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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 충동의 주체 — 주변화된 삶과 승화 사이

herimo 2015. 2. 14. 17:30

미지의 세계, 충동의 주체

주변화된 삶과 승화 사이


충동의 Drang, 즉 추동력의 특징은 항상성이 유지된다는 것이지요. 그 항상성에 걸맞은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는 각각의 경우마다 다양한 크기로 벌어져 있는 개구부開口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여러 가지 크기의 입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 자크 라캉,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259.



 

 

들어가며

 

우선 이 글이 쓰이게 된 경위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웹툰을 가지고 뭐라도 비평해보자는 공동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쓰여졌다. 우선 웹툰, 나아가 만화라는 장르는 소설, 영화나 회화에 비해 비평이라는 낱말과 친숙한 장르는 아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이는 한국에서 특히 그런데) 저급한 오락의 영역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적인 유희 매체로서 만화는 수용자들과 늘 가까워지고 있으며 수용자들의 삶에 보다 밀착된 양태로 정착돼 가는 것으로 보인다. 만화 잡지, 단행본을 거쳐 스마트폰을 통해 웹툰에 접근하게 된 2015년의 한국에서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주 익숙하게 오후 10시(KST)에 레진코믹스에서 공개되는 만화들을 둘러본 뒤 뒹굴거리거나 과제를 하다가 다시 오전 11시부터 공개되는 네이버 웹툰을 클릭/탭한다. 웹툰으로 하루를 마무리 혹은 시작하는 광경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웹툰은 현실과 유리돼 있는 유희의 세계로 여겨지는 것은 자못 신기한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웹툰/만화를 현실과 분리할 수 있는 (저급한/대중적/사적인) 유희 매체로 여겨지게끔 만드는 것일까. 그것의 이름이든 무엇이든 그러한 문화적, 사회적 기제에 이데올로기라는 표지를 붙이는 것은 억지로 보이진 않는다. 생산관계의 부조리를 은폐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도 웹툰과 이데올로기는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 웹툰의 생산 방식과 그에 따른 제작자(노동자)의 노동과 이를 판매하는 웹툰 중계사들 사이에선 분명히 '소외'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웹툰이라는 형태의 매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여전히 작가가 아니라 웹툰 페이지를 거느리고 있는 대형포털이기 때문이다. 웹툰 작가의 수입은 일정치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소수 성공한 작가들의 연봉만이 공개된다. 더욱이 그들은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연재가 종료된다면 수입을 보장받을 수도 없다.

 

이 리뷰를 포함해 앞으로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작성될 나의 모든 글은 웹툰이 현실과 유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쓰여질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따라 이 웹툰이 "좋다/지루하다"(제34화, The doll’s tea party)는 말에 몇 자를 덧붙여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비평의 대상을 위치시키고 대상 웹툰과 수용자 사이에 설정되는 거리가 어떻게 획정되었는지를 논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첫 번째 비평의 대상으로 선정된  작품은 이러한 문제 의식을 드러내기에 아주 적절한 '장르'인 '일상툰'에 속해 있다.

레진코믹스에서 매주 금요일에 연재되고 있는 『미지의 세계』는 겸디갹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작가 이자혜의 정식 웹툰 데뷔작이다. 작가는 이 웹툰이 “20대 여대생 조미지의 상큼하고 달콤한 캠퍼스라이프와 피끓는 청춘의 아름다움”(프롤로그)을 그리는 만화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이 웹툰은 첫화부터 범상치 않다. 주인공 미지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자기 주변 훈남들로 RPS(Real Person Slash)를 하거나 지난 주에 끓인 청국장으로 우걱우걱 밥을 떠넘길 뿐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 때문이다 (제1화, 미지의 세계). 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이야말로 『미지의 세계』의 기묘함을 아우르는 근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지의 세계는 “일상툰을 넘어선 일상툰”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



