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knowledgement

코로나 시대의 사랑, 추기 본문

쓰기/쓰기_긴글

코로나 시대의 사랑, 추기

herimo 2020. 3. 19. 02:12

코로나 시대의 사랑, 추기

 

변명

이 추기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사항에 대해 변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지난 글에서 ‘일단락’ 지은 글에 이제와서 추기를 보태는 이유를 밝힐 것이고, 다음으로는 지난 글을 왜 끝낼 수 없었는지 적을 것이다. 원래 글을 블로그에 올리고 내 블로그를 꾸준히 읽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두 명이나 ‘왜 거기서 끝내냐 좀 더 써라’고 나를 보채서 ‘역시 그렇게 끝내는 건 좀 그런가…’ 싶어서 급하게 추기를 적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결론 없이 글을 내버려두는 것은 마음에 걸리는 면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 자신도 결론을 내리지 않고 글을 맺는 것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식으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관해 설명할 필요도 있겠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원래 글은 우리가 서로를 훼손할 가능성이 극심해진 시대에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물론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나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쓰고, 그대로 퇴고하지 않고 올렸다. 실제로 작업에 쏟은 시간은 대충 대여섯 시간 정도 되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앞의 글은 직접적으로는 내 배고픔 때문에 마무리되지 못한 채 중단되었고, 좀 더 내밀한 원인은 글 자체의 완결성을 갖추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완결된 글을 쓰는 데 스트레스를 느꼈는가? 글의 완결성은 모든 글쓴이들을 압박하는 요소이기에 이 질문은 다소 불필요해보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조금 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 짧게 말하자면 지난 글에서 사랑을 규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혹은, 규정하기를 망설였다. 역시나 글쓴이에게 찾아오는 ‘이번에는 좀 다르게 써보고 싶어’ 병이 도진 것이다…. 며칠 더 고민하고 이런 글 저런 글을 읽으면서 이번에도 역시 내가 항상 나처럼 쓴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튼 일기는 이쯤 쓰고, 아래부터가 본문에 해당한다. 이중 섹션 1~섹션 3은 아직 단단하게 조여매지 않은 이론적 소회이므로 접어둔다.

 

 

더보기

사랑의 규범성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다양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미는 로맨틱한 사랑이겠지만, ‘사랑이 코로나 사태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상기시키는 ‘사랑’은 주로 ‘이웃사랑’이나 ‘박애’의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 넌지시 밝힌 바와 같이 나는 기부나 선의에 기대 이 사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는 바이러스의 특성과 연관되어 있다. 바이러스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쉽게 신체의 경계를 침범한다. 일례로, 코로나 사태뿐만 아니라 어떤 재난 상황에서든 구호 물자가 필요한 이들에게 닿기 위해서는 뼈와 살을 가진 인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일한다. 바이러스에 의해 폐가 망가질 수도 있고, 극한 환경에서의 과도한 노동에 몸과 마음이 망가지기도 한다. 이러한 노동을 단순히 ‘선의’, ‘이웃사랑’, ‘박애정신’의 발로로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런 행위에는 자신의 안위를 밀어놓고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데 몰두하도록 만드는 의무감이 필요하다.


물론, 누군가는 의무감에 찬 행동도 어쨌든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정당한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희생, 혹은 무조건적인 연대와 지지에 가까운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의문스럽다. 자기희생이나 무조건적인 연대와 지지는 도대체 ‘무엇’에 대한 사랑의 표출인가? 대상 없는 사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들은 국가를 사랑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가족이나 친구를, 또 자기 자신을,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의무라도 사랑할 것이다.


코로나 사태만 보더라도 사랑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며, 어떤 의미로 좁혀 보더라도 여러 대상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 지칭될 수 있다는 것이 사랑이 지닌 규범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사랑을 그 의미가 무엇이든, 대상이 무엇이 됐든, 그 모든 것에 유사한 형태를 부여하는 강력한 경향성이다. 사랑은 특정한 유형이나 특정한 대상에 부착되기보다는 사랑이라는 자체적 형식 자체에 부착된다. 우리는 사랑을 사랑해야 한다—이것이 사랑이 지닌 강력한 규범성이다.

 

사랑—욕망과 충동 사이

사랑의 규범성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의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라는 결론을 도출하지는 않는다. 사랑은 오랫동안 연대와 결속의 자원으로, 특히 소수자 정치의 귀중한 자원으로 여겨져 왔다. 사랑에서 맹목성을 걷어낼 수 있다면, 정치적 자원으로서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을까?


