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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발췌독)

herimo 2013. 4. 26. 00:40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저자
주디스 버틀러 지음
출판사
산책자 | 2008-07-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세계적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대담집 이 책은 세계적인 여성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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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ith Butler & Gayatri Chakravorty Spivak, Who Sings the Nation-State? ─ language, politics, belonging, London and New York: Seagull Books, 2007.

[국역] 주해연 역,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서울: 웅진씽크빅, 2008.


"이 책은 2006년 5월 6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 캠퍼스 비교문학과에서 주최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Global State'라는 학회에서 진행된 대담을 기반으로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수정을 거쳐 출판되었다." (10)


발췌의 편의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버틀러의 말과 스피박의 말을 쪽수와 함께 병기하도록 하겠다.


전반부는 버틀러의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한 표기가 없는 한 이 아래는 모두 버틀러의 말이다.


"흔히 난민을 기존의 자율적인 국가 사이에서 이동하는 인구집단으로 정의하지만, 이는 만족스럽지 못한 추상적 정의입니다. (...) 사람들은 난민이 국경을 통과해서 다른 국가에 도착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 난민이 도착한 국가에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곳이 법적·군사적 권력과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민족 구성이 될 권리를 부여하는 곳일지, 아니면 '소속되지 않음'으로써만 그 존재가 정의되는 곳일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15-16)


"우리가 지금 묘사하는 집단은 실제로 국가가 없는(stateless)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국가권력의 통제하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은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벌거벗은 삶'의 영역에 놓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의 삶에는 권력이 뼛속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17-18)


디아스포라 상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후, 대담은 본론으로 들어간다. 버틀러는 아렌트를 중심으로 아감벤을 논하고, 스피박과 함께 하버마스와 유럽연합에 대해 논한다.


<아렌트와 『인간의 조건』>


"주권과 헌법주의를 상치되는 관계로 보는 것은, 주권이 아무리 헌법주의 한가운데에서 출현하는 것이라 해도 제한적인 개념틀입니다. 이것은 '외부'를 형이상학적 형태, 즉 정치 영역의 바깥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1)


""국가없는 자"라는 범주는 민족국가에 의해 재생산될 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강제로 끼워맞추려 하며 이 둘 사이의 하이픈을 쇠사슬처럼 사용하려는 권력의 작동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됩니다." (22)


"아렌트에게 자유는 자유를 실천하는 행위에 이미 내재되어 잇는 것입니다. 자유란 다수의 사람들이 실행하는 것이기에 공동으로 조율된 노력이 필요하며, 그렇기에 관계 안에서 존재합니다. 아렌트는 자유가 자연상태라는 관념을 거부하며,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이 귀환하는 곳이라고 여겨지는 소위 자연상태 역시 거부합니다." (28)


"[아렌트의 노예제 비판*을 논하며] 아렌트의 노예제 비판은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이 되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적용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렌트가 촉구하는 공적 영역은 공사 구분 위에서만 가능한 것 아닐까요? 사적인 영역, 즉 정치 이전의 영역에 특정 집단을 밀어넣지 않고서 공적 영역을 구성할 수 있을까요? 급진민주주의의 정치적 비전이라면 이런 식의 공사 구분을 근본적인 층위에서 거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국가 없음'에 대한 아렌트의 논의를 현재의 전지구적 조건에 맞추어 더 급진적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아렌트의 공사 구분에 남아 있는 반민주적인 정서를 극복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29)


*노예제가 인권의 근본적 침해인 까닭은 자유의 박탈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을 자유를 위한 투쟁의 가능성에서 배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 가능성은 독재하에서도, 근대적 공포정치 아래에서도 열려 있는 것이다. (28쪽에서 재인용. 원문은 『인간의 조건』 영문판 297쪽)


"아렌트의 사상에서 제가 우려하는 것은, 경제적 영역이 생략되거나 주변화되고, 심지어 정치에 대한 위협으로 취급되는 부분입니다." (33)


"아렌트의 텍스트가 목적하는 바는 '국가 없음'의 문제를 정치적 형태이자 역사적 시간의 문제로 일반화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이 문제가 자전적으로 다뤄지는 데 저항했으며, 지리적 장소이동과 정치적 추방displacement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는 모든 민족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35)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민족'이 상정하는 민족적 소속 방식은 철저히 조건을 갖추었는지를 따지는 특정 기준에 맞추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7)


