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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제갈량, 혹은 조롱의 울분

herimo 2016. 5. 4. 01:11

여자 제갈량, 혹은 조롱의 울분


* 이 글은 〈여자 제갈량〉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자 제갈량〉 보러가기.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가 여성의 남성성female masculinity에는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반면 남성의 여성성에는 꽤나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 주디스 핼버스탬.

우리는 다양한 남성성들 사이의 관계, 곧 남성성들이 동맹을 맺고 지배하고 종속되는 관계를 인식해야 한다. 그런 관계는 누군가를 위협하고 착취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포함과 배제의 실천을 통해 구성된다. — R. W. 코넬 

패러디의 목적은 … 우리가 해체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바로 그 관념화를 강화시켜주고, 자신의 적이 가진 권력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분석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통탄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던 대중적인 장에 자신이 한 자리를 차지하는 바로 그 순간, 풀려나오는 울분, 그 소름끼치는 새디즘을 한번 고려해보는 것이다. — 주디스 버틀러



되돌아보면

〈여자 제갈량〉(김달, 2014-)은 2014년 7월 루리웹에 올라온 “여자 제갈량 만화(여제만)”라는 두 페이지짜리 단편으로부터 시작했다. 펜으로 대충 그린 듯한 그림체에 컷은 삐뚤빼뚤, 유비가 가엾으니 옆에서 힘이 되고 싶다고 눈을 빛내는 제갈량의 그림으로. 작가 역시 이 당시 연재작에 대해 “지금보다 모에 개그 만화 성격이 강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휴재 공지). 그 후 빼어난 유머 감각을 바탕으로 각종 서브컬처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패러디, 무엇보다도 참모들을 ‘여성’으로 그린다는 아이디어 자체에서 파생되는 흡인력(소위 ‘서비스 컷’이 그 중 일익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해선 안 되겠다)은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여자 제갈량〉은 루리웹 ‘창작 만화 게시판 대문’에 두 어 차례 소개되었고, 입소문을 타 〈레진 코믹스〉에서 정식 연재가 결정되었다. 레진코믹스 연재와 함께 주인공은 제갈량뿐만 아니라 성별을 전환한 여섯 책사로 확대됐고, 이야기의 분량도 최소 600화 정도로 넉넉히 잡았다고 한다.


요컨대, 〈여자 제갈량〉은 처음부터 패러디물로 시작했다. 정식 연재 이후에도 〈여자 제갈량〉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영역에 걸쳐 광범위한 패러디를 시도한다. ① 《삼국지연의》를 김달식 그림과 전개 방식으로 다시 그리는 패러디, ② 다양한 서브컬처 요소에 대한 패러디, ③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연의》의 전개에 개입하는 패러디, ④ 앞의 세 가지 패러디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남성과 남성사회에 대한 패러디. 어쩌면 꼼꼼히 〈여자 제갈량〉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1번 항목부터 차례차례 살펴보는 방식이 더 유효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글은 〈여자 제갈량〉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각주:1] 오히려 대단히 편중된 시각을 견지하며 〈여자 제갈량〉과 페미니즘, 성별전환이라는 패러디의 가능성과 한계라는 좁은 영역에 집착할 것이다.



남녀 모두 불쾌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여자 제갈량〉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페미니즘을 개입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남성을 여성으로 성별전환시키는 TS패러디물은 흔히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그려진다는 점이다. 분명히 〈여자 제갈량〉의 루리웹 초기 연재분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 있다. 페미니즘의 기치 아래 대상화를 거부하는 동시에 남성의 성적 욕망에 복무한다는 말이다. 우선 남성의 욕망에 호응하는 경우로는, 여자 제갈량의 세미 누드를 그린 서비스 컷이나 병약 미소녀나 로리 속성(빈유) 등 여성 캐릭터에 덧붙여지기 쉬운 ‘모에’ 요소를 강하게 어필하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여자 제갈량〉의 여자 책사들은 모에하게 남아 있는 (성욕의) 대상이 아니라 남성중심적 사회에 “불시착”한 능력자들로 묘사된다. 예컨대 제갈량이 왜 책사가 됐는지 답할 때, 그리고 곽가가 조조에게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장면에서 여자 책사들과 남성중심사회의 간극이 돌출한다. 그러니까 연재 이후에 페미니즘이 접목됐다는 주장과 달리, TS와 페미니즘의 접목은 〈여자 제갈량〉이 루리웹에 아마추어 만화로 연재되던 당시에 이미 싹이 트여 있었다.



