 《섹스화된 몸》과 《젠더 트러블》 - The Sexed and/or Gendered Body & Soul


이 책은 2010년 겨울에 내가 들었던 강의를 훨씬 더 깊이 있게 풀어쓴 책이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은 기억을 되짚어가며 읽어나갔고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다 읽을 수 있었다. 책은 매리 더글라스나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같이 페미니즘 몸 이론의 기반이 되는 순수/오염이나 비체 논의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그로츠의 몸 이론을 다룬다.


그로츠는 몸이라는 개념을 본질주의(예컨대 몸에는 이러이러한 모두에게 공유되는 특징이 있다)와 구성주의(몸이라는 것은 담론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의 대립을 넘어 재사유하고자 하였고 이는 몸 개념에 유동성을 열어놓게 된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성차라는 개념을 강조하여 남/여 이원론과 여성 몸의 특수성을 주장한다. 이 지점에 있어서 저자는 매우 아쉬워 하는데, 여성 몸의 특수성을 주장하고 남/여 이원론을 강조하는 순간 호모섹슈얼, 인터섹스, 트랜스섹슈얼은 어느 한 구석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로츠에게 성차란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며 도약을 시도하는 트랜스젠더는 남 혹은 여로 고정되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로츠의 이러한 설명이 폭력적인 한편 현실상을 잘 조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여 이원론은 강력한 권력 (생산) 기구이며 성차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조차 이중 하나로 편입하고 싶은 욕구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레즈비언 부치/펨, 게이 탑/바텀, 트랜스젠더의 FTM/MTF를 대립시켜 각각 남/여 이원론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여지는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러한 설명을 원한다. 이는 이해하기 쉬운 만큼 폭력적이다. '남성적인' 혹은 '여성적인 게이'를 재단하는 순간 어떤 요소들이 잘려나가고 비체화되는가?


결국 그로츠가 성차를 강조하고 남/여 이원론의 권위를 인정하는 순간 이는 경계 지대에 서 있는 이들, 비체화된 존재들에겐 자신의 다른 부분을 비체화시키는 폭력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그로츠는 여성의 특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들을 우악스럽게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 페미니즘이 약자들로부터 시작된 학문이기에 이러한 폭력에 더욱 가슴 아파진다.


자연스럽게 버틀러라는 대안에 마음이 더 갔다. 버틀러는 존재론을 인식론의 영역으로 조명하여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를 문제 삼는다. 비누줍기 얘길 하면서도 게이를 희화화하는 한국 어딘가의 모습은 사실 게이를 철저히 비체화시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게이'라는 카테고리가 관심을 끌고 입에 많이 씹힌다고 해서 그들이 가시화되고 온전하고 어엿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게이는 '남성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존재',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존재', '애널 섹스에 빠진 남성' 등으로만 개념화되고 여전히 '남성 사이의 사랑'에서는 이성애 관계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부여받는 고귀함, 깨끗함의 의미가 부재하고 있다.


버틀러의 1999년판 서문은 나 역시도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역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많은 사람이 꼽듯이 "이 책은 단지 학계에서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내가 참여해온 집중된 사회운동에서 생겨난 것이기도 하다. (...) 이 책이 수행하는 주체의 탈구 작업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분명 어떤 사람이 있다.

it was produced not merely from academy, but from convergent social movements of which I have been a part, ... Despite the disLocation of the subject that the text performs, there is a person here (p. 58/ p. xvii)."라는 대목이었다. 버틀러는 비체화된 레즈비언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고 '그런 게 어딨냐?', '현실을 쓸데 없이 어렵게 풀어낸다.'는 비판에 당당히 맞선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담론에 포착되지 않는 잉여로서의 몸을 우리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는가? 결국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몸은 담론에 포섭된 몸, 인식론적 영역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까지만의 몸에 한정돼 버리고 만다. 어떠한 몸이 당연시되고, 보통 몸이 되는가? 강제적 이성애라는 담론은 이성애자를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인종주의에서는 백인을, 자본주의에서는 중산층 이상을, 민족주의에서는 순혈/선민사상에 부합하는 사람을 보통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권위는 인용과 반복에 의해 생기지만 동시에 그에 의해서 전복될 수도 있다. 이 공모와 전복의 경계에서 무엇이 우리를 전복으로 이끌 수 있는가? 버틀러는 힘겹게, 그리고 날카롭게 벼린 학술적 언어로 이러한 싸움을 계속 수행한다.

