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knowledgement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본문

쓰기/쓰기_긴글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herimo 2016. 8. 23. 16:26

* 유어마나에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리뷰를 기고했는데, 원래는 좀 더 길었거니와 포인트도 미묘하게 달랐다. 일단 써둔 것이니 여기에 올려둔다.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가도록 허락하소서 (출 5:3)


The soil, the climate, the careful selection and caring for the tea plants and how they are plucked and processed all has an impact on a tea’s flavour. 

— Teehaus Ronnefeldt


To inspire and nurture the human spirit – one person, one cup and one neighborhood at a time.

— Starbucks


“보통” 마법소녀…언?!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네이버에서 주최하는 2013 대학만화 최강자전에서 3위 안에 들며 정식 연재를 확정 지었다.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1화가 2014년 5월 16일에 업로드된 이후 토요 웹툰으로 연재되고 있다. 1화에서 주인공 아메리카노 빈즈(이하 ‘아멜’)는 평범한(?) 마법소녀로 보이고 금발로 탈색한 철수(1화에선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마법소녀물에 흔히 등장하는 남주인공처럼 보인다. 그러나 1화 끝부분에서 마법소녀물에 대한 통상적인 독해는 철저히 배신당한다. 아멜은 사실 여장한 남자 아이이며, 그렇다면 철수도 이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이 되긴 어렵다. 이 웹툰이 연재되는 플랫폼이 BL을 입에 담기도 꺼려하는 게 아닐까 의심되는 네이버 웹툰이니 BL일 가능성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보기 좋게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2화에서부터 이 ‘마법소녀…언’의 사정을 설명한다. 아멜의 어머니이자 마법세계의 영주 중 하나인 에스프레소 빈즈(이하 ‘에스프레소’)는 아직 어린 아멜에게 적대 세력인 ‘황혼새벽회’를 잡아들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유는 그들이 ‘금기’를 범했다는 것이다. “사회가 정한 “보통”을 벗어나 이상행동을 하게 되면 다 이단이야.”라는 에스프레소에게 아멜은 자신도 보통이 아니니 ‘금기’를 범한 이단이 아니냐고 묻는다. 마법세계에서는 여성만 마력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인 자신이 마력을 다룰 수 있으니 말이다. 이 단락에서 여타의 마법소녀물처럼 이 만화도 왜 마법사가 소녀여야만 하는지, 소년이라면 왜 소녀로 보여야만 하는지 나름의 설명을 제공한다. “마법소녀”만이 마력을 다룰 수 있다. 이것이 아멜이 여장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금기 1. 남성이 마력을 다루는 것.


에스프레소는 이런 아멜의 질문에 자신의 (사회적으로는 ‘딸’로 알려진) 아들에게 ‘너는 정상이야.’라고 말하는 대신 황혼새벽회를 잡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덧붙인다. 에스프레소의 설명으로는 영지 나무는 500년 전부터 주민들의 마력을 걷어 땅을 관리해왔는데, 40년 전 불만을 지닌 주민들이 마법세계를 이탈(exodus)하면서 균형이 깨졌단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법세계를 현 상태로 보존하는 의무에 기여하지 않은 자들이다. 이들 역시 사회가 정한 “보통”의 경계 바깥에 있다.


금기 2. 현상 유지에 기여하지 않는 것.


따라서 비정상적인 아멜이 자신이 “보통”임을 주장하기 위해선 자신의 젠더를 여성으로 속일 수 있어야 하고, 현상 유지에 기여해야 한다. 그/녀는 누구보다 많은 황혼새벽회라는 ‘거름’을 수거함으로써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이 현상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의심을 피해갈 수 있다. 남자는 마력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니, 아멜의 뛰어난 실적은 더더욱 그가 여성으로 보이게끔 하는 표식으로 기능한다.




