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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 감상/단상

herimo 2022. 6. 27. 01:26

22년 6월 26일 관람 / 결말 포함 전체 내용 스포일러 포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이란 주제에 천착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떻게 가족이 되는가?'라는 주제에 골몰한다. 평단의 호평을 받은 〈어느 가족 万引き家族〉(2018)만 하더라도 원래 혈연 가족이 아니었던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서로를 애착하게 되고 가족으로 거듭나는지, 사회가 그런 가족을 용인하지 못할 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그린다. 이들은 무언가(애정, 재산, 아기)를 훔치거나 멋대로 전유해 가족을 이루고 마침내 가족이라는 관념을 훔치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진짜 가족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가족의 해체—특히 부자 관계의 해체를 필연적으로 경험한다. 이 영화에 주어진 호평을 생각해 보면 영화 말미에 보이는 구축과 해체의 동시성이 감독이 고민하는 가족의 본질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브로커〉(2022)는 언뜻 봐도 〈어느 가족〉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영화는 엄마가 아이를 버리면서 시작된다. 인물들에겐 계속해서 가족을 버려야만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시련이 그려진다. 주요 인물들은 무언가를 긁어 모으기보단 돈, 폭력, 애정의 격류에 휩쓸려 손에 쥐었던 걸 놓치거나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 끝에 자신이 (차라리)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를 맞이하기를 기대한다. 돈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마지막까지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이들은 결국 실패를 맞본다. 아이를 돈으로 사려다가 결국 실패한 우성 친부의 부인, 집행유예에 처한 윤씨 부부, 4,000만원을 쥐고 더 큰 돈을 벌려다 죽어버린 태호를 떠올려 보자. 이 영화의 중심에는 '버리기'라는 모티프가 있다. 그러나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캐릭터를 살펴보자.

 

〈브로커〉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치고는 대사가 직설적으로 쓰인 편이고, 힘을 준 대사들은 인물들 사이에서 분출된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낳기 전에 죽이는 게 낳고 나서 버리는 것보다 죄가 가벼워?"(소영—아이유 분)나 "태어나줘서 고마워"(소영, 해진—임승수 분)뿐만 아니라 관람차 안에서 동수(강동원 분)와 소영의 대화(남자를 죽이고 도주하다가 방해가 되는 아이를 버린 여자로 여겨질 것이라는 예측, 그에 대해 살인자의 아이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안다는 동수의 위로) 등 영화에서 한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건네는 갈등, 화해, 위로의 언어는 소영의 난처함을 공감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기 위해 쓰인다. 이러한 방식은 인물을 어떤 속성이나 사회적 입장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이게 할 위험이 있지만 감독과 배우들의 역량 덕택에 이 영화가 이런 유형의 군상극이 답습하기 쉬운 밋밋하고 재미없는 형태로 구현되지는 않는다.

 

소영은 어릴 적부터 성매매 여성으로 일하다가 여자아이들을 데려와 기르기에 '엄마'라고 불리는 '포주'를 만나고 그녀의 알선을 통해 조직 폭력배 중에서 꽤 높이 자리에 있는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는다. 그 남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지우라고 말했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빈정댄다. 소영은 그 남자를 죽인다. 그후 아이를 베이비박스 앞에 두고 떠난다.

수진(배두나 분)은 큰 틀에서는 정의를 추구하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였고 그 과정에서 완전히 순진하지만은 않은 청소년계 형사다. 수진은 베이비박스가 인신매매에 활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자신의 촉을 믿고 같은 팀 후배인 이 형사(이주영 분)와 함께 잠입수사를 하던 중에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소영의 모습을 본다.

상현과 동수는 교회의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 중 일부를 빼돌려 불법 '매매'하는 브로커들이다. 상현의 과거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도박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고, 딸을 하나 낳았지만 이혼 했으며, 세탁소 일을 한다. 상현의 직업이 세탁공인 것은 다분히 우의적이다. 그는 아이의 과거와 관계를 씻는 사람이며 떨어진 단추를 다시 꼬메는 것처럼 사람들의 관계를 이어주는 사람이다. 그 일이 모두 끝난 후에 그는 그 자리에 없어야 할 사람이 되어 사라지게 된다.