(수행성과 패러디 개념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젠더 트러블》을 다 읽고 나서 Bodies That Matter(물질로서의/중요한 몸이란 무엇인가)를 읽어보아야 할 것 같지만 그만큼 능력은 없고(국역본의 질이 매우 좋지 않으며, 원서는 역시 비싸다), 아마 다음 리딩은 스피박과의 대담집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가 될 것 같다. 주변에서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를 선물해줘서 버틀러와 지젝의 정치적 이상점을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났지만 난 아직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를 읽지 않았다. 대신 지젝과 버틀러의 대화는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고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에서는 버틀러의 국가, 주권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4. <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 Prohibition, Psychoanalysis, and the Production of the Heterosexual Matrix>


[이 부분에 대한 독후감부터는 이전의 '나'의 서술이 상당한 혼란을 빚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윤문이 필요해 보인다. 이 부분부터는 2012년 9월 이후의 내가 작성하는 것이다.]


2부의 두 번째 섹션 '라캉, 리비에르, 그리고 가면의 전략들'은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이 책에서도 가장 난해한 부분이다. 나는 일전에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들을 제기했었다. 누군가 답변을 해주길 바라고 올린 것이지만 몇 달 뒤의 나만이 이같은 문제에 답을 해주는 셈이니 참 얄궂다 할 수밖에 없다. 최대한 당시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오겠다. 당시의 혼란이 잘 드러나는 문체다.


1) "라캉이 팰러스 '이기'(be)와 '갖기'(having) 개념에서 여성을 팰러스'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여성이 팰러스를 가지고 있는 남성을 대타자(Other)로서 s(소문자 s/S)를 구성하고(이게 거울 이론인 건가???) 이에 따라 팰러스를 나타내고, 가리키기 때문인 게 맞나요? (소쉬르의 기호 개념도 가져오는 것 갖긴 한데 그 부분은 더 헷갈..)"


[먼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팰러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게 선행됐어야 한다. 팰러스란 '신체 없는 기관'으로서 '기표 중의 기표'의 위치를 점한다. 라캉의 논의를 지나치게 축소한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겠지만, 나는 팰러스를 일종의 사회적으로 승인된 자리를 일컫는 기표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에서 '헤게모니'가 일종의 '자리'로 개념화된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손쉽게 남성이 팰러스를 '갖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여성은 팰러스가 '된다.' 이때 여성이 팰러스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승인된 위치를 여성이 점유할 수 없다는 것, 그 자리는 남성에게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은 그것을 결코 획득할 수 없다. 버틀러는 이를 주체 형성에 있어서 일종의 코미디라고 평한다.


당시의 나는 거울 이론에 대한 이해도 거의 전무했던 것이 드러나는데, 거울 이론은 상상계의 차원에서 수행되는 단계로서 거울에 투사된 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항상 '오인의 구조'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상적으로) 형성된 주체(sujet)는 대타자와 조우하게 되는 상징계(the Symbolic)로의 이행을 하게 된다. 위에서 사용한 s/S는 일종의 말하는 나(moi)와 주체(sujet) 간의 간극을 나타내는 기호인데, 버틀러가 《젠더 트러블》에서 라캉을 전유한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더불어 과거 나의 오독의 핵심은 라캉의 상징계에서의 대타자를 남성 권력과 동일시했다는 데 있다. 실상, 대타자라는 것은 라캉의 이론에 있어서도 완벽한 영역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역시 '오인의 구조'를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한 영역이다.


