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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마밀, 크리에이션

herimo 2013. 4. 26. 00:01

丙 소사이어티의 <맘마밀, 크리에이션>을 보고 왔다.


난 이 연극이 주체의 구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혹자는 크리스테바가 떠올랐다는데 나는 라캉 생각을 가장 많이 했고, 점차 푸코나 버틀러에게로 옮겨갔다. 버틀러 역시 크리스테바를 재독해하기도 해서 크리스테바의 느낌을 받았다는 점도 매우 공감가는 부분이었다.


입장은 7시 45분부터였고 입장하기 전에 이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음악이 대충 두어 번 반복되고 딱 끝나자 등이 꺼지고 '허작가'가 나온다. (이 시작 전의 음향이 나에겐 매우 의미있게 다가왔다. 하단 내용을 참조해주시라.)


극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이야기와 함께 시작한다. '허작가'는 '이우리'라는 존재가 유령처럼 자기 곁을 떠돌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작가의 머릿속을 멤도는 그런 유령일 것이다. 그 유령에 '우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우연히 탄생한 어떤 '것'의 존재를 구체화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토삿물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사물의 기억을 먹고 인간의 지각/감각으로 전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허작가'는 이것의 창조 의도를 '뻗어나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한계를 넘어 어떤 사물들의 기억과 역사를 알고 뻗어나가서 그것들과 어떠한 감성을 공유하기까지 하는 것. 다만 그것이 생각처럼 되진 않았다. '그것'은 이따금 내면의 기억을 자극시킨다. 과거의 추억, 잊고 싶은 고통과 고난의 시절을 넘어 내가 기록했던 것들에 관한 모든 기억이 '우리'를 휩싸고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내가 이 연극에서 가장 감탄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었는데 실로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아니냐는 생각에서였다. 온갖 기호들이 프로젝터에서 나와 흰 벽과 '우리'의 몸 위로 떠다니고 바뀌는 광경은 일종의 상징적 질서에 포섭된 인간 존재를 형상화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음향과 영상, 배우들의 연기마저도 잘 짜여진 하나의 극본 위에서 행동할 때 그것이야말로 상징화된 질서 속으로 우리가 이미 들어와 있음을 형상화시키는 하나의 시도가 아니겠는가.


이 장면을 보면서 핵심적인 질문들이 몇 가지 떠올랐는데 내가 가장 끈질기게 물어져야겠다고 생각한 부분은 주체의 구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가?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으로서 보존하는가? 어떤 사실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해내는가? 그리고 이걸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내가 나의 기억을 조직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이 나를 쓰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야기를 통해 구성되는가? 나는 서사(적 자아)인가?


'허작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허작가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라캉의 표현대로라면 대타자라고 할 수 있겠고 푸코를 떠올린다면 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담론은 '우리'를 포섭하고 그들의 행위를 '쓰고' 있다. 이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는 처절하다. '우리'는 본인이 기억하지도 못했던 과거의 환기 속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했던 것들을 바라보고 결과적으로 자기가 '버린 것'을 발견해낸다. 그것이야말로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아닐까? 그렇게 주체화되지 못하고 인식되는 대상으로서도 남겨지지 않은 채 버려진 존재, 크리스테바의 표현대로라면 비체(abject)를 만나게 된다. 의식 밖의 자신이라는 점에선 무의식을 연결시키는 것도 타당하겠다.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의 '경계'를 만나게 된 '우리'는 결국 '허작가'의 집필로부터 벗어난다. 왜냐면 '허작가'가 쓰지 않은 '자신'(혹은 자신이 아닌 것)을 조우했기 때문이다(나는 이것에 있어서 이 이상의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허작가는 당황한다. 자신이 포섭할 수 없는 존재의 발생에 당황한다. 그는 '그것'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디에 갔는지, 그리고 허작가의 입을 빌려서 그것의 이름이 드디어 나타난다. 그것은, 사건이고 수행이고 행위이다.


내가 버틀러를 떠올린 부분, 그리고 적어도 나 자신이 이 연극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확한 방식은 버틀러를 떠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담론'에 심문되지 않는 존재의 '존재'에 대해. 결국 허작가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우리', 동시에 허작가에게서 벗어났기 때문에 허작가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는 라면을 먹는다. 이 장면이 기억에 남는 두 장면 중 다른 하나인데, '우리'의 명확한 실존으로서, 존재로서 자신의 현존을 증명하고 토대 위를 딛고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게 있어선 비존재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몇 시간 전에 했던 극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이 내 행위로 인한 것일까? 사건이나 수행이라는 것은 오히려의 나의 의지를 벗어나 있는 어떤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쓰는 일관된 의지란 것이 존재할까? (내 생각엔 담론이란 것은 허작가의 행동처럼 완전히 일관되지는 않은 것이기도 하다) 이 극은 이렇듯 판타지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실재와 리얼리티를 묻고 최종적으로 하나의 가능한 답을 내리는 완결성 있고 집중력 있는 극이라고 생각한다. 1시간 40분이 약간 넘는 시간동안 군더더기가 그리 느껴지지 않았고 억지로 들어간 부분도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로 계산하고 자로 잰 듯한 장면들의 나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것으로서의 생각, 인간으로서의 혼란, 감정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근래 봤던 '이야기' 중에 가장 훌륭하고 완성도 있는 축에 속했다.


이 연극은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프린지 페스티벌은 예술가들의 축제로 독립 예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신인 작가들의 신선한 사고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행사다. 기지 넘치는 젊은 신생 극단 丙 소사이어티의 당차고 꼼꼼하게 만들어진 연극이 매우 기분좋은 느낌으로 다가온 하루였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에서 유를, 단편적인 실마리에서 총체적 하나를, 씨앗에서 나무를 길러내고자 하는 진행의 욕구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해석이 아무렇게나 쌓인 창고를 끝없이 뒤적이는 퇴행의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진행과 퇴행의 역설 속에서 이야기는 탄생한다. <맘마밀, 크리에이션>은 이러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획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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