물론 정식 연재 이후에 남성중심사회에서 살아가는 책사들의 고뇌가 곽가·순욱·사마의·제갈량 등 다양한 인물을 통해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두고 전개되고 있기에 페미니즘과 관련된 주제 의식이 정식 연재 이후 부각되었다는 주장 자체가 특별히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의문스럽게 여기는 지점은 이 만화가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온라인상에 많이 오르내린 올해, 남녀 모두 불쾌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각주:2]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자 제갈량〉이 페미니즘 작품으로 소개되는 와중에도 왜 이 작품이 페미니즘 작품인지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웹진, 평론가의 단평, 인터넷 게시판의 추천 글에 이르기까지, 〈여자 제갈량〉을 소개할 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빼놓는 경우는 드물지만 막상 이 작품의 어떤 요소가 페미니즘으로(혹은 페미니즘적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의 두께가 매우 얇다는 것이다. 여자 제갈량은 왜 페미니즘 작품으로 읽힐 수 있는가? 원래 남성으로 묘사됐던 책사들의 성별을 여성을 바꾸었기 때문인가? 능력 있는 여성을 그리기 때문인가? 여성이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도 중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인가?



페미니즘, 견딜 수 없는 불만


사마의나 제갈량의 경우에도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마 가문의 가주가 여성이래도 그들은 족보에서 남성으로 기록되어야 하며 남성 조사관을 속이기 위해 뇌물을 안겨주어야 한다. 순욱이 남성으로 보임으로써 자신을 남성 권력에 의탁하고, 곽가가 한계를 절감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사마의 가문의 왜곡된 남성-여성의 권력관계를 두루 훑은 뒤에, 제갈량은 이 문제를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낸다. 그는 격분해서 말한다. “설령 네[유비]가 황제가 되더라도 내게 줄 수 있는 권력도 자유도 황제가 행사할 수 있는 재량 뿐이겠지.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아.” (80화, 원문에 따름) 이렇게 제갈량은 곽가가 항상 생각하면서도 남성-군주인 조조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했던 “진짜” 문제를 유비에게 이야기한다. 유비는 곧바로 황제의 자리라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제갈량에게, 그리고 분명히 곽가에게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 선양 역시 남성-군주의 권력이 공인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결국 황제가 되더라도 여성-책사의 권위는 여전히 그 기원을 남성에 의존할 뿐이기 때문이다.


곽가와 제갈량의 반대편에는 문명 발생 이전의 모계 중심 사회에서 기원을 두고 그 모계제를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사마 가문과 그 가주 사마의가 비틀거리며 서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마 가문 역시 기원과 무관하게 공적으로는 남성으로 기록됨으로써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책사들을 둘러싸고, 그들을 짓누르고, 얽매고, 불만과 울분을 토해내게 만드는 것은 권력이 남성의 모습을 취하거나 남성의 허락을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다는 현실에 박혀 있다. 더욱이 지모(智謀)라는 여성-책사의 권력의 원천 역시 항상 남성과 견주어서 평가받고 있다.[각주:3] 곽가가 등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지모가 여느 “남성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인 곽가의 권력은 그의 지모가 “남성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남성인” 조조의 권력을 빌리고 있는 데 불과하며, 그의 지모가 여전히 뭇 남성들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조조에게, 그리고 그 휘하 여러 남성들(하후돈, 진군 등)에게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만 그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지 않을 수 있다. 곽가는 여인의 몸으로 관직을 할 수도 있다. 평소 언행이 무례할 수도 있다. 여성과 잠자리를 해도 상관없다. 단, 그녀가 자기 자신을 뭇 “남성들보다” 뛰어남을 “남성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한에서만 그렇다.



그렇다면 〈여자 제갈량〉이 드러내는 것은 책사로서 능력이 있다면 남성중심 사회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성공담 따위가 아니다. 그 능력이 조건 지어지고, 한계에 부딪히는 바탕이 남성과 여성의 권력 차이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 제갈량〉을 페미니즘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이러한 “기울어진 운동장”[각주:4]을 요약적·효과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페미니즘 작품이 만약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한정된다면 〈여자 제갈량〉은 페미니즘 작품은 아니다. 정확히 그 반대로, 구조적 변화가 어렵다는 사실을 패러디를 통해 반복적으로 예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의 패러디, 패러디의 우울

