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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지 오버 타임(Damage Over Time): 시간을 넘어선 상처

herimo 2015. 5. 14. 22:39

Damage Over Time [DOT]

시간을 넘어선 상처

남성 "동성사회적 욕망"의 연속체의 구조 속에서 수반되는 변화는 보다 가시화된 다른 변화들에 단단히 매여 있거나, 때때로 인과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 또한 그러한 패턴의 그 어떤 요소도 여성과 전반적 젠더 체계와의 관계 외부에서 이해될 수 없다  — Eve Kosofsky Sedgwick[각주:1]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데미지 오버 타임 보러 가기 (새창).



변명


여러 가지 사정상 예상보다 두 번째 글의 업로드가 늦어졌다. 애초에 개인적으로 조직됐던 이 프로젝트는 '웹툰'을 이야기하는 언어 자체의 두께가 무척 얇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웹툰은 같은 오락·유희의 목적을 가진 다른 매체, 특히 영화를 포함한 영상 매체와 비교했을 때, 비평이라는 양식에 포섭됨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비평과 친숙하지 않은 매체이다. 웹툰의 대중성을 고려한다면 웹툰 비평 언어의 부박성은 특별한 이유를 가정해볼 만한 일이다. 몇 가지 이유를 가정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웹툰은 여전히 대부분 무료로 제공된다. 이 '무료'는 수용자와 웹툰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즉, 웹툰의 소비는 무료라는 가격에 걸맞은 '가벼운 소비'의 영역에 놓인다. 더욱이 오락 매체 전반, 나아가 하위문화 전반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부정적 시선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요소를 더 열거하기보단 조금은 삐딱한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어째서 웹툰에도 비평의 언어가 필요한가? 예컨대 웹툰/만화는 서사 장르로서 문학과 동떨어진 비평 양식을 요구하는가? 웹툰/만화에 그림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소설과 같은 서사 장르에 적용됐던 방법론에 뚜렷한 한계를 부여하는가? 혹은 컷의 연속성에서 하나하나의 장면이 초점화된다는 사실로부터 웹툰/만화에서 영화의 몇 가지 기법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는 장면 연출에 대한 영화 비평의 언어를 웹툰/만화 비평에 적용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가? 마지막으로 웹툰과 만화 사이에 쳐진 빗금(/)은 필요한가?


이 두 번째 웹툰 비평문이 이러한 고민 모두에 답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은 아니다. 이 글은 분명히 어느 정도 독립적인 목적 — 비평의 언어 사이에 놓인 알 수 없는 경계를 가로지르려는 시도의 일환으로서 쓰였으며 오롯이 한 편의 웹툰을 평하기 위해 언어를 배치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은, 위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예비적 구획을 위한 글이기도 하다. 이러한 목적들을 뒤로하고 비평의 대상을 먼저 훑어보자. 같은 작가에 의해 그려지고 쓰인 두 편의 텍스트이다.



들어가며: 〈데미지 오버 타임〉, 만화의 형식


〈데미지 오버 타임〉은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연재 중인 웹툰으로, 원래는 "시간이 지날수록 입게 되는 데미지"를 의미하는 게임 용어라고 한다. 이 이름은 적어도 세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자구적 의미, 곧 "시간이 지날수록 입게 되는 데미지"는 서사의 궤적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이 용어가 원래는 게임 용어라는 사실은 이 웹툰의 수용 방향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제목 — 데미지(Damage), 오버(Over), 타임(Time) 각 단어의 앞글자를 딴 도트(DOT)는 이 웹툰의 제작 방식을 함축한다.