정신분석학자 레나타 살레클(Renata Salecl)은 사랑이 무엇인지 규정하지 않은 채로 사랑이라고 불리는 여러 정동을 정신분석학의 기초적 개념을 통해 분석함으로써 사랑(들)의 여러 판본을 구체화한다. 일상적으로 정서로서의 사랑은 로맨스의 문법과 쉽게 뒤얽혀 있다. 한 소설의 여주인공이 “당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라고 말할 때, 그녀의 말은 로맨틱한 사랑에 대한 선언으로 읽을 수 있을 수 있으며, 살레클이 보기에 이때의 사랑은 “사랑이 내포하는 괴로움 때문에” 로맨스를 성취한다.[각주:1] 여기서 사랑을 사랑다운 사랑, 즉 로맨틱한 사랑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을 막아서는 ‘제약’들이다. 이 제약이 사회문화적 구조[각주:2]에 의해 마련된다. 사회문화적 구조로 인한 제약은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나’에게 부과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아직 ‘나’가 아닌 무언가가 사회적 제약과 맺는 최초의 사랑 관계를 ‘열정적 애착(passionate attachment)’의 드라마로 그려낸다.

 

아이의 사랑은 판단과 결단에 앞선다. 좋은 보살핌을 받고 잘 자란 아이들은 먼저 사랑할 것이고 그 후에야 비로소 그 또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분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아이들이 맹목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아주 이른 시기부터 중요한 종류의 구별과 ‘앎’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아이가 정신적·사회적 의미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의존성과 애착의 형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삶의 필수조건으로 사랑이 연루된 것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는 그·그녀가 애착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또 자신으로서 살기 위해서 애착을 보여야만 한다.[각주:3]

 

이 정신분석학적 드라마를 통해 ‘나’가 출현한다고 할 때, ‘나’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없는 애착의 대상에 필연적으로 의존한다. 결국 제약은 어떤 면에서 ‘나’를 만들어낸 기반이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선택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내가 거기에 의존하고 있음을 파악하기도 어려운 ‘나’가 결여된 장소로 되돌아온다. 살레클은 “사랑의 마술은 주체가 어떻게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결여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사랑받는 사람 안에 있는 결여를 다루는가 하는 것”이라고 쓴다.[각주:4] 나는 살레클이 말하는 ‘사랑의 마술’을 다른 사람을 얻어내고자 하는 게임에서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거나 끌려들어가는 두 가지 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살레클은 이 두 가지 태도에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려 ‘욕망’과 ‘충동’이라는 방향성을 설정한다. 우리는 한편으로 다른 사람이 몇 가지 현실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나를 욕망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나는 그것을 줄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신비로운 매력을 부과하려 한다. 다른 한편으로, 무책임하게도 순전히 만족을 얻기 위해서만 행동할 수도 있다. 충동에 사로잡힌 우리는 결국 자기파괴적인 결과를 낳을지라도 만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은 욕망과 충동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꼬리잡기 게임에 불과한 것일까? 오히려 사랑은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절묘한 균형 위에서만 존속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균형을 위해 우리는 욕망의 가지를 쳐내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를 손에 쥔다. 이 최후의 욕망은 다른 사람을 손에 넣음으로써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녀 역시 “실제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그 무엇”[각주:5], 곧 나와 타인 사이에 이뤄지는 변증법적 드라마 속에서 탄생한 침전물인 충동의 대상을 향한다. (슬로베니아 학파의) 정신분석학적 성찰에 따르면 욕망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부과해온 거짓말(환상)을 지나 충동의 영역으로 이행하는 행위야말로 윤리적인 것이다.[각주:6] 이 설명은 다소 불충분한 것이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찾고(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경로를 거쳐 그것에 도달하고), 그것을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는 행위야말로 윤리적일 수 있다는 통찰이다.

 

우정과 진실

나는 하찮은 것(정신분석학의 경우에는 순수욕망)을 끝까지 소중히 여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되는 행위들이야말로 윤리적일 수 있다는 정신분석학의 윤리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년에 세공한 실존미학(aesthetics of existence)과 함께 읽을 때 우리가 사랑에서 진정 소중히 여길 만한 것을 조금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방식으로서의 우정」이라는 짧은 인터뷰에서 푸코는 “내가 생각하기로, ‘게이’가 된다는 것은 동성애자의 심리적 특성 및 눈으로 볼 수 있는 가면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제안한 바 있다.[각주:7] 푸코가 동시대 게이들의 삶에서 어느 정도 영감을 얻은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 구절에서 푸코는 게이의 ‘정체성/동일성’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가정을 멀리하면서 인간적인 삶으로 가정된 영역 바깥으로 축출되어 자신의 삶에 놓인 공백을 메워 나가야 했던 이들의 창조적인 힘에, 그리고 그 결과 창발하는 새로운 형태의 삶, 관계, 우정에 주목한다. 주어진 형태를 넘어 새로운 삶을 창안하려는 노력은, 푸코가 고대 그리스시대의 문헌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삶을 (그것과 일치한다고는 감히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연상시킨다. 이때, 고대의 아름다운 삶이란 규칙을 고수하고 열정을 갖되 중용을 지킬 수 있는 동시에 자신이 자신의 주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삶을 일컫는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약한 삶, 그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대상으로 쥐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푸코의 실존미학이 정신분석학의 윤리와 겹쳐지는 희미한 영역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푸코가 명시적으로 연결관계를 탐문하지는 않지만 그의 지적 여정을 고려할 때 그가 실존미학에 관심을 두었던 시기에 마찬가지로 관심을 두었던 진실 말하기의 문제, 곧 파레시아를 언급하고 싶다. 푸코는 파레시아가 어원상 ‘모든 것’을 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서 이 행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파레시아를 행하는 자인 파레시아스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말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타인에게 활짝 열어 보입니다. 파레시아 내에서 말과 담론은 화자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완벽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청중은 화자가 생각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각주:8]