일상툰: 일상의 과장과 전시


웹툰이 포털 사이트의 트래픽 유발수단의 일종으로서 각광받은 이후로 수많은 웹툰이 생겨났고 출판 만화 시장에서 각광받지 못했던 “일상툰”이라는 장르가 크게 유행했고 이제는 웹툰의 대표적인 장르로 자리잡았다. 일상툰의 부상은 무엇보다도 ‘무료’로 제공하는 웹툰의 특성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출판만화는 소비자의 수요에 소구하기 위해 주인공, 혹은 그 주변의 평범한 일상을 그리는 만화라도 로맨스나 개성적인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느 정도 드라마를 가미하는 경우가 많았다(예컨대 황미나의 『이씨네 집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무료로 제공되는 웹툰의 특성상 한 작품이 결코 끝나지 않아도, 크게 부각되는 드라마가 없어도 편안한 이야기로 최대한 넓은 계층에 옅은 농도로 어필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클릭수를 늘릴 수만 있다면 이 작품은 웹툰으로서는 훌륭한 가치를 지니는 셈이다(물론 『크래용 신짱』, 이빈의 『안녕 자두야』, 아라카와 히로무의 『백성귀족』과 같은 출판만화는 작가의 소소한 어릴적 일상을 간결하고 귀여운 그림체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일상툰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의 만화가 출판만화 시장에서 주된 장르로 성립됐다고 볼 수는 없다). 일상툰을 좁게 본다면 작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치있게 재구성해 내놓는 작품으로 볼 수 있겠지만(『모두에게 완자가』는 이러한 좁은 의미의 일상툰의 전형이다),  넓게 본다면 가상의 주인공이 등장하더라도 두드러지는 드라마나 기승전결의 스토리 진행 없이 작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말 그대로 일상을 다루는 모든 웹툰을 일상툰이라고 할 수 있겠다(예컨대 『먹는 존재』나 이 리뷰에서 다루고 있는 『미지의 세계』 등이 이에 속한다). 문제는 아무리 일상툰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재미를 주지 않으면 독자의 클릭을 유도할 수 없기 때문에 작가의 독특한 시각, 혹은 일상의 과장이라고 할만한 기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주로 독특한 시각을 가진 작가에 의해 일상의 여러 요소들이 과장되거나 왜곡되었는데 성소수자의 시각을 독특한 시각으로 내세운 완자의 『모두에게 완자가』, 주인공 유양의 비꼼과 냉소적인 시각을 어필하는 『먹는 존재』가 그렇다. 무엇보다 이러한 케이스 중 가장 극적인 사례는 조석의 『마음의 소리』, 특히 2009년 이후의 연재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근 10년에 가깝게 일상툰을 그려나간 결과가 일상의 소재를 비일상적으로 다루는 개그툰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새로운 일상툰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일상과 비일상을 혼재한 개그툰은 『괴짜 가족』과 같은 여러 개그 만화와 형식적인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음의 소리』는 오히려 일상툰 발전형을 찾았다기 보다는 개그툰의 영역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소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일상툰에서 일상을 다루는 방법의 한계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상은 일상적이다. 일상은 만화적이지 않다. 일상을 만화적인 콘텐츠로 변용시키기 위해서는 작가의 끊임없는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이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순간 일상툰은 막을 내리거나, 새로운 장르로의 변신을 꾀해야 한다. 어떤 점으로 보나 일상툰이라는 장르 자체에 “독특한 시각”을 개입시키는 동시에 이전의 일상툰에는 없었던 새로운 자극을 주는 방법을 찾는 것은 요원해보인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는 전에 없던 방식의 일상툰을 그리는 동시에, “독특한 시각”을 통해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을 더 현실적으로 그려낼 뿐이다. “현실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첫 화에서의 미지의 독백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현실을 더욱 아무 일도 없는 현실로 그릴 뿐이다. 물론, 이 역시 왜곡의 한 양상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방향은 정반대인 셈이다. 조악한 비유이지만 일상툰을 줄세우자면 『미지의 세계』는 『마음의 소리』의 양끝에 두고 작품을 배열할 수 있을 법하다. 물론 웹툰이 어떤 장르에 속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작품의 좋고 나쁘고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와 같이 인위적으로 웹툰의 장르를 구획지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미지의 세계』가 한 장르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주지시켜준다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가 그려내는 세계는 일상툰의 최전선이다.



