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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기도하라> 서평

herimo 2013. 4. 25. 11:08



혁명을 기도하라

저자
한승훈 지음
출판사
문주 | 2012-05-03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교회 밖에서 변방의 사형수를 만나다!죽어도 죽지 않아『혁명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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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훈 동학님의 책 <혁명을 기도하라> 서평.


길게 쓸 생각은 아닌데. 아마 이거 쓰면 저자 외엔 몇 명이나 볼진 모르겠다;


1. 내부적 언어를 통한 비틀기 전략


나는 요즘 어떻게 하면 전복이 가능한가에 대한 희미한 의문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여성이 부권적 권력/아버지 법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선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 것인가? 그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어디부터인가? 여성사회? 아니면 남성사회? 일반사회? 나이브하고 러프하게 새개화하자면 그런 일이 가능한 영역은 여성+남성 사회(이러한 인식은 순전히 성별 이분법에 기반한 것이다.) 혹은 일반사회의 영역이 될 것이다. 비슷한 논지로 소수자의 언어가 떠오르기 위해선 그것이 소수자 사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수자의 언어를 통해 일반 사회에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언어가 우리를 사유하게끔 해주는 장치라면(라깡이나 기호학자들의 말처럼 언어와 담론의 권력이 그리도 대단하다면) 다수를 위해 구성된 언어, 곧 지배자의 언어를 통해 소수자의 발화가 곡해없이 전달될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엔 오해와 곡해없이 그런 활동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전복을 위한 언어는 필연적으로 곡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쓰임에서 지배권력과 담론의 균열을 찾아내고 (버틀러 식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균열을 반복/생산함으로써 지배 구조를 허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최근 민중종교/혁명을 연구하는 한승훈 씨는 <혁명을 기도하라>라는 '종교 서적'을 발행했는데, 이 책 자체를 이러한 내부로부터의 비틀기 전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한국 기독교와 '예수의 종교'를 비교하며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초석인 예수의 행실이 현재 한국 기독교 사회의 행보와 다르다는(좀 더 나아가 반대라는) 내부로부터의 비틀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1.1. 예수의 모습을 재구성하기.


예수는 여러 모로 재현이 많이 되는 사람/신/인신이다. 어느 곳에서는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으로, 어느 곳에서는 완전무결한 신으로, 때때로 인간적 고뇌를 멈추지 못한 신적 능력을 가진 신인 등. 미디어 및 현대 기독교 사회에서 그의 모습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재현된다. 다만 이중 어느 것이 진짜일 수 있을까?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성경'이라는 텍스트/캐논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이 '진실'일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믿는 예수, 그들이 구성한 예수는 정말 그들의 말처럼 성경을 따르고 있을까?


저자는 성경의 행보와 당대의 역사 문화적 맥락을 추적하며 예수의 언행을 현대 기독교와 다른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저자 서문에서 재기발랄하게 말하고 있듯이 어떤 면에서 이는 '구라'이다. 당연하다. 누가 2000년 전 사건과 인물의 진실된 모습은 이것 하나다, 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여러 가지 예수의 형상을 떠올리고 견주어 보며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 찬 그 모습을 진실된 예수라고 믿을 뿐이다. 혹자는 사기꾼으로, 혹자는 성자로.


공관 복음을 기초로 해서 재구성한 예수는 이제 소수자 혁명에 불씨를 댕기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그런 예수를 믿음의 근본으로 삼는 현대 한국 기독교의 행보는 소수자를 억압하고 차별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한국 기독교의 행보에 해주고 싶은 질문은 '정말로 당신들이 믿는 게 예수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저자는 은근히 이들을 비꼬며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본(맘몬)을 숭상하는 것이라 말한다. 


내부로부터의 비틀기 전략이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지점이 될 것인데 종교 외부적 주체가 '너희들은 틀렸어! 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해.'라고 말해봤다 그 종교 외부적 주체는 '선교의 대상'이 될 뿐이고 소수자는 참회하고 회개해야 할, 그리고 올바른 길로 돌아와야 할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너희가 믿는 예수는 사실 그렇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아무래도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외부 주체는 대상화하기 손쉽지만 내부적 발화는 눈여겨 보게 되고 균열을 체감하게 될 수도 있다. 


2. 그렇지만.


그렇지만 두 가지 문제가 떠오른다. 첫째는 예수의 행동이 종교 외부적 주체-그러니까 기독교인이 아닌 이들에게도 행위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바른 행동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때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행동이 바른 행동이지요.'라고 하면 적어도 기독교 사회 내부의 소통에서는 어그러짐이 없다. 그러나 비기독교인에게는 다르다. 그들에게는 저자가 스스로 묻고 있듯이 '정의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남게 된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종교 서적'이라고 주장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기독교인들만 읽기엔 아까운 책임은 분명하다. 적어도 한 인물의 가치관과 행동을 통해 무엇이든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기독교인이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둘째, 소수자를 배려하고 그들을 주체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동감하더라도 '그렇지만 어떻게?'라는 의문은 남아있게 된다. 저자는 '여사도'와의 인터뷰를 삽입하여 하나의 예시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보면 극단화된 행동이고 모든 기독교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방법이다. 동시에 비기독교인들이 수행할 수 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결국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아우를 수 있는 방법론적 돌파구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이 책을 덮게 됐다.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상기했듯이 재구성된 예수의 모습이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이 사회에 필요한 혁명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사막의 잡신/히브리의 종교를 현대 사회의 시민들 역시 숭상할 수 있는 존재일까? 그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공감을 자아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적어도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했던 열정, 그리고 책의 핵심적 메시지인 혁명을 기도하는(trying to/praying for) 것은 당신 자신이라는 것. 이 두 가지는 가슴에 품고 머리에 새길 만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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