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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사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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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사랑

herimo 2020. 3. 6. 23:14

*완성되지 않은 아이디어 노트이므로 인용 등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이하 코로나)를 논의할 때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은 쓸모 있을까? 특히 1990년대 이후 ‘이론(theory)’이라고 불리는 지적 도구의 쓸모를 찾을 수 있을까? 코로나 사태는 순전히 의학적·생물학적 문제로 보이고 이 부분에서 사회적인 것이나 그에 대한 비판이 끼어들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가장 많이 접하게 된 학문이 ‘역학(epidemiology)’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역학을 의미하는 에피데미올로지라는 영단어에는 인민을 의미하는 ‘데모스(demos)’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코로나 사태 역시 인간 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의 코로나 사태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이하 신천지)이라는 일종의 현대 신종교를 통해 확산된 것만 보더라도 이 사태가 인간 현상임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이 글은 인간 현상으로서의 코로나 사태에 대한 기초적인 이론적 개입을 시도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공포의 대상이 된 이 시점에, 공포는 바이러스/바이럴의 형태로 확산된다. 코로나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공포는 순전히 생리적이거나 순전히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공포에는 인간 현상으로서의 측면이 있다. 이 인간 현상으로서의 공포는 도대체 어떠한 정치적 작용을 하는가? 그리고 어디서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가? 이 글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아래에서는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정치적 상황을 '탈진실 시대'로 서술한다. 나아가, 탈진실 시대에 의존할 수 있는 감각적 확실성, 다시 말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감정, 공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논의한다. 공포에 대한 사유는 배타적인 종교적 믿음의 구성을 논하는 데 적실한 도움을 제공한다. 이러한 경로를 거쳐 이 글은 최종적으로 '사랑'이라는 주제에 도달한다. 자기 자신이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믿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부터, 우리는 공포와 사랑이 이루는 대칭 관계를 찾아볼 수 있고, 이 대칭 관계를 1980년대 HIV/AIDS 위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지금 이 순간의 진실, 공포, 정치, 사랑을, 나아가 그러한 조건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하나의 시야를 제공하고자 한다.

 

너무 무섭지 않은 이미지를 찾다보니….

 

코로나 시대의 (탈)진실 

코로나 사태는 진실이 무엇인지 판정하지 않고, 판정할 수도 없는 진실게임을 계속해서 펼쳐나가라는 탈진실 시대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리는 진실의 내용보다는 진실이 어떤 배치 속에 있으며, 특정 배치가 어떤 진실을 구성하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테면, 나의 발화의 내용보다도, 내가 정권이나 대통령, 신천지나 보수세력을 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진실성을 담보한다. 

 

신천지는 내부 감염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는 물론 사회 각계각층에 산포되어 있다는 점은 불안을 증폭시킨다(그들이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신천지 교인이 이 사회 여기저기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소수 종파가 으레 그러하듯 다소 맹목적인 신앙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고, 자기 집단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신천지 교인임을 숨겼던 사람이 확진자로 밝혀졌고, 그가 감염경로의 중추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전달된다. 

 

고집스럽게 폐쇄적인 집단에 대한 증오는 매일매일, 매분, 매초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진실게임을 강제당하는 탈진실 시대의 피로감과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최근 언론의 행태는 탈진실 시대의 피로감을 한없이 증폭시키고 있다. 언론의 발화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같은 신문이 어제와 정반대의 입장을 오늘 내놓고, 내일 또 다시 뒤집는 일도 흔하다. 어떤 기사는 정치적 입장 표명인 것이 명백하지만, 또 어떤 기사는 진실을 밝히라고 윽박지르거나 지금 이 기사가 놀라운 비밀을 폭로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가짜 뉴스와 거짓 폭로, 그 안에 담긴 단편적 진실이 혼란스럽게 널부러져 있는 코로나 시대의 바이럴이 작동하는 방식은 흥미롭게도 바이러스와 닮았다. 소문은 반복되면서 증식하고 경계를 거슬러 침입하고 그러기 위해 스스로 변형되고 진화한다.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이 가치있는 이야기인지, 무엇이 우리가 따라야 하는 기준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진실인지 가늠할 척도를 찾아내기는 점점 더 요원해진다. 예컨대 외국인 입국을 막는 게 맞을까? 마스크는 무얼 얼마나 써야 할까? 이 병의 실제 치사율이나 치명성에 비해 위험성이 과장된 건 아닐까? 이 모든 게 음모라면 어떡하나? 무엇보다도, 모든 ‘진실’이 사실은 정치 공작의 자장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면 나의 입장과 믿음은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만약 내가 정치 공작 바깥에 있는 입장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시 정치 공작을 통해 포섭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물론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진실이 항상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탈진실 시대의 유일한 진실을 외면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디뎌서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코로나 시대에 좀 더 확실해진 사실들,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한다는 확고한 사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어떤 정보의 정오를 따지기보다는, 정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로 시각을 전환하자는 것이다.