"이렇게 버려진 삶은 특권이나 의무의 양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버려진 삶은 권리를 가지지 않고도 법제적 권력 아래 놓일 수 있으며, (하략)" (37)


"지금 이 지점에서 제가 먼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민족국가의 기반이 되는 민족을 발명하기 위해 민족 내부의 이질성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38)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가 이러한 추방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아렌트의 개념과는 다르게 우리는 민족국가의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것 역시 생각해야겠지요) 국적을 내세우며 영토를 확보함으로써 경계짓기를 하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39)


<카를 슈미트, 조르조 아감벤과 '벌거벗은 삶bare life'>


"아감벤이 누구를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를 추적하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감벤은 아마도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과 「민족국가의 쇠퇴와 인권의 종말」에서 언급한 바 있는 공적 영역에서의 비오스bios (아직 정치적 삶bios politikoon으로 온전히 개념화되지는 않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는 『호모 사케르』와 『예외 상태』에서 아렌트의 이 두 저작을 모두 언급하지요. 한편 아감벤은 발터 벤야민의 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개념인, 그의 1918~26년의 초기 저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목숨뿐인 삶mere life (blosses leben)' 개념을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41)


"[아감벤을 비판하며] '벌거벗은 삶'이란 정치 공동체 밖으로 내던져져서, 아무런 보로도 받지 못한 채 국가권력에 노출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삶이 '벌거벗는' 게 가능할까요? 삶이란 이미 불가역적으로 정치적 장에 깊숙이 들어와 있지 않나요?" (41-42)


"이는 생체권력biopower의 연장선상에서 삶과 권력의 배타적인 논리가 그리 간단하게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는 그러한 상호 배타적인 논리를 내세우려는 시도 자체가 삶을 탈정치화하며, 젠더와 단순노동과 재생산의 문제를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42)


"결핍과 박탈의 현실을 논의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논의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결핍을 말하는 핵심언어가 계속 주권과 벌거벗은 삶에만 국한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결핍의 현실에서 작동하는 다른 권력의 네트워크를 놓치게 되며, 어떻게 그 결핍의 공간에서 권력이 다시 작동하며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언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45-46)


<다시 아렌트, 그리고 누가 국가를 노래하는가>


"아렌트는 민족국가의 종말 이후에 이를 대신하는 용어로, '연방'이나 '정치체'를 말하지요. 선언하는 행위 자체로 민족국가가 종말을 맞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촉구하는 담론적 절차의 일부입니다. 즉 새로운 가능성을 유도하고, 선동하고, 요청하는 것이지요." (56)


다소 재밌는 부분이라 발췌한 부분인데


"제가 너무 오래 얘기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네요? 덧붙이실 얘기가 많이 있겠지요?" (버틀러, 58) "하고 싶은 만큼 말씀하세요." (스피박, 59).


아무튼 이렇게 얘기한 뒤에 버틀러는 본인이 맨 처음부터 언급하기로 얘기했던 스페인어로 부르는 미국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스페인어로 번역된 미국 국가에는 "Somos equales(우리는 평등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이 노래가 단순히 '우리'의 평등을 선언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을 요구함으로써, 민족의 핵심에 번역의 과제를 위치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떤 거리삼이나 틈새가 평등의 가능성을 조건이 되고, 이는 곧 평등이 민족 동질성의 범위를 확대하거나 그 위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62)


"이들은 법적으로 표현의 자유가 없지만,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자유롭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러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고 해서 곧 이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권리 주장의 시작이자 그 행사이지만, 그 요구가 반드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64-65)


역시 재밌는 구절 하나 더


"아렌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참 상상하기 힘들지요. 솔직히 그런 상상은 하고 싶지 않네요. 아렌트는 니체적인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니체가 노래하는 걸 듣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니체의 노래는 바그너 풍일 것 같아요." (65-66) ... 뭐라구요?


아무튼 이 구절은 건너뛰고 계속합시다.


"이들의 노래는 단순히 민족의 언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공간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상태' 같은 말로 이들이 드러낸 변혁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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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적으로 빵 터진 부분은 "아렌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참 상상하기 힘들지요. 솔직히 그런 상상은 하고 싶지 않네요. 아렌트는 니체적인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니체가 노래하는 걸 듣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니체의 노래는 바그너 풍일 것 같아요." ... 버틀러도 의외로 재밌는 사람일지도 모른다...음? 근데 철학과 여러분? 니체 노래가 바그너 풍일 거 같나요? 개인적으로 버틀러 노래는 민중가요스러울 것 같긴 한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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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ith Butler & Gayatri Chakravorty Spivak, Who Sings the Nation-State? ─ language, politics, belonging, London and New York: Seagull Books, 2007.