마지막 요소부터 시작해보자. 이 웹툰은 도트로 그려진 유일한 메인스트림 웹툰이다. 웹툰이라는 양식이 그 전신으로 여겨지는 만화와 다른 점은 무엇보다 "웹"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웹툰은 종이로부터 자유로워짐과 동시에 웹에 종속되면서 무한히 "긴" 표현 공간을 얻게 되었다. 세로로 늘어지는 표현공간이 웹툰의 필연적 운명 같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웹툰은 가로로 무한정 긴 표현공간을 가질 수도 있었다. 다만 웹툰이 등장했던 시기의 한국 웹페이지에서, 정보는 세로로 제시되어 스크롤을 내려가면서 확인하는 것이었던 뿐이다. 요컨대 웹과 만화라는 두 가지 정보 표현 양식이 상호 재매개된 결과가 현재 웹툰의 세로 스크롤인 셈이다. 이는 분명 작지 않은 변화다. 그렇지만 종전의 종이만화와 웹툰을 반드시 분리해야만 할 뚜렷한 이유를 제시해주진 않는다. 예를 들어, 종이만화와 웹툰의 간극은 애니메이션과 비교했을 때 굳이 구분해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넓지는 않다. 웹툰에 등장하는 수많은 요소가 이를 증명한다. 웹툰은 분명히 컷을 활용한다. 심지어 컷의 틀이 그려지지 않는 경우에도 작가는 컷의 배분을 고려해 한 장면이 들어갈 공간의 높이를 정한다. 중요한 장면은 보통 4:3 (아이패드의 화면비), 혹은 16:10(대부분 컴퓨터 및 스마트폰의 화면비) 화면이 꽉 차도록 그려진다. 이는 웹툰이 만화에서 사용되던 컷의 기법들을 충분히 차용하고 있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웹툰의 '한 컷이 꽉 채우는 전체 화면'의 비율 자체도 책의 비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작화에 있어서도 종전의 종이 만화와 비교해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일반적으로 채색된 장면이 제공된다는 것 정도이다. 인물을 그리는 법이나 배경의 묘사 등은 종이 만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만화와 웹툰 사이의 이 모든 유사성은 기술적 한계 때문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제작자와 수용자 모두 이전의 매체와 완전히 다른 매체를 생산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웹툰이 물려받은 또 하나의 유산이 있지 않은가? 바로 '웹'이라는 유산이. 웹에는 '세로스크롤' 아니면 'BGM' 정도의 특징밖에 없었을까? 웹의 표현 양식에만 집중하기보다 웹이 누구에게 어떤 매체를 통하여 제시되는지를 고려해보자. 웹상의 정보는 인터넷 이용자에게 '모니터를 통해' 비춰진다.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유산은 이 글에선 잠시 제쳐두고 '모니터'에 집중해보자. 웹툰 외에 우리가 모니터를 통해 접했던, 그리고 지금 접하고 있는 가장 흔한 이미지의 연속체가 무엇일까? 답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게임이다. 〈데미지 오버 타임〉은 이 유산을 웹툰의 무대에 올려놓는다, 도트(DOT)라는 표현 양식을 통해서. 독자 중 일부는 이 도트 이미지를 통해서 과거의 도트 게임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미지 오버 타임〉과 게임 사이에는 분명히 좁힐 수 없는 넓은 틈새가 놓여져있다. 게임은 유저의 선택(플레이)에 따라서 결과가 조절된다. 반면, 〈데미지 오버 타임〉은 만화이기 때문에 서사와 그에 맞춰 제시될 이미지는 모두 작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데미지 오버 타임〉의 연출의 효과를 '게임에 대한 실패한 모방'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되는데, 그 연출 효과가 도트 게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웹툰은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도트 게임의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빌려오게 된다. 독자는 이 웹툰에서 배경 및 등장인물의 생김새를 흐릿한 형체로서만 인식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낯설다. 기존의 웹툰은 대부분 인물과 배경을 종이 만화의 관례에 걸맞게 매끄러운 선으로서 인물을 묘사한다. 결론적으로 〈데미지 오버 타임〉에서는 '매끄럽지 못한 인간'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낯섦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동일시-몰입의 긴장 관계, 혹은 그 두 축 사이의 진자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어떠한 비틀거림이 상존한다. 이 긴장 관계는 서사의 층위와도 공명한다. 낯섦과 익숙함 사이의 진동 추는 시간이 지남(over time)에 따라 어떤 양상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낯선 좀비와 낯선 군대 vs. 익숙한 좀비와 익숙한 군대