미지의 세계: 일상보다 더 일상적인



『미지의 세계』의 제목은 분명 중의적이다. 알 수 없는 세계와 주인공 미지가 경험하는 세계. 어설프게 함께 읽어내면 주인공 미지가 경험하는 알 수 없는 세계 정도가 되겠다. 우선 그녀의 세계를 거르고 걸러내 가장 적은 키워드만을 남긴다면 여성과 가난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남을 듯하다.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미지는 좋아하는 남성과의 연애를 바라기도 하고 (좋아하진 않더라도) 남성과의 만족스러운 섹스를 원하기도 한다. 동시에 가난한 미지는 ‘고급진’ 장신구와 옷, 구두, 집, 음식들을 꿈꾸며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환경에 절망한다. 미지의 이 충족되지 못한 욕망은 언뜻 보면 미지를 히스테리컬한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듯하다. 

떤 면에서 그녀는 현실에 대해 과민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부잣집 친구 민치미를 보고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려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제28화, 치이마의 옷). 가장 철저하게 망가뜨리고자 그녀를 윤간하도록 불량배들에게 사주하는 것은 어떨지, 아니면 자신이 그녀를 육노예로 부리는 것은 어떨지 생각하며 킬킬거린다. 하지만 미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아는 것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도덕 법칙이나 윤리 의식이 아니다. 그저 그것은 너무 원대한 계획이고 그녀는 너무나 권태롭고 무기력하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어떠한 만족을 가져다 줄 유희를 현실화시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자신의 만족을 포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역설적으로 복수에 성공한 뒤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는 수많은 ‘실패자’들의 얼굴과 겹쳐진다. 복수는 성공한다. 그러나 복수에 성공하여 얻고자 했던 만족감, 예컨대 후련함과 성취감과 같은 것들은 사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때 떠오르는 그런 표정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지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은 그녀가 아직 떨쳐내지 못한 만족에 대한 갈망을 표시한다. 만족을 성취할 수 없음에도/없기 때문에 미지는 이따금 만족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낀다. 미지를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는’ 철부지로 읽어내선 안된다. 그녀는 자신의 현실을 부인하거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망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한다는 것, 이따금씩 분는 부족에 대한 분노를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인공의 이름인 미지(未知)는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충동적인 욕구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미지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충동의 주체’를  훌륭하게 형상화하고 있지않은가. “충동의 주체는 … 타자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되돌려 받고서 자신의 행위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 즉 스스로를 그가 찾고 있던 그 악한 사물과 동일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주체이다” (『까다로운 주체』, 499). 이 구절은 마누미(제11~12화, 예술종자들 1, 2)를 대하는 미지의 태도를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지가 권터와  미지(충동의 주체)는 자신이 동경하던 음악가 권터와 가까워지며 자신에게서 멀어진 ‘예술종자’ 마누미(악한 사물)에 대해 씁쓸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귀찮았는데 잘 됐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이 알 수 없는 세계(타자)는 미지가 마누미에 똑같지 않냐고 되묻는 듯 두 남자가 자신을 두고 다툰다며 칭얼대는 마누미(악한 사물)의 전화를 돌려준다.  이를 대하는 미지의 반응 불같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리는 분노가 아니라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리는 “그만하라고 쌍년아”라는 한 마디다. 이 씁쓸해 보이기까지 한 미지의 표정과 반응이 자신이 바라던 대로 마누미(악한 대상)를 욕하고 밀어내고 무시할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결국 자신이 바라던 것은 ‘마누미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 예컨대 자신 역시 예쁜 부잣집 딸로 태어나 자신이 동경하던 두 남자가 자신을 두고 싸워주기를 내심 바랐던 것을 깨달았기에 나오게 되는  조소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정신분석 이론가 지젝이 베르나르디노 루이니의 〈세례 요한의 목을 얻은 살로메〉를 통해 충동의 주체를 이야기할 때 살로메의 표정을 “다소 우울하고 거북스러운 표정이며 그녀의 응시는 명시되지 않은 어떤 떨어진 지점에 고정되어 있다 — 자신이 청했던 것을 얻게 된 지금, 그녀는 마침내 획득된 그 대상을 ‘삼키지’ 않고  단지 에워싸고만 있으면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할 때, 이 묘사는 미지의 표정에 대한 묘사로도 손색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미지의 세계』가 묘사하는 일상은 객관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에서도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심리적 현실인 셈이다.