 

 

코로나라는 공포 

‘공포는 왜 무서운가?’라는 질문은 멍청해 보인다. 멍청하지 않더라도 동어반복적으로 보인다. 공포는 애초에 무서운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상이 ‘원래’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상식적으로 봤을 때 그것을 본능의 영역으로, 즉 몸의 즉각적 반응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의 의식이 어떤 대상이 무서운지 무섭지 않은지 명징하게 판단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몸은 답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말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가 곰이나 호랑이를 처음 봤을 때조차도 무서워하며 도망가는 이유로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를 이야기할 때 적절한 설명은 아니다. 우리가 곰과 호랑이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이러스가 우리 안에 들어서는 과정을 눈치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바이러스의 침입으로 인한 기침과 발열 등 몇 가지 증상을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몸의 변화가 바이러스의 침입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에 따른 공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러스와 증상 사이의 연관 관계에 대한 지식에 의존한다. 이때 우리가 바이러스에 대해 생리적으로 내장된 반응을 다시 펼쳐낸다는 설명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분명히 어떠한 상태를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지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단순히 사회적 명령에 따른 반응일까? 모두가 코로나바이러스(혹은 그 증상)를 무서워 하라는 사회적 명령 때문에 우리 모두가 코로나바이러스를 무서워하는 것일까? 그렇게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코로나바이러스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지식이나 성향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리고, 어떤 이들이 쉽게 사회적 공포에 감염되는 만큼, 다른 이들은 사회적 공포가 과장된 것이라면서 이 질병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추구하려고 한다. 게다가 사회적 공포는 분명히 우리 몸에 의해 매개된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는 우리 몸을 경직시킨다. 이는 사회적 접촉을 피하라는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생리적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바깥을 걸을 때에도 평소보다 갑갑하다고 느끼고, 평소보다 우울하며, 모르는 사람과 접촉할 때 맥박이 빨라지는 현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도 오늘 마지막에 언급한 현상을 경험했다. 평소라면 크게 개의치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위생적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법한 장년 남성이 거리에서 자신을 일으켜달라고 손을 빌려 달라고 말했고, 나는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사이에 그의 손에서 나의 손으로 보이지 않는 균이나 바이러스가 들러 붙을까봐 내 심장이 ‘두근댄다’고 느꼈다. 물론, 나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두려움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공포는 단순히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본능의 발현이나 사회적 현상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나는 공포의 사회적 측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사회가 지닌 공포가 이미 존재했고 우리는 그것을 전달받을 뿐이라는 단순한 모델도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떤 대상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공포를 느끼는 이들이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인의 이해할 수 없는 생활 양식에 공포를 느끼고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해야 하며,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그들은 바이러스보다 심한 인종차별주의자이다.) 현 정부를 두려워하거나 현 정부에 분노하는 이들은 자기처럼 반응하는 이들만 합리적이고 나머지는 정부에 꾐에 넘어갔다고 주장한다. 신천지 교회의 조직력과 그들의 은밀한 침입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한 목소리로 압수수색을 요구하며, 압수수색을 막는 의견이나 조직에 모두 신천지 아니냐는 혐의를 덧씌운다. 우리는 한없이 이어지는 진실게임 속에서 방향을 잃고 비틀거린다. 틀림없이, 공포는 불안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앞서 언급한 사례에서 두 감정은 함께 나타나곤 한다. 비슷한 것 사이의 비교는 우리가 무언가의 특성을 알아내고자 할 때 큰 도움을 준다. 공포와 불안은 피하고 싶은 부정적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그 대상과 맺는 관계에 따라 두 감정을 구분할 수 있다는 논의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쉬운 설명으로는, 불안은 불확실한 대상을 피하고 싶다는 감정이고, 공포는 확정할 수 있는 대상을 피하고 싶다는 감정이라는 설명이 있다. 나는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하고 다소 철학적으로 보이는 설명을 선호한다. 불안은 대상을 확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증유의 대상에 가까워지는 상황 속에서 고조되는 반면, 공포는 (불/특정한) 대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감각 속에서 깊어진다.[각주:1] 다시 말해, 불안이 공간성과 연관돼 있다면, 공포는 시간성과 연관돼 있다. 불안은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엄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공포는 불/특정한 무언가를 언제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촉발된다. (우리는 신천지 교인들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것을 불안해한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앞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두려워한다.)

