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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욕망으로부터 도망치고 또다시 껴안기: 괴물(2023) 리뷰 본문
*스포일러 포함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23)을 봤다. 사실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비는 시간에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다. 최근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훔친 가족(2018)과 브로커(2022)와 마찬가지로 가족에 대한 영화이면서 정상가족을 이룰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가장 널리 알려진 포스터에는 주인공인 요리와 미나토가 시선을 되돌려주고 있고, 아래에 그 시선을 되받아치는 것처럼 보이는 세 명의 어른들의 모습이 보인다. 포스터가 시사하듯 이 영화는 시점에 대한 영화다. 3부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는 처음에는 미나토의 엄마인 무기노 사오리(안도 사쿠라)의 시선에서, 두 번째는 호리 미치토시(나가야마 에이타)의 시선에서, 마지막은 무기노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셋은 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르게 보고 있고 직접적인 의도가 없더라도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영화의 플롯이나 캐릭터에 대해서는 이미 좋은 비평이 많고, 나는 이 영화를 퀴어 영화로 읽을 때 발생하는 몇 가지 소란에 대해서만 간단히 얘기하고 싶다. 우선 폭력을 몸으로 받아내는 호시카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의 캐릭터가 작위적이라는 평부터 짚고 싶다. 비슷한 문제제기가 고레에다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지적될 만하다. 예컨대 누구도 큰 잘못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따라야 할 규칙 사이에서 캐릭터가 분열하는 상황을 주고 그 배경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사용하여 사건의 모순성을 부각하는 것은 그의 장기이다. 고레에다가 포함하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상황, 심지어 캐릭터가 사건의 잔인함을 가로막는 마개 역할을 한다는 비판은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매번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러한 대조의 사용을 두고 모순을 극화하는지 아니면 모순을 완하 하는지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는 모순을 비출 뿐만 아니라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관해 (극화와 완화라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하고 개인적으로는 그 공존이 고레에다 특유의 영화 미학의 핵심 성취 중 하나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괴물에서는 도시의 전경과 바다, 숲이 아름답게 그려지며 무엇보다 요리의 캐릭터가 폭력적인 사건을 담아내는 아름다운 배경처럼 기능한다. 아이는 거의 분노하지 않고 울지도 않는다. 하지만 미나토가 아무 욕심이나 바람이 없는 것처럼 비치는 요리에게 매혹되지 않는다. 미나토는 반에서 이지매를 당하던 요리—이 시점까지 미나토는 그를 '호시카와'라고 부른다. 호칭의 변화가 한국어 자막 번역에 잘 담기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쉽다—에게 죄책감을 갖고 요리에게 다가가는데, 그때 요리는 인간으로서의 얼굴을 되찾는다. 울지는 않지만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사실 친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어렴풋 비친다. 사람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그 바람이 배신당한 역사를 갖게 될 때 자기 바람을 포기한다. 요리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가 애초부터 아름답게 조형된 캐릭터여서가 아니라, 그의 짧은 생이 박탈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괴롭힘 당하지 않는 생활을 원했을 것이고 다정한 아버지를 바라 봤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자기와 친구가 되어 주거나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지 않을지 그려봤을 것이다.
미나토가 자신의 욕망을 부인하는 방식은 요리의 바람이 좌절된 형태를 띠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는 요리에게 과자를 건네받고 요리의 손에 머리카락이 닿은 뒤 그 머리카락을 자른다. 미나토는 과자와 함께 무언가를 전해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떨쳐내려 한다. 미나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혼란은 요리가 괴롭힘을 당하는 불쌍하고 순수한 피해자이기기만 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요리가 해맑음 속에 고통을 보여줄 때마다 미나토는 흥분한다. 아이들이 책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때, 요리가 아버지에게 돼지 뇌를 가지고 있다는 폭언을 들었다고 고백할 때, 단어 맞히기 놀이를 하다가 요리가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바라본다는 것을 '나는 호시카와 요리입니까?'라는 질문을 통해 표현할 때, 요리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이곳을 떠나고 싶어한다고 사뿐한 태도로 거짓말을 할 때, 그런 때마다 미나토는 참지 못한다.