죽음 충동Todestrieb과 두 죽음 사이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충동은 어느 정도는 욕망이 충족된 상태를 이루려는 쾌락원칙을 위배하며 작동한다. 다시 말해 충동은 쾌락원칙을 넘어서 존재한다. 주체는, 욕망을 충족시켜 만족과 균형을 찾아 쾌락을 누리겠다는 그 원칙을 넘어 자기 자신의 욕망이 실패하고 위협당하는 상황으로부터 모종의 ‘즐거움’을 추출해낸다. 그렇지만 충족할 수 없음에도 느끼게 되는 그 즐거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라캉은 이 즐거움의 정체는 목적지를 향한 충동의 여정(Ziel; aim)은 가로막히더라도 충동의 목표(goal) 에 도달했다는 신호라고 해석한다(『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270-271). 충동의 진정한 목표 자체는 어떤 것을 성취해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로를 가로막고 있는 가림막의 주위를 끊임없이 맴도는 것, “순환적인 회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충동은 언제나 부분 충동이기도 한 것이다. 마치 아이의 구강 충동이 끊임없이 울어댐으로써 엄마의 사랑이라는 총체적인 목적의 성취를 꾀하는 것, 혹은 배고픔의 충족이 아니라 엄마의 일부에 불과한 젖을 “물려주는 순간” 실제로 젖을 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 같이 울음을 멈추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는 옴니버스일 수밖에 없다. 충족의 주위로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조각조각난 부분 충동을 아우르는 단일한 서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지가 일상이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남 원망하기, 남 미워하기, 가만히 있기, 중독성 스마트폰 게임 하루종일 깨기’(34회)인 것도 이러한 견지에서 바라봐야 한다. 미지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해가며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분 충동의 목표에 도달하며 반복적으로 즐거움을 얻는다. 예컨대 남을 미워하며, 가만히 있기를 선택하며, 하루종일 누워 스마트폰 게임을 깨는 행동이야말로 충동의 목표 그 자체인 것이며 그러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금지된 충족의 둘레를 맴돌고 그 맴돔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지가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충동(Trieb; Drive)”을 형상화한 주체로 읽힐 수 있다면, 프로이트가 말년에 모든 충동은 죽음 충동(Todestrieb; Death drive)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적어도 죽음 충동을 가장 근본적인 충동이라고 거듭 강조했다는 사실을 무시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죽음 충동이란 표현에서 ‘죽음’이란 목적지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두 죽음 사이”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 상징적 죽음이며, 죽었지만 죽지 않은 언데드(Undead)의 활동지를 가리키고 있다. 죽었지만 -- 이라는 표현에서는 죽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충동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충동의 부름에 답함으로써 "충족"하길 포기한 욕망의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신분석에서 욕망이  항상 타자의 욕망이라는 점, 타자가 상징계를 의미한다는 점을 미루어 보자면 상징계적 죽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곧 어떠한 법의 규율도 없는 곳으로 걸어들어가 무규정의 공간을 떠안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공간은 동시에 의존할 수 있는 어떠한 법도 없으므로 멸소와 소진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기도 하다. 분명히 마누미의 죽음은 이러한 상징적 죽음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녀의 죽음은 끊임없는 상징화의 공간을 연다.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소문, 미지가 처하게 되는 곤경과 하리보의 폭로, 그리고 미지와 하리보의 섹스에 이르기까지 마누미의 죽음은 끊임없이 의미화되기에 의미로 가득 차 있는 상징적 공간을 구축한다. 미지가 하리보와 사귈 수 없었던 이유가 죽은 마누미 때문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인데, 마누미는 실제로 죽었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미지가 충동적으로 마누미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듯이 그녀는 미지에게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상징으로서 존재하게 된다(제34화, The doll’s tea party). 오히려 가장 섬뜩한 죽음은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서 이러한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실제로 죽은 마누미도, 끊임없는 충동을 느끼는 미지도 아니다. 모든 충동이 죽음 충동이라면, 충동의 어머니는 죽음일 터이다. 이 말은 『미지의 세계』로 그대로 적용해도 무방하다. 미지를 낳는 것은 그녀의 엄마이다. 상징적 죽음의 영역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는 미지의 엄마이다.