여자 제갈량에 등장하는 성차와 그에 수반되는 권력 차이에 대한 묘사는 분명히 생산지인 2010년대 한국의 상황을 참조한다. 그렇지만 이 묘사가 설득력 있게 작동하는 것은 독자(더 넓게는 여자 제갈량을 수용하는 기후)들 모두 어렵지 않게 《연의》의 시대에도 이러한 성차별이 존재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 제갈량이 패러디하고 있는 영역이 다음 네 가지임을 앞서 언급했다: ① 《삼국지연의》를 김달식 그림과 전개 방식으로 다시 그리는 패러디, ② 다양한 서브컬처 요소에 대한 패러디, ③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연의》의 전개에 개입하는 패러디, ④ 남성을 여성으로 패러디=남성중심사회를 여성도 존재할 수 있는 사회로 패러디. 그리고 네 번째 패러디가 앞의 세 가지와 전개 전체를 결정짓는 패러디라고 주장했다. 서브철쳐 요소를 패러디할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에반게리온 풍 점프슈트를 입은 곽가나 여성-책사들에게 모종의 모에 요소를 부여할 때 참조되는 일군의 여성 캐릭터들이 있다(두 번째를 결정짓는 네번째). 더욱이, 김달식 삼국지 전개에서 여성, 좀 더 넓게는 사회적 약자(여성, 어린아이, 천민, 동성애자, 췌서 등)를 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연의》의 원 서사와 전개 자체를 비트는 유용한 도구이자 근본적 동력이다(첫 번째와 세 번째를 결정짓는 네 번째).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작품이 성립하기 위한 물적 조건이 있다. 남성성을 패러디하는 것이 재미있고 잘 팔린다면, 이 만화가 “남녀 모두 불쾌하지 않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면 이 만화는 레진코믹스라는 플랫폼에서 연재될 수 있다 (기울어진 네 번째).





〈여자 제갈량〉이 페미니즘 작품일 수 있는지 살펴봤던 까닭은 바로 이 네 번째 층위에서 상연되는 패러디의 관찰자가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할 삯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여자 제갈량〉이 (어떤 면에서는) 페미니즘 작품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러한 주장은 이 글을 읽고 있을 누군가에게는 당황스러움, 혹은 분노를, 심지어는 우울을 안겨줄 수도 있을 터이다 (물론 어떤 이의 우울은 어떤 이의 기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의 우울함이 내가 기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여자 제갈량〉을 젠더 평등 사회로 향하는 우화이며, 그렇기에 이 만화를 페미니즘 작품으로 읽어왔다면, 모든 가능성은 사실상 이미 차단돼 있다는 나의 독해는(곧, 〈여자 제갈량〉이 젠더 평등 사회에 대한 우화가 아니라는 독해는) 다음과 세 가지 입장 중 하나를 택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 〈여자 제갈량〉이 페미니즘 작품이 아니라는 것. 둘, 페미니즘은 젠더 평등 사회로 향하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사회운동이나 이론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셋, 나의 독해가 틀렸음을 주장하기 위해 〈여자 제갈량〉을 젠더 평등 사회에 대한 우화로 다시 읽는 것. 첫 번째 경로로 걸어가는 이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택하는 대신 〈여자 제갈량〉을 포기해야 한다. 두 번째 경로를 택한 이들은 그와 반대로 변화에 대한 확신을 체념한다. 마지막 길에 선다면 〈여자 제갈량〉은 특정한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독해를 부인해야 한다. 포기, 체념, 부인은 때때로 자신이 저버리려던 대상을 완전히 버리진 못하기에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을 낳는다. 우리는 그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감정에 우울이라는 이름을 달아주곤 한다.이 우울은 단연코 이 작품이 남성을 여성으로 패러디하기에(패러디의 대상의 문제),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이 작품이 패러디이기에(패러디라는 형식 자체의 문제) 나타나는 것이다.


〈여자 제갈량〉이라는 패러디는 우울한 현실을 패러디하기 때문에 우울하다. 남성중심적이고 정상규범적인 사회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고 우울해지는 이들이 존재하고, 이 우울한 현실을 살짝 비틀어봤자 패러디 속에서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우울한 현실은 패러디해도 바뀌지 않는 걸까? 패러디를 통해 새로운 판타지를 창조해 낼 수는 없을까? 예컨대 조조, 유비, 손권이 모두 여성이고 관료들도 여성인 사회를 그려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패러디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표지해야만 한다. 패러디는 패러디하는 대상을 가리킬 수 있을 때만 패러디로서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여자 제갈량〉은 제목만 보더라도 ‘여자’라는 패러디적 접두사는 제갈량이라는 원본에 부착된 형태로 표시된다. 《연의》의 원본적 서사 혹은 역사라는 원형에 대해 〈여자 제갈량〉의 서사는 항상 그것들을 참조하고 반복한 후에야만 그 요소들을 재배치할 수 있다. 적을 조롱하기 위해서는 적의 논리를 반복해야 한다. 이 반복은 적의 강화를 낳고, 패러디가 실패하게 된다면 나와 적은 동화되고 만다. 이러한 위치 전환의 실패는 패러디 자체가 특정한 현실에 항상 이미 뿌리 박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패러디의 우울은 불가피하게 감내해야 하는 정조이다.