 

파레시아스트는 모든 것을 말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을 말하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푸코에 따르면 고대의 텍스트에서 파레시아는 우정과 대단히 중요한 관계를 맺는다.“[파레시아의] 두 번째 범주는 (그리스 문화 내에서 긴밀한 유연관계를 가지고 있는) 우정 혹은 사랑이라는 범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에게 파레시아를 행해야 합니다.”[각주:9]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서 새로운 우정, 혹은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창안해 나가는 과정은 그것을 말함으로써 내가 위험해지는 진실을 모두 말하는 것을 포함한다.[각주:10] 즉, 자기 삶에서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우정과 사랑을 나눈 이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맺으며: 공포와 사랑

공포가 공포의 대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판단이나 직감과 무관하지 않다면, 공포를 내려놓아도 된다는 요구는 아무래도 무리한 요구로 보인다. 나는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마스크를 낀 채 키스하는 사진이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는 제목을 달고 하나의 밈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사진이 실제로 요즘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사진이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표상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논의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사진에서 두 연인은 입술을 통해 타액이 교환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포기하고 만나 마스크 위로나마 키스를 한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 솔직히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라는 웨딩피치 밈이 떠오르긴 한다...

 

이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그들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서로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을 숨기지 않는다는 데 있을 것이다. 공포를 내려놓으라는 요구가 무리한 요구라면, 공포 앞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는 요구는 어떨까? 이 사진처럼 극적으로 연출된 모습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마스크를 썼으면서도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커플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혹은 어떤 커플은 이 시대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입을 맞추고 타액을 교환할 것이다. 이들의 사랑에서 어느 정도 숭고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들의 사랑이 지닌 자기파괴적 성격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자기파괴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사랑의 행위를 실행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그 순수한 열정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에 쓴 글에서 신천지 신도의 교단에 대한 사랑과 HIV/AIDS에 노출된 남성 동성애자들의 사랑을 구분하는 예민함, 혹은 기부에 깃든 선의와 무조건적인 연대와 지지(지젝의 바람에 따르면 ‘공산주의’)를 구별할 수 있는 날카로움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했었다. 두 경우 모두, 전자와 후자를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을 어디까지 버릴 수 있는지, 사랑의 대상이 자기 자신의 현실을 지속하는 것인지 여부에 따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자기파괴를 긍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의 경우 ‘나’ 혹은 ‘우리’가 여태까지와 같은 형태로 존속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선택을 감수한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삶의 공백 속으로 우리 자신을 내던지는 삶, 선택에 깃든 불안과 두려움을 지워버리지는 못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을 감내하는 것을 허락하는 우리들의 열정과 무모함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은, 역시 ‘사랑’일 것이다. (끝)

 


 

 

  1. 레나타 살레클,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이성민 역, 서울: 도서출판 b, 2003), 31면. 여기서 살레클이 예시로 드는 소설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이다. [본문으로]
  2. 정신분석학자인 살레클은 이를 라캉의 용어인 ‘상징계’로 설명하지만, 이 글은 가독성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문 용어들을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주디스 버틀러, 『권력의 정신적 삶: 예속화의 이론들』(강경덕·김세서리아 역, 서울: 그린비, 2019), 22면. 단, 번역본에서 ‘정념적 애착’으로 옮긴 것을 ‘열정적 애착’으로 고쳤다. [본문으로]
  4. 살레클, 앞의 책, 35면 [본문으로]
  5. 살레클, 위의 책, 88면.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는 ‘대상 a’를 일컫는다. [본문으로]
  6. 정신분석학의 윤리와 충동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볼 것. 알렌카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 칸트와 라캉』(이성민 역, 서울: 도서출판 b, 2004), 8장. [본문으로]
  7. “To be "gay," I think, is not to identify with the psycho- logical traits and the visible masks of the homosexual but to try to define and develop a way of life.” Michel Foucault, “Friendship as a Way of Life,” Ethics: Subjectivity and Truth, The Essential Works of Foucault 1954-1984, vol. 1, ed. Paul Rabinow, New York: The New Press, 1997, p. 138. [본문으로]
  8. 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 파레시아』, 파주: 동녘, 2017, p. 92. [본문으로]
  9. 푸코, 위의 책, 102면. [본문으로]
  10. 파레시아가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을 떠올리게 만들긴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모든 커밍아웃이 파레시아에 해당한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한국사회에서 커밍아웃의 핵심 서사로 여겨지는 부모에 대한 커밍아웃은 여러 면에서 파레시아를 떠올리게 한다. [본문으로]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