〈데미지 오버 타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좀비가 출현한 한국의 작은 예비군 연대를 배경으로 한다. 좀비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람도 좀비가 되기 때문에 원론적으로 좀비는 모든 사람이 좀비가 될 때까지 증식할 수 있는 상황이다. 전쟁에 준하는 상황이 발령되고 웹툰의 무대가 되는 예비군 연대에서도 대부분 인력이 차출되어 출동하지만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이제 연대라기엔 적은 약 200명의 병사와 한 명의 하사관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좀비로 가득한 세계에서 생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좀비라는 낯선 외부의 존재가 익숙했던 것들, 예컨대 국가, 사회, 군대 등을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돌아가게 한다. 혹은, 적어도 이 생존자 부대가 군대, 국가, 사회와 맺게 되는 관계는 이전에 없던 낯선 방식으로 재편된다. 이 연대가 상급 부대와 동떨어져서 존재하게 된다는 면에서 이 부대는 정규군이라고 선뜻 말하기 어렵게 된다. 따라서 이 부대의 부대원들은 잔당(partisan)이다. 또한 국가가 좀비에 의해 완전히 전복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부대 인근 지역에서 국가의 주권은 거둬들여 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부대원들은 국가 없는 망명자(refugee)들이다. 마지막으로 이 부대원들은 소위 '사회', 곧, 부대 외의 일상적 공동체들로부터 단절되게 된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도 연락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은 역사상 아무도 들어서 본 적 없는, 일종의 '자연 상태(state of nature)'에 들어서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부대는 와해되지 않고 유지된다. 과연 무엇이 이들에게 테두리를 둘러쳐 주는가?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답은 좀비다. 좀비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은 탈출에 실패한 '탈영병들'의 흔적을 통해 움직일 수 없는 장벽을 둘러친다. 그렇지만 좀비는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부대의 철책 안에서 실탄을 가진 병사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죽이지 않도록 제한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가장 궁금한 건, 오늘의 메뉴"(2화)가 되도록 만드는가? 답은 극히 초반에 이미 제시된다.



"간부가 한 명도 없었다면 우리가 이 생활을 유지했을까? 기댈 수 있는 권위가 이렇게 안락한 줄 몰랐다." (2화)


한 명의 간부로 대표되는 그 미세한 권위의 차이가 부대를 와해시키지 않고 유지해준다. 그리고 그 권위는 분명히 좀비 발생 이전 기존의 체제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간부와 병사 사이의 권위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 혹은 간부와 병사라는 명칭마저도 좀비 발생 이전의 상황에서 연유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전혀 새로운 권위로 재편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권위에 의존한 채로 세부적인 사항을 바꿀 뿐이다. 기존의 간부-병사 사이의 관계, 병사들 사이의 상하관계, 1대대, 2대대, 3대대의 역할, 병사의 보직 등은 모두 기존의 권위를 조금 다르게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새롭게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 요소 역시 군대에 없던 요소였을 뿐 기존 사회에서 흔히 존재했던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 예컨대 "계층별로 복장을 다르게 입도록"하는 것은 신분을 표시하는 오래된 풍습으로 예전부터 "매우 탁월한 통치수단이었다"(3화). 이렇게 이들은 기존의 체제를 모방하여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안정성과 익숙함을 획득하게 된다. 그 결과 서사는 좀비물이라는 장르에서 익히 보여주곤 하는 방식으로 초점을 맞춰 전개된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좀비와 인간의 관계가 아니다. 〈데미지 오버 타임〉은 익숙한 방식을 모방하여 재조직화된 인간 공동체가 어떻게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지 조명한다.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더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3화).