[국역] 주해연 역,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서울: 웅진씽크빅, 2008.


"이 책은 2006년 5월 6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 캠퍼스 비교문학과에서 주최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Global State'라는 학회에서 진행된 대담을 기반으로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수정을 거쳐 출판되었다." (10)


별도의 표기가 없으면 이 이하의 발췌는 모두 스피박의 말이다.


"저 역시 버틀러 당신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다른 언어로 부르는 일 자체가, 권리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수행적 약속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국가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불리는 <인터내셔널가>나 흑인영가인 <우리 승리하리라>와는 달리 원칙적으로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72-73)


"인도의 각 지역은 [유럽의 탈식민이주나 미국의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이민에 비해] 더 오래된 구성체입니다. 반면 국가의 언어는 교섭 대상이 아닙니다. 아렌트도 '국가 없음'에 대해서는 이론화했지만 시민권을 향한 욕망을 이론화할 수는 없었습니다." (74)


"아렌트는 민족 국가의 와해가 시작된 것이 흥미롭게도 민족의 자결권이 유럽 전역에서 인식되던 바로 그 순간, 모든 법적 추상적 제도인 국가 위에 군림하는 민족 의지의 우월성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민족이 국가를 이긴 셈이죠." (75)


"하지만 전지구적 자본의 탈민족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인 정치구조는 여전히 국가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이러한 쟁점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다소 탈민족적인 전투체계를 구축해왔습니다." (76)


"저는 민족에 기반한 국가의 쇠퇴는 추상적인 복지구조가 개별 국가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투쟁하는 비판적 지역주의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77)


"요약하자면, 제국주의는 식민지 정부가 제국의 지속적인 착취기구의 연속선상에 놓이도록 식민정부를 조직화했습니다. 공산주의혁명 역시 식민적 착취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도 민족국가의 쇠퇴를 밀어붙였습니다. 이러한 도정에서 나타난 것이 구사회운동, 즉 국가의 약탈행위에서 시민사회를 지키려는 국가 외적인 집단체였습니다. 국가를 재사유하려는 현재의 움직임은 이러한 오래된 충동의 결과인 듯합니다." (80-81)


여기까지 스피박은 자신의 '비판적 지역주의'의 프레임으로 전지구적 국가 상황에서 아렌트, 아시아,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논평한 뒤에 버틀러에게 두 가지 보론을 요청받는다.


"여기서 잠시 정리를 해볼까요? (...) 우선 당신이 말한 비판적 지역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더 정확히 알고 싶군요. 그리고 이 시점에서 민족국가를 넘어선 민주주의를 확립하려고 한 하버마스의 작업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버틀러, 82)


"비판적 지역주의는 현실화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인종적 하위민족주의를 포함한 민족주의의 힘이 강하게 남아 있고, 초국가적 국제기구 역시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하버마스와 유럽헌법에 대해서 얘기해보도록 하죠. (...) [유럽헌법은] 어떤 문화적 기억에 호소해야 합니다. 이 문화적 기억은 아마도 민족주의를 대신하겠지요." (84)


"즉 유럽헌법의 모순은 새로운 전지구적 시장에서 경제적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기원적 현존을 떠올림으로써 생기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세계시민성cosmopolitheia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 하버마스가 유럽에 기초한 '세계시민 민주주의'를 주창하고 '세계시민'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지위를 창조하려는 것도 이러한 비대칭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경제정치를 변화시킨다면, 그래서 전지구적 자본뿐만 아니라 지역 자본을 강화한다면 사람들은 지금처럼 이주를 원치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 남반구의 신생국가조차 시민들에게 공적 영역으로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전지구적 경제와 관련해서 볼 때, 국가 특유의 공적 영역 자체가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시민권이 주어질 리가 없습니다." (86-87)


"우리가 국가를 추상적인 구조로 여긴다면, 요즘의 자유시장주의에 입각한 전지구적 관리국가는 '국가 없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재분배와 복지, 헌법주의라는 구조가 국가 안에서 소멸되고 있으니까요." (87)