차와 커피

마법세계는 영지 나무의 뿌리를 기준으로, 9개의 방위에 해당하는 9개의 지방으로 나뉠 것으로 추정된다(표1 참조). 이중 작품 내에선 40년 전 멸망한 서쪽 뿌리 지방을 제외하고 7개의 지방의 영지 나무 뿌리가 존재한다고 언급된다(79화).


아멜이 속한 빈즈 가문은 북동쪽 뿌리 지방을 다스리는 귀족이다. 귀족이 되기 위해선 타고난 마력의 양이 많아야 한다. 그리고 선대가 지닌 마력의 양이 많을수록 후대가 지니는 마력의 양도 높아진다. 이에 따라 마법세계에서는 마력의 세습에 기반을 둔 철저한 신분제 사회가 존속되고 있다.

좋은 나무가 자라기 위해선 지질, 풍토, 관리 등이 중요하다. 영지 나무라고 다를 이유는 없는 것인지, 북동쪽 뿌리 지방인 빈즈 가문을 제외하고는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가문의 명칭은 유명한 차 브랜드에서 따왔다. 182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설립된 티하우스 로네펠트는 자사 홈페이지에 로네펠트의 기준을 만족하는 곳은 다섯 국가에 불과하며, “지질, 기후, 주의 깊은 차나무 선별과 관리, 수확 및 처리 과정, 이 모든 것이 차의 풍미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로네펠트의 기업 정신은 조금만 수정하면 <아메리카노 엑소더스>의 마법세계에 적용해도 어색하지 않다. 지질, 기후, 주의 깊은 거름의 선별과 관리, 거름의 수확 및 처리 과정은 영지 나무의 번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영지 나무의 번성은 곧바로 가문의 번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북동쪽 뿌리 지방을 다스리는 것은 커피의 열매(씨앗·콩)를 로스팅하고 고온고압으로 추출한 에스프레소가 아니겠는가. 차와 커피 모두 그 수확 과정이 고도로 노동 집약적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두 상품이 소비되는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 커피는 상대적으로 대량 수확 및 균질한 맛을 내기에 용이하고 현대 노동시장에 필수불가결한 카페인을 공급하면서 점차 대중적인 음료로 자리 잡아 왔다. 균질화된 커피를 국제적 규모로 보급하고 있는 스타벅스는 기업 이념에 무려 인류·인간성(humanity)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기도 한다. 아무튼 커피는 차보다 더 대중적인 음료다. 적어도 <아메리카노 엑소더스>가 생산 및 소비되고 있는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에스프레소가 동쪽 뿌리 지방의 영주 피에르 디아즈를 “타고난 마력량으로는 따라갈 자가 없던… 내 사랑스런 파트너”라고 언급하는 것(2화)은 퍽 의미심장해 보이지 않는가. (살짝 백합의 향기도 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에스프레소는 마력량에서나 마력을 다루는 기술에서나 중앙과 다른 여덟 뿌리 지방을 통틀어 최고라고 일컬어진다. 그런 에스프레소의 “타고난 마력량”이 피에르 디아즈에 못 미쳤다는 고백은 현재 그녀의 지위가 타고난 마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셈이다. 실제로 극이 전개됨에 따라 에스프레소는 원래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마력량을 늘릴 방법과 이를 정교하게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원래 북동쪽 뿌리 지방을 다스리던 위타드 가문을 밀어내고 영주가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평민이었던 신분을 표시하기라도 하듯, 에스프레소 빈즈라는 이름과 성(姓)은 모두 일반 명사로부터 왔다. 위타드·니나스·로네펠트·딜마·포트넘&메이슨 등 주로 19세기에 설립된 티하우스와 그 창립자로부터 이름과 성을 따온 타 지방의 영주들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배경을 참고하면서 에스프레소 빈즈(커피 콩)가 위타드(찻잎)를 밀어냈다는 과거사에 주목해야 한다. 극중 행적으로 볼 때, 에스프레소야말로 앞서 언급했던 두 번째 금기를 가장 철저히 어기고 있다. 평민인 그녀가 영주 가문을 밀어내는 것만큼 마법세계의 현 상태를 동요시키는 일이 또 있겠는가. 에스프레소와 황혼새벽회가 공모하는 것 역시 이러한 과거사를 되짚어보면 무척 자연스럽다. 둘 다 사회 질서를 교란시키며 두 번째 금기를 어기고 있다. 그리고 금기 위반의 중점에는 영지 나무의 비밀이 자리 잡고 있다.