이승재의 나레이션으로 제시되는 이 우화는 일견 연대장 신찬수 하사의 권위에 복속된 채로 살아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비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노예들의 행동거지를 다시금 살펴보자. 그들은 서로의 쇠사슬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이 행동이 어리석어 보이는 이유는 그 쇠사슬이 그들의 자유를 속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 과연 누가 속박당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두 번째, 쇠사슬의 정체는 무엇인가? 세 번째, 저 우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응당 있어야 할 '쇠사슬을 채우는' 주인은 누구인가? 만약 신찬수가 '주인'이라면 그는 그가 행사한 권위를 철회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이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자명하다. 예컨대 그에게는 수색대를 구성하여 좀비를 사냥하면서 나타난 부대 내의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결국 이 이야기는 주인 없는 노예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모두 권위를 재현하는 한편, 권위를 재현하는 바로 그 방식을 통해 권위에 복속돼 있다. 신찬수도, 대대장들도, 수색대원들도, 대대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있거나 어딘가에 투여된 권위를 회수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모두 다 그 사실을 잊어버린 채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바로 그 권위를 자랑하기 시작한다. 복장, 담배나 술 등의 기호품, 수색대로서의 명예, 각 대대에 속해있는 이들로서 느끼고 서로에게 보여주는 소속감마저도 이들을 속박하고 있는 쇠사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쇠사슬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주고 있는 하나의 원리는 무엇일까?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일단 군율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군율에 어긋나는 탈영병들을, 군대를 상징하는 제식으로 배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데서 기각된다. 따라서 군율보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 놓인 하나의 원리가 있거나 그런 원리 같은 것은 아예 없다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이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 침범당하지 않는 권위는 물론 존재한다. 수색대가 부대에 좀비를 풀어놓을 때도, 수색대가 신찬수의 농간에 몰살당할 때도, 승하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환각을 만들어 낼 때도, 환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연히 주운 실탄으로 자살할 때도, 1대대장 박진철이 최소한의 피를 흘리기 위해 배신당하는 자기 자신을 기민하게 연출할 때마저도 결코 침범당하지 않는 그 권위는, 바로 남성성이라는 사회적 규범이다.



남성 동성사회 Homosocial Desire


삐딱한 질문을 하나만 더 해보자. 이 부대원들은 어떻게 성욕을 해소하고 있을까? 다소 짓궂은 일이지만 이쯤에서 이 비평문의 대상이 되는 또 다른 텍스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평론가이기도 한 〈데미니 오버 타임〉의 작가 선우훈은 윤태호의 〈아버지 연작〉을 비평하며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실제로 아버지 연작에서 누군가의 어머니인 캐릭터는 제대로 호명조차 되지 않으며, 여성 캐릭터의 부모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부자 관계에 서사를 집중하기 위해 어머니와 딸의 존재를 소거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서사적 필연성이 성차별적 시선과 만난다면, 무신경한 편견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각주:2]


 얄궂게도 이 비판의 반 정도는 작가 자신의 작품인 〈데미지 오버 타임〉에도 적용 가능하다. 〈데미지 오버 타임〉에 등장하는 모든 주요 인물은 남성이며 이들의 어머니나 여동생, 여자 친구는 제대로 호명조차 되지 않는다. 작가를 대신해 그를 변호하자면 이는 "서사적 필연성"에 의해 정당화될 수도 있겠다. 좀비에 의해 고립된 작은 연대 내의 역학 관계를 밀접하게 조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성의 존재를 소거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정확히 남성성이 구성되는 방식을 연상시킨다. 남성성이란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되돌아올 만한 대답은 '여성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 대답은 결코 동어반복이 아니다. 남성의 반대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평문에서 젠더의 계보학을 들춰낼 뜻은 없으나 피상적인 논리만 따져보아도 남성의 반대는 비-남성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성이 여성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명제가 남성의 반대항으로 여성을 가정하고, 동시에 남성의 반대항은 논리적으로는 비-남성이라는 사실을 결합할 때 도출되는 결론은 이렇다. 여성성은 남성적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남성성과 여성성이 이분법적으로 구획될 때도, 남/여성적인 것으로만 여겨져야만 하는 내용물은 의문에 붙여진다.