동수는 어릴 때 친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랐고 가장 멀리, 오래 탈출했으며 보육원이 있는 지방이 아닌 도시에서 제 삶을 꾸릴 줄 아는 사람으로서 보육원 아이들은 그에게 다르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나 가능성 따위를 투사한다. 해진은 그런 아이들의 대표 격으로 이들의 여정에 잠입한다.

해진은 이미 자신에게 입양의 가능성, 즉 보육원을 탈출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그곳을 벗어나 삶을 꾸릴 수 있는 미래를 열정적으로 탐색한다. 동수는 소영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동일시하지 않지만) 보며, 소영도 마찬가지로 그를 통해 자기 아이의 미래를 그려본다. 다른 이를 자기를/자기가 버린 가족의 거울 상으로 보는 활동을 통해 이들 사이의 성적 긴장은 다소 누그러진다. 이성 간 성적 긴장이 쪼그라든 자리에는 가족 사이의 애정이라는 대체재로 보충된다.

아기 우성을 '제대로' 팔아 보려는 상현, 동수, 해진, 소영의 여행에는 사회의 규범과 타인의 욕망이 쉽게 끼어 든다. 소영은 살해범으로, 상현과 동수는 인신매매범으로 쫓기고 있다. 소영은 우성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남자의 아내가 사주한 조직 폭력배(태호)에게도 쫓기고 있다. 상현은 태호의 패거리로부터 (아마도 도박으로 진) 빚 독촉을 받고 있다. 동수는 자기 삶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들의 여행에 휘말린 형사 수진은 상현과 동수를 인신매매 현행범으로 체포하기 위해 작업에 들어가지만 결국 실패하고 종국에는 자기들이 오히려 브로커 같지 않냐고 되묻는다. 그녀는 이 상황을 가장 효과적으로 타개할 계책을 소영에게 알려 주고 그를 위해 우성을 맡아서 '버리기'를 통해 어설프게 모인 가족에서 자기 자신도 한 축을 담당하기로 한다.

 

이처럼 수진은 자신의 믿음과 고집, 어쩌면 자기 그 자체였던 것을 버리는데, 이런 사건이 '버리기 가족' 모두에게 일어난다. 동수는 원망을 놓고, 해진은 입양되기 대신 이들에게 가족 하자는 말을 하고, 상현은 전처와 아이에 대한 욕심은 물론 새 가족에서의 자기 자리를 포기한다. 영화가 가장 끈질기게 조명하는 소영은 버렸던 자신의 미래를 다시 쥐어 보기로 한다. 이들이 버리는 것들은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그들 자신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에 해당한다.

무엇이든 쇼핑할 수 있다면 인간도 살 수 있을까?

이 영화가 나이브하다는 인상을 준다면 이들이 결국 자기 자신이었던 무언가를 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행복해지는 어느 가족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와 구원의 순간은 사실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감독이 불행한 캐릭터를 만들고 이들을 억지로 구해줬다는 평가도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영화를 그저 선한 사람 되기를 권하는 영화로 보기는 아쉽다. 이 영화의 서사는 사실 선악을 판단하는 서사는 아니다. 예컨대, 상현, 동수, 수영 모두 극을 이끄는 주인공이긴 하지만 이들은 모두 범죄자(소영은 살인자, 동수는 인신매매, 상현은 둘 다)이고 누구도 무고하거나 선하지는 않다. 캐릭터, 대사, 서사는 모두 사람들에게 판단과 평가를 쉽게 내리는 데 머뭇거리기를 권한다. 그러니까, 소영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아이를 낳는 것이 낫다는 것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녀의 삶이 '성매매 여성으로서 자신을 혼외 임신시킨 남자를 살인 후 도주 중 도주에 방해가 되자 아이를 버린 모진 엄마'로 요약될 수 없음을 항변하는 인물로서 거기에 있다. 이 이야기는 소영의 삐딱함 옆에 꿈틀거리는 불안을 힐끗거리기를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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