 

이런 면에서 공포가 갖는 독특한 미래성이 성립한다. “공포는 고통이나 상처를 예상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공포는 우리를 현실로부터 미래로 투사한다.”[각주:2] 공포의 미래성은 공포의 정치적 효과에 저항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파국이 지금 맞닥뜨린 상황보다 더 큰 현실성을 획득한다. 파국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파괴적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영원히 다음에서 다음으로 연장된다. 내일이 또 다시 오늘이 되면, 그 다음날 찾아올지 모를 사태를 두려워한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미래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권위를 획득하는 동시에 내일에서 내일로 이어지며 존속한다.

 

 

코로나 시대의 정치

코로나바이러스의 공포는 다양한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국회의원 선거를 한 달쯤 앞둔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를 논의한다면 관례상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어떤 정당에 유리한 시국을 만들어낼 것인지 논의해야 할 것 같다. 애석하게도 나는 이른바 ‘정치공학’ 따위에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정당정치라는 다소 제한된 관점에서 보더라도 불안정성이 전례없이 극심해졌다는 사실에 관심이 간다. 여당은 한국의 방역이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훨씬 더 커진 이 사태의 책임을 통제할 수 없는 집단, 즉 신천지 탓으로 돌리려는 것 같다. 반면, 야당은 모든 책임을 정부에 돌리려고 한다. 야당은 좋지 않은 결론을 여당의 책임으로 재구성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들은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많고, 사회적 활동이 움츠러들면서 경기가 침체되었으니 집권여당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충분히 책임을 졌거나 책임지지 않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정당의 입장과 위배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다양한 정치적 수사를 통해 자기 자신의 이율배반을 정당화한다. 이 행위의 원인은 무엇보다 바로 앞으로 다가온 큰 정치적 이벤트에서 패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사회적 공포는 이런 면에서 정치적 공포로 변모한다.

 

제도 정치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의 또 다른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정치적 공포가 어떻게 다시금 사회적 차원에서 새로운 역동을 얻는지 이해하기 위해 긴요해진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정치는 주권의 획득뿐만 아니라 무엇이 공적인 것인지, 그리고 어떤 삶이 공적 삶으로서 가치 있는지 규정하는 행위를 의미해왔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씩 생산되는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확진자가 이전의 삶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확진자의 동선이 공개되면 그 동선에 걸쳐 있는 상점은 당연하다는 듯이 문을 닫고 방역을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방역을 열심히 해봐야 사람들은 ‘굳이’ 그 가게를 찾지 않는다. 이 사회가 확진자를 다시 불러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확진자의 감염과 동선은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니 일련의 결과는 어쩔 수 없는 불운의 영역으로 떠밀려지고, 사회가 그들을 함께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논의는 터무니없는 낭비로 여겨진다. 구호물품이 전달되긴 하지만, 이는 개인이나 법인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온정주의적 선행과 기부에 따른 것일 뿐이다. 이런 선의는 아주 소중하고 어여쁜 것이지만, 희생된 이들이 지속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재생산할 수 있도록 책임을 지진 않는다. 이제 공포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피할 수 없는 형태로,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은 그 자체로 위기라는 깨달음을 맞닥뜨리는 형태로 구체화된다. 두려움은 감염뿐만이 아니라, 감염이 나와 내 생활을 완전히 짓밟고 지나가더라도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으리라는 현실적인 추론에 기인한다. 나는 대체 가능한 소모품이다. 나의 어떤 능력도 나의 삶을 온전히 보호해주지는 못한다. 이번 사태를 무사히 넘기더라도 나 또한 언젠가 버려질 것이다….

 

한편,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양상은 결코 랜덤하지 않다. 물론 여기에는 신천지라는 신종교(베버의 분류를 따르자면 ‘컬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종교라는 전염 허브로 사람들을 이끄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존재할 것이다. 직관적으로 볼 때, 이 병은 배타적이고 응집력이 강한 종교에 의존하기 쉬운 사람들 사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수치의 감염 비율을 보인다. 게다가 신천지의 예배나 활동 방식 등이 연령화/젠더화되어 있는 만큼 코로나바이러스는 특정 연령층(20대)과 여성에게 이례적으로 높은 비율로 확산되었다. 신천지만큼 극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종로노인복지관 식당이 주요 감염 경로 중 하나라는 점에도 주목하게 된다. 노인복지관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가난한 노인은 어쩔 수 없이 위험에 노출되며, 면역력과 체력이 약한 만큼 전염은 치명적이다.