그러나 〈데미지 오버 타임〉의 무대가 되는 부대의 부대원들은 좀비 도래 이전의 세계에서 그 내용물을 물려받았으며, 나는 그것이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유산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들은 남성으로서 특히 죽음의 공포에서도 허세를 떨고, 기어를 잘못 넣은 자신의 사소한 실수를 계획의 실패로 포장해야 하며, 생존자 여성을 강간하려 든다. 예컨대 수색대원 중 하나인 홍인종은 좀비를 죽이는 것을 즐기게 되는 것은 그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라거나 좀비라는 미증유의 공포에 인격이 개조당해서가 아니다. 수색을 거듭할 수록 깊어지는 그들의 잔인함은 오히려 좀비라는 미증유의 불안이 그들로 하여금 더더욱 확실한 남성성을 부추긴 결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은 더욱 잔인하게 좀비를 죽여야 하며, 좀비의 공격에 당해 죽은 동료를 멍청하다고 욕해야 한다. 




즉, 이들이 좀비를 죽이면서 죽음에 무감각해진다고만 하기에는 이들의 잔학성에는 뚜렷한 방향이 있다. 그리고 그 경로를 매끄럽게 다져나가는 도구는 문화적으로 남성성으로 가정되는 어떤 행동 패턴의 모음집인 셈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생존 일기가 폭력과 살인, 동료 간의 반목과 불신으로 얼룩져야 할 어떠한 필연적인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대원 모두는 남성이라는 공적 환상에 참여하여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그 환상을 진실로 거듭나게 한다. 이 단계에서 도트로 그려진 인물은 어느새 매끄러워진다. 독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분리해서 인식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 자신의 울퉁불퉁한 현실을 흠 없는 장막으로 가림으로써 개인성을 획득한다. 



이들이 남성이라는 내용 없는 허구적 틀에 미리 기입돼 있던 내용을 극단화시켜 진실로 자리매김시키는 과정에서 부정되어야만 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미 말했듯이 여성성이다. 수색대가 최초로 좀비무리를 뚫고 바깥 세계에 발을 들이기 바로 전날 밤, 수색대원 목포는 공포에 떠는 후임에게 "남자새끼가 쪽팔리구로 다 나가서 조지고 오면 된다"라고 말한다. 남성은 공포에 떨어서는 안 되며, 그렇게 구성된 남성의 환상에 포함될 수 없는 이들은 비-남성과 동일시되는 여성의 영역으로 밀려나간다. 곧,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여성의 타자화를 통해서 공고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타자화된 여성은 인간의 영역에서도 추방당한다. 징후적으로, 수색대원들이 실제로 피와 살이 존재하는 여성을 만났을 때 했던 공통된 행위는 모두 같았는데, 인간으로 여성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성을 말소한 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성을 강간하던 중에 좀비에게 습격당해 죽은 동료에겐 그가 힘없는 약자를 강간하려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서만 몰래 '재미를 보려던' 행태를 욕한다.



다른 하나는 동성애성이다. 이들은 부대에 여성이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도 동성애 관계를 맺지 않는다. 혹은 관계를 맺더라도 그것이 서사의 전개 과정에서 초점화되는 일이 없도록 몰래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부대원의 동성애성은 무대 위에 올라오지 못하고 버려지는 찌꺼기 같은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다소 작위적으로 여성성과 동성애성의 억압을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처음에 논했던 것처럼 이들이 처해 있는 환경이 자연상태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더욱이 특별한 내용이 이미 채색돼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분명히 좀비가 발생했던 바로 그 날에도 샤워실에서는 '비누를 주워 달라'는 농담을 주고 받았던 그 장면에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그 사고방식을 따라 극단적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 그리고 부정을 거듭하며 세워온 정체성의 위기는 부정할 대상이 더 이상 없어졌을 때 찾아온다. 그들은 이제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강제로 밀려나게 된다. 물론 자기 자신에 의해서 말이다.