근래에 가장 적극적으로 패러디를 재배치 전략으로 이용한 메갈리아의 ‘미러링’을 생각해보면 패러디의 속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러링의 목적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주체와 대상을 뒤바꿔 폭력을 거꾸로 되돌려줌으로써, 그 모욕과 울분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폭력을 휘둘렀던 이들이 스스로 약자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메갈리아는 일베의 표현을 광범위하게 차용했다. 그 결과 되돌아온 것은 약자를 조롱했던 이들의 참회가 아니라 그들 역시 다를 바 없다는 비난, 예컨대 ‘여자 일베’라는 비난을 받았고 메갈리아는 그들이 요구했던 참회를 거꾸로 요구받게 되었다.



웃자란 서사가 향하는 곳

의미 있는 패러디는 늘 현실을 직시하고 지시해야만 하기에 패러디의 우울은 패러디의 시원적인 딜레마이다. 이 우울한 딜레마야말로 〈여자 제갈량〉의 모든 관계의 구석구석에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며, 모종의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 제갈량〉은 옴니버스가 아니다. 순욱-곽가-사마의-제갈량의 서사는 하나의 정조를 공유하고 있고 이것이 각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며 느슨하지만 일관된 형태를 그려낸다. 따라서 곽가의 죽음은 다른 여성-책사들이 처하게 될 상황 모두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주체성을 갖게 될 가능성이 점차 궁핍해지고 상황이 곤궁해지며, 그 끝에 남아 있는 건 빠르든 늦든 결국 죽음뿐이라면 어쩌겠는가? 굳이 권력자의 부름에 응할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사마의와 제갈량이 각각 조조와 유비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유비는 제갈량처럼 “재능있는 자가 야망을 가지지 않을 리 없”다고 외친다. 그의 말은 틀림없이 사실이다. 제갈량의 야망, 혹은 〈여자 제갈량〉이 페미니즘 작품으로 불리면서 받게 된 기대는 무척 거대한 것이다. 그리고 유비의 말처럼 “실패할 걸 알더라도, 뭐든지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웃자란 이야기를 보고 있다. 평등한 사회에 대한 새로운 환상을 발명하려는 제갈량과 〈여자 제갈량〉의 실패는 곽가의 죽음이 보여주듯 이미 노정돼 있다. 그렇지만 실패할 걸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연재를 멈출 수는 없기에 이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결국 예정된 결말에 봉착할 것이다. 남성으로 보이기를 택하거나(passing, 순욱), 남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거나(lesbianism, 곽가), 여성 상위 사회를 꿈꾸거나(separatism, 사마의), 아니면 차라리 재현되기를 포기하거나, 혹은 포기하지 못하고 실패할 걸 알면서도 행하거나(parodic performance, 제갈량).


그렇다면 비록 〈여자 제갈량〉이 휴재기에 돌입했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형태로 이미 그 끝을 보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우리는 이 공백기를, 그 힘이 미처 제대로 자라지 못한 채 길들어 버린 이야기의 슬픈 조로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1. 작화, 연출, 스토리 구성 방식 등에 대한 언급으로는 다음을 참조할 것. 리타·선우훈·최봉수, 《주간웹툰》, 1화 〈여자 제갈량〉. Available on http://www.podbbang.com/ch/9084. [본문으로]
  2. “2015 ACOMICS AWARDS : 국내만화 BEST 5.” 에이코믹스. Web. http://acomics.co.kr/archives/33095. [본문으로]
  3. 지모 혹은 이성은 그 자체로 남성의 특성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따라서 여성-책사들의 지모가 남성과 견주어서 평가되는 까닭은 단순히 남성 관료가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지적 능력 자체가 남성의 전유물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책사들의 성과마저 여성의 성과가 아니라 예외적으로 뛰어난 어떤 여성의 성과로 여겨진다. [본문으로]
  4. 이 표현은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직접 언급했다. 김나현, “제갈량을 여자로 바꿨더니 세상이 달리 보이네요.” magazine M. Nov. 22, 2015. Web. http://joinsmediacanada.com/joins/xe/woman/21007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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