엑소더스

영지 나무는 마력을 걷어 평화로운 땅에 살게 해준다(79화). 이 명제는 70회에 이르도록 크게 의심받지 않는다. 아멜이라는 주인공의 시점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성별이 반전된 마법소녀물 정도의 이야기로 보였던 초반부가 있다. 그런데 70회를 전후로 해서 <아메리카노 엑소더스>의 드라마는 다층적으로 전개된다. 아멜의 레이어 위에 남동쪽 뿌리 지방의 거름 회수꾼 로네 펠트너의 레이어가 겹쳐진다. 로네 펠트너를 중심으로 ① 현 거름 회수팀의 다른 마법소녀들, ② 현 영주 세대의 거름 회수꾼 시절의 사정, ③ 서쪽 뿌리 지방과 황혼새벽회의 숨겨진 진실이 조금씩 새어 나온다. 황혼새벽회의 내러티브와 에스프레소의 내러티브가 겹겹이 쌓이면서 아멜이라는 표면적 주인공의 배후가 두터워진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를 마법소녀물로 포장된 전형적인 남성 히어로물로 읽고자 하는 시도는 다시 한 번 배반당한다. 오히려 아멜은 아무것도 몰랐던 꼭두각시 주인공쯤 되는 인물 같이 보인다. 다른 인물(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더라도 이들은 모두 여성이다)의 시각이 덧대어짐으로써 이야기는 깊이를 더할 수 있고, 덧붙임의 결과 아멜이 획득했던 주인공=히어로의 권위는 의문에 부쳐진다. 이쯤 되면 영지 나무의 진실로부터 소외되어 왔던 아멜의 이름이 왜 제목에까지 들어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2년간 연재된 <아메리카노 엑소더스>에서 영지 나무의 진실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이는 단연 에스프레소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제목은 <에스프레소 엑소더스>가 아니라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다. 아멜은 무엇으로부터 탈주(exodus)해야 하는 걸까? 많은 독자가 처음엔 에스프레소를 꼽았다. 아멜의 대외적 약혼자인 스트로 바이트는 아멜의 아버지이자 에스프레소의 배우자인 에비안 빈즈를 상대로 아멜은 쓸모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겠냐고 비아냥거린다. 에비안은 아멜이 에스프레소에게 ‘높은 확률로 마력을 빼앗기고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침대에서 보내게 될 거’란 답을 돌려준다(100화). 아멜이 태어나면서부터 가해졌던 첫 번째 금기(남성은 마법을 써선 안 됨)로부터 도망칠 것이기 때문에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란 제목이 붙었으리란 추측도 몽상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아멜은 어려서부터 여성으로 보여야 했고, 가족 외에는 철수와 영희 앞에서만 남성인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이 첫 번째 금기로부터의 탈주는 분명히 사회 질서를 동요시킬 수밖에 없고 이는 두 번째 금기를 어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마법세계의 질서가 영지 나무의 뜻에 따라 구축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다면, 탈주해야 할 대상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는 역시 영지 나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단락을 이끌어갔던 의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영지 나무의 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아멜이 어떻게 영지 나무로부터 탈주할 수 있을 것인가?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2년간 연재된 102화 분량의 이야기에서 계속해서 주인공을 사건의 변두리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변두리에 서 있는 이들을 주목하고자 했다. 변방의 평민에 불과했던 에스프레소는 연구와 개발을 통해 영지 나무의 중앙 뿌리를 불태우는 데 성공한다. 황혼새벽회의 수장은 귀족이었지만 지위를 버리고 마법세계의 바깥으로 탈주한다. 그리고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닌, 누구나 노력한다면 접근 가능한 경로인 과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마법세계의 병패와 영지 나무의 음모를 뿌리뽑고자 한다. 이 둘이 영지 나무를 대상으로 음모를 꾸밀 수 있었던 까닭은 영지 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와 질서로부터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노