우리 안의 좀비



부대원들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 시작했음을 가장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은 좀비로부터의 안전을 빌미로 겨우겨우 유지되던 공동체가 최초로 자의적으로 좀비의 침입을 허용할 때다. 연대장 신찬수와 수색대장의 밀약은 분명히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침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적은 이제 좀비가 아니라 부대원들이 된다. 수색대장과 대원들은 이를 빌미로 신찬수에게 우위를 점하기 위해 무고한 부대원을 좀비로 만들어 부대에 풀어놓고 부대원의 10퍼센트에 달하는 인구를 죽여버린다. 신찬수 역시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적지 않은 수의 수색대원들을 죽이기 위해 크레모아를 조작한다. 윤승하의 죽음으로 오해가 서려 있긴 해도 진실에 근접한 1대대장은 신찬수 하나만을 죽이기 위해 모략을 짠다. 이들이 하는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나 밖에 없어. … 다 같이 살아나가려면 내가 잘해야 한다." 무척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다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이미 일부를 죽이기 시작했다면, 그 '다 같이'에 들어가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것은 연대장이나 대대장, 수색대원이나 헌병대원 등 소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쿠데타를 꾀한 1·2대대원이나, 신찬수와 1대대장의 충돌이 있을 것으로 알면서도 이들이 흘릴 죽음을 무시한 3대대원 모두 자기 자신의 일부를 부정하는 단계에 들어서 있다. 부대원 개개인 모두가 "다 같이"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기 시작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무엇보다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효과는 부대 자체가 부정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부대는 분명히 일종의 정치적 결사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그 목적은 모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두의 안전'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에 손상이 가기 시작했을 때, 이 부대는 사실상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이 원칙적으로 '와해된' 부대는 부대의 틀을 유지한 채 움직인다. 바로 모순적인 '다 같이 살아남기'라는 강박 행동이 더욱 모순적인 상황을 낳는다. 이미 있어야 할 이유를 부정당했지만 강박적으로 생을 향해 발버둥 치는 이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아무래도 '좀비'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우리 안에 좀비를 풀어놓았듯이, 부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저마다의 좀비를 키우고 있다.



나가며: 시간을 넘어선 상처 (1)


웹툰 〈데미지 오버 타임〉에 대한 비평을 닫기 위해 작가가 평론가로서 쓴 비평문 〈아버지를 향한 파도: 만화가 윤태호가 한국의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기까지〉 중 일부를 인용하는 것은 이번 문맥에선 짓궂다기보단 절묘한 일이 될 듯싶다.



"시대라고 하기엔 좀 얇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아버지 또는 아들, 어머니이거나 딸인 채로 버티는 일이다. 그 동안 잇속을 챙기려던 촌뜨기들이 어떻게 서로를 배신하고 어그러질지를 구경하는 것은, 우리에게 답이 아닌 질문이 되어준다."



작가에게 웹툰/만화, 혹은 서사는 답이 아닌 질문을 제시하는 길이다. 〈데미지 오버 타임〉은 분명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우리'가 사실은 흩어져있는 관계를 이르는 말에 불과하다면 거기에서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만약 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 하더라도 그때 남은 상처는 우리를 좀먹는 썩은 환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넘어선 상처(Damage over time)로서 우리의 공통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평론가 선우훈의 말대로 우리가 일어서서 움직여야만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그렇다면 웹툰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 이 비평문은, 공평을 기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평론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질문을 남기고자 한다. 평론가의 소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그의 실천적 지혜(phronesis)와 실천(practice) 사이의 연속성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가? 다시 말해, 평론가의 텍스트적 실천은 실천의 어떤 층위에 머물고 있는가?