라캉에게 있어서 여성이 팰러스인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여성이 팰러스를 갖지 않기 때문이라는 일종의 순환 논증에 기반하고 있다. 여성은 팰러스를 갖고 있지 않고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핍을 가리고 팰러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팰러스이기 위해서 가면을 쓴다. 이에 대해서는 2)에서 논의를 이어가야겠다.


소쉬르의 기호 개념을 가져오는 것 또한 옳지만,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의 자의적 결합 관계와 언어의 사회성 정도의 개념만 이해한다면 이 구절을 읽는데 추가적인 소쉬르에 대한 지식은 필요없는 것으로 보인다.]


2) "(그래서) 여성이 본연적으로 남성성을 구성하거나 되는데 이게 거세 공포로 인해 억압을 받아 여성성의 가면을 쓴다는 게 리비에르의 썰이 맞나요?"


[간단히 말하자면, 맞다. 다만 남성성이 아니라 여성성의 가면을 쓰게 되고 이것은 여성이 남성과 같은 자리를 점류하고자 하는 욕망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것이 리비에르의 '가면'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라캉과 리비에르 모두 가면(Masqurade)을 상정함으로써 가면을 쓰기 이전의 여성성을 진실, 실제로서 작동시키는 일종의 진리-담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 "버틀러는 라캉의 전제와 리비에르의 설을 비틀고 교묘하게 재절합함으로써 젠더가 가면처럼 구성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맞나요? 더불어 이 과정에서 근친상간 금지라는 레비 스트로스의 전제를 뒤집고 양성애적 성향이 '동성애 금지 원칙'이라는 전제가 더 선행하는 전제라고 비꼬고 있는 건가요?"


[버틀러 가면에 관한 이론을 재절합함하는 목적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유형학을 해체하려는 데 있다. 두 번째 문장은 오해를 빚도록 씌어졌지만 저 말은 특별히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동성애 금지 원칙'이 '근친 상간 금기'보다 선행한다는 것을 밝히는 게 버틀러의 목적이 아니라, 어떠한 금기를 특권화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으며, 실상 '노예의 도덕'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5. (인문학적) 지식인의 책무


여러 철학자들의 이론을 자기 식으로 재절합하는 버틀러의 시도에 대해, "결국 버틀러 자신도 주체/섹스/젠더의 구성주의적 입장에 있어서 일련의 기호학적 조류, 데리다나 라캉 등의 구조주의 및 후기구조주의 저작들과 줄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레, 모니크 위티그 등의 페미니스트의 영향을 받아 니체로부터 이어받은 푸코의 계보학을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독해한다는 느낌"이라고 과거의 나는 쓰고 있다. [원문으로부터 약간의 윤문을 거쳐 인용 처리. 그리고 이 이하부터는 다시 옛날의 내가 쓴 글이다]


버틀러의 철학은 분명히 중심과 기준이 있다. 1999년판 서문에도 언뜻 비치지만 이 사람 정말 비체화된 존재의 삶과 현실을 직접 살아본 사람이고 그 고통을 이해하고 차갑고 냉철해보이지만 위로하고 자존감을 신장시키는 언어를 말한다. 버틀러는 주체는 담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담론 밖에 남아있는 것은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담론 아래의 주체와 대상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버틀러는 비체화된 이들을 위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건 객관적이니 중립적이니 하는 말을 떠나서 어떤 '중심'과 '기준'이 있는 행동인 셈이다.


학문이란 것, 글쓰기란 건 파충류의 활동이 아니다. 적어도 내 생각에 학문은, 인문학은 따뜻한 무언가를 전제로 해야 한다. 그 점에서 나는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위티그나 크리스테바, 그로츠 등)은 여성을 비체화된 존재로 개념화하면서도 또 다른 비체화된 존재들을 이성애/성별 이분법의 도식에 가둬 자기 멋대로 분류하거나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에서 비체화된 존재의 이름을 불러 자기 멋대로 전유해버리는 오류를 범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버틀러의 글은 매우 어렵지만 따뜻하고 정감 있는 글이다.


[이로써 이 책의 서평은 반 정도는 마무리되었다. 보다 충실하고 내용 있는 서평은 아예 다른 글로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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