아멜이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분명 영지 나무가 표상하는 중앙으로부터의 가장 멀찍이 선 변두리를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가 정한 “보통”을 벗어나 이상행동을 하게 되면 다 이단”이라고 에스프레소는 말한다. 아멜은 마법세계에서 “보통”의 존재가 아닌 이단아다. 그리고 마법세계의 사회 질서는 영지 나무가 정한 규칙을 토대로 삼고 있다.


에스프레소는 아멜과 달리 영지 나무 체제로부터 ‘충분히’ 멀리 있지 못하다. 그녀는 평민이라는 신분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영지 나무에 거름을 공급하는 귀족이다. 에스프레소가 귀족사회로 잠입한 것은 영지 나무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지만 그녀는 그 과정에서 영지 나무 체제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회가 마법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 인정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반면, 아멜은 마법소녀를 연기해야만 하는 남성이며, 평민이었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지만 귀족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멜이라는 캐릭터는 딱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도록 여러 가지 맥락의 교차점 위에 있다. 모호함의 적층 위에서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특정 장르의 문법에 귀속되지 않는 데 성공한다. 아멜은 ‘마법소녀…언’이기에 마법소녀물이라는 장르의 문법을 교란시킨다. 그는 사건의 중심부에서 소외되었기에 히어로물·영웅서사시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도 없다. 아멜과 스트로-바이트의 관계는 일견 궁정 서사(위기에 처한 귀족 영애 아멜을 구하는 기사 스트로-바이트)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성애 서사로도 읽히며 흠 없는 궁정 서사가 구축되지 못하게 만든다. 아멜은 판타지의 문법을 기반으로 하는 마법세계에 본적을 두고 있지만, 과학을 이용하는 지구에 있을 때 가장 자유롭다. 끝으로 만약 아멜이 마법세계 전체의 대탈주를 성공시킨다면 그는 신화적 영웅으로 기록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평민의 혈통을 이어 능력으로 신분제를 초월한 민중소설의 영웅으로 봐야 하는가?


확실한 것은, 아멜이라는 캐릭터의 비정형성과 이에 호응하는 작품의 장르-비결정성이 아멜에게 좀 더 많은 여지를 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멜만이 뭔 짓을 하든 개연성을 깨뜨리지 않는다. 에스프레소가 갑자기 마법세계를 무너뜨리고 대탈주를 감행하는 식의 전개는 그간 그녀의 행적으로 미뤄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황혼새벽회가 마법세계 주민 전체를 설득하는 것도 바람 빠진 풍선같이 맥 빠지는 결론이다. 이에 비해 아멜은 귀족사회의 일원으로서 마법세계의 주민들을 설득하기에 유리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지구로 탈출을 감행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다. 심지어 400년 이상 이어져 온 마법세계의 규칙의 변화를 상징할 수도 있고, 그가 성공적인 거름 회수꾼이었다는 이력은 대안적인 체제의 튼실함을 증명하는 사례로 사용될 수도 있다.


아멜의 욕망과 소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태로 서사의 전개에 간섭할지 추측해보기엔 아직 재료가 부족하다. 그의 욕망이 어머니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와 친구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고픈 욕구 사이의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서사로 이어지든 간에,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힘을 잃지 않을 만큼 촘촘한 선로 위에 놓여 있다. (장르적으로) 명백한 기원을 갖지 않는 이야기이기에 어떤 결론이 기다릴지 명확한 윤곽을 그려내기도 어렵다. 다만 많은 이들이 만족할 만한 방향으로 마무리된다는 데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지 않을까. 기원을 정확히 추적할 수 없는 음료인 아메리카노가 가장 대중적인 음료 중 하나로 거듭난 것처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