동시에 미나토는 자기가 왜 참지 못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요리와 자신의 관계가 무엇이고 어떻게 변화하길 바라는지 명백히 표현하기를 줄곧 거부한다. 미나토가 결혼하고 가족을 이룰 때까지 헌신하겠다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 미나토는 아무말 없이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린다. 호리 선생이 자신을 괴롭혔다는 혐의에 반박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자기가 무엇을 원했는지 드러날까 봐 망설인다. 미나토가 도망치는 장면 중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요리와 미나토가 자신들의 아지트인 기차 안에서 놀다가 미나토가 무언가를 느꼈을 때 요리가 '나도 가끔 그래'라고 말하자마자 미나토가 도망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감정적 혼란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성욕과 연관된 신체적 변화가 일어났다고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동은 성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아동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말하기에 동원되어 왔기에 이를 발화하는 데 모종의 죄책감이나 우려가 따라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 사실을 지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신체적 변화를 겪었든 아니든, 미나토가 요리에게 느끼는 감정에서 섹슈얼리티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독해는 미나토가 자기 욕망을 도저히 명백히 말하지 못하는 상황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아동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고 이 영화를 탈성애화된 '순수'한 사랑으로 읽는 것과 그런 해석에 대한 저항이 내가 지적하고 싶었던 첫 번째 소란이다. 두 번째는 이 영화를 보이즈러브 장르로 읽으려는 시도와 그에 대한 반박이 빚은 소란이다. 이 논란은 주연 배우인 쿠로카와와 히이라기 배우가 내한하고 현실의 아역 배우와 영화 속 배역을 뒤섞고 두 배우 사이의 관계를 보이즈러브 장르의 흔한 관계성에 맞춰 읽으려는 이들로 인해 시작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런 해석의 폭력성과 부적절함을 지적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런 비판을 반복할 생각은 없다. 나는 오히려 이 소란에서 파생된 장르 사이의 부딪힘에 대한 논의에 좀 더 관심이 간다. (영화)장르로서 퀴어와 보이즈러브는 어떻게 만나고 갈라지는가? 서로 다른 역사를 지녔지만 두 장르 사이의 구분이 생각처럼 단단하지는 않다. 다만 퀴어영화는 예술적·미학적이고, 보이즈러브는 상업적·쾌락추구적·(때때로)포르노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두 장르가 지니는 가치를 구별하려는 행동이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온당치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런 구분이 때때로 유용하더라도 완전히 타당하지는 않다. 퀴어영화는 에로틱할 수 있고 퀴어영화의 에로틱한 장면들은 말초적 쾌감을 자극할 수 있다. 보이즈러브 관행을 따르는 이미지 상품 역시 이성애규범에 대항하고 애정, 감각, 관계, 욕망 사이의 해소되지 않는 질문들로 우리를 되돌려 보내곤 한다. 즉, 장르는 구별을 위한 장치인 동시에 구별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런 면에서 경계를 가로지른다는 어원을 가진 '퀴어' 장르를 다루고 있는 지금, 장르와 젠더가 어원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하다.)
괴물의 3부에는 1부와 2부에는 묘사되지 않았던 중요한 장면이 있다. 항상 의뭉스러운 태도로 일관해 온 교장은 미나토를 보고 말할 수 없을 때 호른을 불어 버리면 어떠냐는 조언을 해 준다. 두 사람은 각각의 괴로움과 답답함을 지니고 그것을 밀어내고 숨쉬기 위해 호른을 분다. 뿌—소리가 교정을 뒤덮고 미나토는 마침내 결심을 한 것처럼 요리의 집으로 달려 그를 구해내고 두 사람만의 아지트로 자리를 옮긴다. 태풍이 지나가고 두 사람은 함께 달리는데, 그 풍경엔 인간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녹음만 우거져 있다. 그 풍경을 비현실적으로 느낀 미나토에게 요리는 이것이 꿈은 아닐 것이라고(메모를 해둔 것은 아니라 대사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못 박는다. 이것이 두 사람이 함께 꾸는 꿈이 아닐지라도 두 사람이 숨이 찰 때까지 함께 달리는 들판이 완전히 현실의 풍경 같지도 않다. 어떤 관객들은 자기 삶의 그런 순간들, 현실이 유예된 국면들을 잠시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사회의 기대를 배반하는 선택을 할 때에는 항상 냉혹하고 두려운 현실을 잠시 밀어내는 순간이 함께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미나토는 자기 자신의 욕망 속에서 두렵고 기이한 것을 발견하고 도망치지만 결국 그것을 끌어안고 달릴 때 처음으로 해방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해방이 아주 잠깐 주어지는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그 찰나의 순간이 그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숨 쉬고 달리며, 요리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거기에는 평화롭고 비인간적인 풍경뿐만 아니라 음습하고 폭력적인 욕망과 저속한 쾌락 역시 들끓을 것이다.
(2024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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