 

내가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이 위험이 사회적으로 매개된다는 정보를 접할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코로나 사태로 인한 생리적, 사회적, 정치적 공포가 대중의 감각기관을 잠식할수록 그들은 위험과의 과감한 단절을 통해 이 문제에서 회피하려고 한다. 중국인 입국 금지, 대구경북 폐쇄, 신천지 격리 등이 유력하고 (심지어 때로는) 합리적인 수단으로 각광받는다. 확진자가 개인으로 치부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 특정한 삶의 경로를 따르는 확진자는 위험한 무리로 집단화되며, 특정 집단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거나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게 내버려두자는 주장이 합당하다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다행히 이런 조치들은 시행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살만한 삶과 죽어도 마땅한 삶을 구분하는 판단을, 자신과 사회의 공포를 바탕으로 정당화하는 현상은 그 자체로 섬뜩함을 자아낸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

코로나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 무엇에 의존할 수 있을까? 기부와 선행을 베푸는 이웃사랑이 답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신천지를 믿을 수 없는 이유도 그들이 지닌 집착과 구분할 수 없어 보이는 사랑이다. 상식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신천지에 대한 공격을 이기심의 발로로만 해석하는 것은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기심은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기이한 애착과 대칭적이다. 밖에서 보기에 그들은 하나의 무리이지만 그들 각자가 자신의 공동체에 갖는 소속감이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우리가 모르는 여러 가지 조직 강화 기술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이라는 차원이 완전히 소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강력한 애착으로 하나의 상상된 실체에 부착돼 있을 뿐이다. 현대인으로서는 자기 자신보다 공동체가 소중해진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이들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도 코로나는 교단을 부숴버릴 수 있는 공포의 대상이고, 공포가 강해지는 만큼 그들이 교단에 대해 품는 애착도 강고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랑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21세기 한국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잠시 바라보자. 감염을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사회의 각계각층에 퍼져 있지만 내적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 그러 인한 한정된 집단 안에서 높은 전염율과 통제할 수 없는 전파 가능성, ‘진실’을 밝히라는 요구, 모두 정체를 밝히라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순간 공동체가 괴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르기까지, 코로나바이러스와 신천지를 둘러싼 정황을 바라보면서 나는 HIV/AIDS가 서구와 북미에서 최대의 위협으로 떠올랐던 1980년대에서 1990년대의 문헌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연상 작용에 기대 신천지가 무고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신천지는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당대의 감염인들, 특히 감염인을 대변했던 남성 동성애자 사회만큼 취약한 집단도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파악하는 데 있어 남성 동성애자 집단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수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정보를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질병이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는 것을 상상할 때, 신천지의 유리한 위치는 동성애자들이 버림받는 속도와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 참고할 만한 자료로 거듭난다. 우리는 친밀성을 얽어나갈 최소한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의 정치는 우리에게서 자유를, 나아가 살만한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빼앗아 갈 준비가 얼마든지 완수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서로를 믿고, 사랑을 믿고, 그 증거로서 목숨을 걸고 몸과 마음의 관계맺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각주: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천지의 자기애와 거의 자기 파괴적인 후자의 사랑을 서로 다른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 정확한 감식안인 것 같다. 꼭 사랑이라고 축약하기는 어렵지만,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연대와 국제적 공조, 즉 한때 공산주의라고 불렸던 것의 새로운 형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각주:4] 마스크를 기부하는 것과 지젝이 말한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연대’는 거의 정반대의 실천을 가리키지만, 두 가지 모두 사랑이라는 외형을 공유한다. 사랑이 답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랑을 할 것인지,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것이 중요한 시기이다.   (일단락)

 


 

  1. Sara Ahmed,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2nd Ed.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4), p. 66. [본문으로]
  2. Ibid., p. 65. [본문으로]
  3. 영화 〈120 BPM〉의 마지막 섹스 장면은 애도, 우정, 욕망, 위로가 난잡하게 교차하는 국면을 보여준다. [본문으로]
  4. https://www.welt.de/kultur/article205630967/ 이 글을 소개해준 리타에게 감사드린다. https://blog.naver.com/hotleve/221760043419. 지젝은 정신분석학의 ‘사랑’ 개념에서 혁명의 낌새를 읽는다. 일례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결론—사랑의 낌새」를 볼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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