주변화된 삶과 승화 사이Between the marginalised and sublimation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삶을, 가난한 여성의 삶을 아주 조용히, 되풀이해서 딸에게 전달하는 이 엄마에 대해 미지는 이 일생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



엄마가 자기 얘기를 하신다. 이거… 이거 존나 중요한 건데… 내가 다 기억할 수 있을까… 여태 한번도 얘기해준적 없는데… 이거 다 녹음해야 하는거 아닐까… 엄마는 소시민이고… 누가 엄마의 일생을 기록하겠어… (23화, earthbound 2)




제3세계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아온,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공장으로 향해야 했던 중년 여성의 과거를, 어쩌면 그대로 끝마치게 될 그녀의 삶을 과연 그 딸이 기억해주지 않으면 누가 기억해 줄 수 있을까. 미지가 엄마에게 느끼는 사명감과 부채감은 이 완전한 소진과에 대한 거부이자 상징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표시한다. 미지의 엄마가 미지가 담배를 피는 것도, 아무 남자랑 자고 다니는 것도 두고 볼 수만 없는 것 역시 같은 공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단은 자신이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생각될 만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고 잊혀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또한 미지의 삶이 자신의 삶과 같은 표시되지 않는 삶, 상징화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잔여로서의 삶에 편입되지 않길 바라는 공포 때문에 미지의 엄마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딸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욕을 하고 발로 차서라도 그녀가 그러한 공포에 시달리지 않는 삶을 획득하길 원한다. 상징적 죽음이란 이러한 멸소이며 설명가능성과 인식가능성으로부터 밀려나 희미한 인구 대중으로 주변화되는 삶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생동도, 가능성도 없는 죽었지만 죽지 못한 채 몸뚱이에 부여된 삶을 지리하게 이어나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충동은 이러한 멸소와 파괴를 향한 여로를 설정하는 것일까. “충동이 가르쳐주는 바는, 우리가 향유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라는 지젝의 말처럼 결코 완벽한 즐거움(향유)에 대한 집착과 그 흔적을 “결코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토록 존속하는 향유의 한층 더 나쁜” 표지이다(『까다로운 주체』, 476; 484). 충동이 일상어에서도 자신이 원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닌, 때때로 불길하게 엄습하는 조종 불가능한 감정을 지칭하듯이 그것은 저주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충동을 떨쳐버리려는 행동마저도 충동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지가 원나잇 파트너와 굴국밥을 먹으며 굴국밥 한 그릇만도 못할 만큼 희미해 보이는 엄마의 삶에 어찌할 수조차 없는 슬픔과 공포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저주에 대한 해결책은 없을까. 라캉이, 그리고 지젝이 반복하는 대답은 그 상징적 죽음의 장을 주체적으로 떠안으라는 지침이다.  죽음의 주체적 떠맡음을 이르는 다른 말은 숭고로의 승화이며, 실상 죽음 충동은 죽음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으로서 이 숭고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까다로운 주체』, 637). 그러나 무엇이 이런 전면적인 행위로의 이행을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해 그들(정신분석학)은 대답할 수 없다. 그들의 말마따나 그것은 언어화되거나 상징화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오직 반성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맴도는 어떤 자리를 확인함으로써만 우리는 그러한 행위로 향하는 일종의 통로를 가늠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그 통로를 따라 들어가라는 말은 미지의 엄마에게, 또 미지에게 얼마나 잔인한 길인가. 미지의 엄마가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은 예컨대 미지에게,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고 자신을 옥죄던 어머니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미지가 아무 남자랑 자든 담배를 피든 아무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미지를 딸로 바라보길 포기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게 된다. 미지의 엄마가, 그리고 그녀와 같은 희미한 배경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인 소수자들이 그동안 기대어 살아왔던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고 '미지의 삶'에 주체적으로 발을 들이는 것이 정말로 선택가능한 영역에 놓여있는가? 어떤 면에서 그러한 선택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미지와 미지의 엄마가 택할 수 있는 또다른 길은 물론 있다. 바로 애착을 반복하는 것이다. 미지가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반복하여 얻는 것은 이따금 떠오르는 죽은 마누미의 얼굴만이 아니다. 미지를 가로지르는 동시다발적인 권력의 교차점에서 미지는 자신이 반복해온 것을 통해 벌어진 틈을 선택할 수 있다. 미지가 대학생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애착했기 때문에 동아리에 들어갈 수 있었듯이. 대학생다운 대학생이 되고 싶다는 그 애착이 가져온 작은 행복의 틈새로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마누미와 그녀의 사망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하리보와의 관계라는 또다른 틈새를 열어놓기도 한다. 그들의 관계는 분명히 처음에는 마누미의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지만 하리보는 다시 미지에게 '음악 고수 친구'가 되고 그를 자신이 애착하는 동아리에서 열리는 음악감상회에 초대하기도 한다. 이렇듯 미지의 주체를 통해 교차하는 것은 권력만이 아니다. 상호연관된 권력들이 의식하지 못한 틈새 역시 들은 다시 그녀의 삶에서 하나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과정 중에 있다(제34화, The doll’s tea party; 제35화, hanging garden).