추신 Postscript


이 글이 쓰이고 한 달 반 정도 뒤, 〈데미지 오버 타임〉은 6월 26일 총 52화로 완결되었다. 원래 이 글이 고려할 수 없었던 45회부터 마지막회를 보면서 나는 이 감상문에서 고쳐 적어야 할 어떤 요소도 찾지 못했다. 따라서 기존의 감상문은 그대로 두고, 짧지 않은 추신을 남기는 것으로 완결을 축하하고자 한다.


1. 민주주의의 역설


원래의 비평문 끄트머리에 붙어 있었던 "좀비를 키우고 있다"는 비유적인 표현은 40회 중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 되어 이 작은 부대를 덮친다. 목포와 부산이 끌고 온 좀비들이 부대 안에 넘쳐나고 부대원들은 좀비를 소탕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약 50명을 제외한 모든 부대원이 사망하게 된다. 신찬수가 죽고 자연스럽게 리더가 된 1대대장 박진철 병장은 회의를 통해 이 부대는 더 이상 군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형-동생 사이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한다. 권력을 다시 되돌려줌으로써 부대를 통치하는 체제는 그들이 원래 사회에 있을 때 가졌던 '민주주의'라는 방식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작가 선우훈은 이 이야기가 민주주의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 있다는 얘기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의 귀환, 혹은 모방은 분명히 커다란 차이를 수반한다. 무엇보다도 50명에 의해서 이뤄지는 직접 민주주의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이 이야기는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과정을 순행적으로 보여주는 우화로는 볼 수 없다. 정확히 그 반대로, 이 웹툰은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역행적으로 되돌려 보여주는 우화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이야기를 독재자가 되어 미쳐가던 신찬수를 죽이고 민주적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으로 읽어내는 것을 거부하고 싶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민주주의 혹은 평등에 대한 환상을 강박적으로 추구한 결과 민주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 이 부대에 50명 정도의 사람만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려낸다.




더욱이 체제가 바뀌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 또한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밥 비슷한 것을 먹고, 옷 비슷한 것을 입고, 집 비슷한 곳에서 살며, 삶 비슷한 것을 산다" (52화). 따라서 이 이야기가 드러내는 또 하나의 층위는 민주주의 혹은 평등의 추구가 제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란 기대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웹툰의 무대가 되는 작은 부대에 남은 저 50명 남짓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죽어갈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저들의 힘으로는 이 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여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전에 행하던 것과 비슷한 것을 강박적으로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비슷하게, 그러나 같지 않다는,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박탈감에 시달리며 삶을 살아내게 될 것이다.


2. 시간을 넘어선 상처 (2)


이 공동체에 남은 상처, 그러니까 좀비에 의해 동료가 먹히고, 좀비에게 물어뜯긴 동료가 좀비가 되어 자신을 먹으러 달려오는 모습이 기억에 새겨짐으로써 촉발된 트라우마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앞선 감상에서는 이러한 상처가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기반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적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새로운(그러나 여전히 과거에서 빌려 온) 민주주의적 형-동생 체제, 혹은 공산주의적 원시 공동체 생활이라는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들은 이 상처 위에서도 여성성을 반복하지 못한다(혹은 적어도 묘사되지 않는다). 부대에 남은 50명의 인원이 꾸려나가는 사회는 형-동생의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전원 남성으로 구성된 사회이다. 그곳에는 여자친구도, 누나도, 언니도, 엄마도 없다.