"(...) 지역을 횡단하는 기획이 민족의 주권과 얽힌 민족국가주의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일어날까요? 그리하여 오늘날과 같은 탈냉전 시대에 이를 통해 미국과 유럽이 영구적으로 꿈꾸고 있는 보편주의를 견제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88-89)


"우리는 왜 이 시점에서 '비판적'인 '지역주의'를 논하고 있는 것일까요? 비판적 지역주의는 민족주의를 넘어서 혹은 민족주의 아래에서 작동하면서, 동시에 국가와 비슷한 추상적인 구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적 지역주의는 단순히 인권침해를 감시하고 인권침해 사례를 모으거나, 스스로 행동할 수 없는 대중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명분으로 공익소송을 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자신이 실질적인 헌법적 부정의를 바로잡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91)



여기까지가 두 사람의 대담이 끝나고 이제 질문이 시작된다. 질문 중 두 개만 발췌하고, 첫 질문은 다소 분량이 길게 편집돼 있어 발췌자의 독단으로 축약하겠다.



질문2. 데리다가 말한 주권기구 내부의 전략적 잠재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탈주권적 정치는 어떻게 가능하며, 국가라는 구속체제를 넘어선 어떤 관리체가 가능한가? (97-98)


"우리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이러한 진지한 정치적 논쟁을 접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장을 취재하는 카메라의 수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팔레스타인이 하나로 뭉친 단일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의 '투쟁'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팔레스타인과 거기 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단일한 대중적 생각을 확인하는 데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버틀러, 101-102)


"저는 자결권과 민족주의, 지역주의와 민족주의 사이를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구분들을 가로지르고 넘어서면서 끈질기게 비판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정치적이자 이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역주의자로서 피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 엄격하게 얘기하자면, 오늘날 주권 행사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토록 주권에 대한 호소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 국가 주권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용될 수 있고, 그 중에는 우리가 반대해야 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권에 호소하는 것은 위험성을 동반한 협상의 순간을 맞게 합니다." (스피박, 103-104)


질문4. 아렌트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메시아 주의와 역사의 신화생성적 측면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때, 질문자는 스피박이 실천적이라고 말하면서 버틀러에게 답변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질문자께서 버틀러는 철학적이고 저는 실천적이라고 한 것이 흥미롭군요. (...) 역사의 신화생성 측면에 대해서는, 버틀러가 아렌트에 대해 답하겠지만, 저도 한마디 하기로 하지요. 저는 사이먼 기칸디가 생각납니다. 기칸디는, 대학살이 종종 서사에 바탕하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 역사의 신화생성적 이해는 역사가 현재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는 철학적 문제이자 실천적 정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역사가 특정 사회계층이나 민족에 부여한 특권과는 독립적으로,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이 후견인으로부터 해방되고 이제 성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전체주의의 기원』 영문판 290.)라고요. (...) 여기서 아렌트는 반어법을 쓰고 있지요. 아렌트는 세계인권선언이 계몽주의의 기획을 수행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 혜택을 받았던 몇몇 사람만을 언급합니다. (...) 그 신화생성의 일부로서 계몽은 항상 지연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역사를 신화생성적으로 개념화하려 한다면, 철학과 실천의 이분법을 깨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실천적인 목표가 아니고 철학적 목표라고 하면서 버틀러를 가리킬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점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피박, 108-111)


"저도 실천적이에요. (...)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비판적 지역주의가 기존의 지역학 지도를 형성했던 냉전구도에 대한 비판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지도를 다시 그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혁신적 작업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폭력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는[아렌트에게 있어서 무조건적 자유 개념과 역사의 우연성의 관계를 이야기함] 역사를 전무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며, 그런 역사인식[역사를 무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버틀러, 111-113)



결론


"마르크스는 혁명의 순간을 허황된 약속의 순간이라고 했지요. 유럽과 미국 젊은이들이 보편주의를 다시 원하는 요즘, 저는 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렌트의 역사인식이 무에서 시작된다면 마르크스는 그 정반대라는 것 외에, 이 문제는 당분간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겨두기로 하지요." (스피박, 113)


"조르주 소렐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급진적 투쟁을 위해서는 허황된 미래상이 필요하지만, 그 미래상이 반드시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그럼 오늘 우리는 이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을 얘기하는 것으로 자리를 마무리하기로 할까요?" (버틀러,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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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걸로 발췌 끝~...


정말 시간이라는 자원이 무한하면 별 뻘짓을 다 할 수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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