물론 이러한 틈새를 열어놓는 것은 분명히 그녀의 삶을 전면적으로 바꾸어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컨대 미지와 부모님의 관계가 전면적으로 재설정되는 일이, 혹은 미지가 갑자기 권태감에서 빠져나와 무언가에 자신의 전부를 거는 일을 틈새들의 집합만으로 성취하기는 요원해보인다. 미지가 동아리에 의존함으로써 느낄 수 있었던 행복은 그녀의 삶이라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보면 매우 국지적인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작은 행복은 욕하며 창문을 닫아버리는 버스 뒷자리 승객에 의해서도 쉽게 얼룩져버린다.




 

 

 

따라서 미지가 마주하게 될 두 가능성은 이 두 가지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자신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와중에 미묘한 틈새에 기대어 계속해서 국지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것. 혹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전면적 변화를 탐색하기 위해 그나마 가지고 있는 모든 것(가족과의 관계나 대학생이라는 지위 등)을 버릴 것을 각오하는 것. 결국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도 불가능해보인다. 전자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선택이며, 후자는 온전히 미지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더 큰 가능성를 포기하는 것과 불가능한 선택을 단행할 용기 사이에서 진동하는 미지의 세계는 모든 주변화된 삶들의 자화상이지 않은가.

 

 

나가며

 

미지가 앞으로 충동의 주체로 남게 될지, 아니면 숭고의 차원으로 도약할지, 그것도 아니면 정치적 수행성의 차원으로 이행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가 앞으로 어떤 세계를 묘사하게 되든, 미지의 세계가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의 전개 역시 우리의 삶과 '지나치게' 가까운 것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리고 어떤 선택지를 택하든 나타나게 될 미지의 모습은 특별히 기댈 것 없는 청년들의 모습과 쉴새 없이 공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지의 세계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미쳐 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일상의 어느 순간들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형상화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미지의 세계에 '일상툰의 최전선'이라는 찬사를 보내는 이유이다.

 




서지 (Bibliography)


1차 자료

이자혜, 『미지의 세계』. 레진코믹스, 2014-2015. Available on http://www.lezhin.com/comic/mijinosekai Retrieved 15 Feb. 2015.


2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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