부대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좀비를 사냥하며 살아가게 된 이승재 역시 같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알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나레이터였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여전히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때 신찬수가 부대원들을 배신한 건지, 수색대는 의도적으로 살해당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그의 상처는 그로 하여금 영원히 저 알 수 없는 문제들을 더듬어 그 사실을 추측하면서 살게 할 것이다. 부대원들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이들의 상처가 시간이 지나 흉으로 남은 뒤에도 그들은 그 상처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같은 상처를 경험했던 이들과의 공동체적 삶을 모색하기보다는 자신이 입었던 상처와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끝내 사건의 진실에 대한 갈망과 자신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넘어선 상처가 이들에게 끼친 피해의 결과는, 이들이 영원히 과거에 뿌리박혔기에 곤궁한 삶을 끊임없이 과거와 비슷하게 반복하며 이어나가야 한다는 강박적 삶의 양식인 셈이다. 때문에 사실상 이 공동체의 마지막 생존자인 이승재는 계속해서 자신을 기억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것은 누구이며, 누가 그의 삶을 이해하고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가 갖는 공동체에 대한 감각은 좀비에 둘러싸인 작은 부대에 머물러 있고, 그는 그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좀비를 죽이는 작은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서로의 과거와 이름을 묻지 않는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지 않고 살아가기를 택한다. 그들 모두의 공동체는 현재가 아닌 과거에 박제된 채로 남는다. 그리고 기억과 이해를 구하는 그들의 몸짓은 아무런 결과를 남기지 못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좀비들에게 먹혀 조금씩, 그러나 착실하게 사라져만 간다.


3. 도트와 글


이 작품의 형식인 도트는 마지막까지도 여전히 서사와 상호작용하며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도트라는 부자연스러운 형상을 통해 인물 개개인보다는 부대 전체를 조망하게 하는 효과를 불러왔었다. 이윽고 도트는 '도트임에도 불구하고' 도트로 그려진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서사가 주조해내는 인물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끝으로 그림이 아닌 글씨가 이 웹툰의 대미를 장식한다. 고전적인 서체(굴림체나 돋움체)로 쓰인 '기억해달라'는 메시지는 여전히 도트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이며, 이 웹툰이 이승재라는 인물의 시선에서 그려진 이야기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곧, 마지막까지 독자는 서술자인 이승재를 통해 이 이야기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받는다. 기억되기를 갈구하며 남겨진 메시지는 어떠한 그림보다도 확실히 그 거리를 벌린다. 글로 쓰여진 메시지에 담긴 뜻이 너무나 분명해 보이며 우리가 거기에 개입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메시지는 우리가 언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일깨워준다.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승재의 말 걸기를 통해서 이 이야기의 진행을 지켜볼 수 있었으며, 서사를 따라가며 의도된 바대로 희로애락을 느낀다. 곧, 도트와 어우러진 글씨로 쓰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도트로 그려진 그림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독자를 유도해왔다. 모든 서사가 마무리되고 최후의 한 컷마저 사라진 후에서야 그림 못지 않게 글에 의해 이끌려 왔다는 사실을 더욱 직접적으로 느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언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이 작품을 읽어내는 단일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가? 언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언어를 밀어내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언어를 벗어날 수 없더라도, 단지 또 다른 언어를 통해 그것을 밀어내야 할 뿐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화자인 이승재가 제시하지 않았던 맥락들을 사실상 "억지로" 부각해 이 작품을 새롭게 읽어내는 이유이다. 어떠한 작품을 새롭게 읽어내는 것이 비평가의 소임이라면, 비평의 언어는 이미 흘러온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게끔 하는 데, 곧, 매끄러운 서사의 울퉁불퉁한 지점을 끄집어내어 과거를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이행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탐사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소 길었던 덧붙이는 말을 닫도록 하자. 마지막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평론가의 소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그의 실천적 지혜(phronesis)와 실천(practice) 사이의 연속성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가? 다시 말해, 평론가의 텍스트적 실천은 실천의 어떤 층위에 머물고 있는가?


당신은 답을 찾았는가?






  1. Sedgwick, Eve Kosofsky. "Preface." Between men: English Literature and Male Homosocial Desir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5. [본문으로]
  2. 선우훈. "아버지를 향한 파도: 만화가 윤태호가 한국의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기까지." 크리틱엠. Apr 29, 2015. http://criticm.com/?p=1724 (Accessed May 18, 201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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