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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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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2)

herimo 2013. 5. 9. 00:36

2편을 쓰기까지 다소 텀이 길었다. 사실 대략의 틀을 잡아두었지만 딱히 정확히 뭘 어떻게 풀어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고 글을 시작해서 이렇게 된 것 같다. 쉬면서(혹은 다른 일을 하면서) 얼추 얼개를 잡았다. 대략 좌파에 대한 사전적 정의와 내가 마주치는 용례들에 대해 내 입장을 풀어보고자 한다. 전반적으로 주장이 담긴 글이 될 것이고 경우에 따라 이전 글보다는 훨씬 쓸모 없어 보일 수도 있겠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재밌을 수도 있겠고(내 희망 사항이지만).


일반적으로 안정보다는 변화, 성장보다는 분배와 복지를 강조하는 경향을 지닌 정치사상이나 정치세력을 가리키지만, 좌우의 구분은 판단 기준에 따라 변화하므로 실제 그 의미는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예컨대 국가주의 정치 문화의 영향력이 강한 사회에서는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의 경향조차도 좌익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정치 문화의 영향력이 강한 사회에서는 우익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동일한 정치사상이나 정치세력 내부에서도 다시 좌우의 구분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좌익 정치세력으로 분류되는 사회주의 정당 내부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를 각각 좌파와 우파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처럼 좌익과 우익은 진보와 보수처럼 그 구별이 명확히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여 쓰이는 상대적 개념이며, 중도좌파, 극좌파 등으로 더욱 세분화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역사적·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각 정치세력의 사상적 기준과 이해 관계에 따라 좌익의 개념은 다른 의미로 쓰여왔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분단국가라는 현실 때문에 좌익이라는 말이 그 실질 내용과 무관하게 국민 대다수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특징을 보여 왔다. 반공주의와 개발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었던 군사정권 시대에서는 대립된 모든 정치사상과 세력, 집단운동을 좌익으로 분류하며 탄압했다. 뚜렷한 정치사상적 지향을 지니지 않은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의 생존권 요구나 종교기관의 온정적 개입, 노동조합이나 협동조합 등 다양한 사회운동, 민주화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적인 정당 활동 등도 모두 좌익으로 낙인찍혔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정치사상의 분화가 뚜렷해지면서 우익 사회운동과 시민운동도 등장해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사회운동 자체를 좌익으로 여기는 기존의 권위주의적 인식이 통용될 근거가 사라졌으며, 좌익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어느 정도 약화되었다. 하지만 전쟁과 분단을 거치며 형성된 특수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여전히 좌익이라는 말에 대한 반감이 사회 안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일부 정치세력이 이를 이용해 자신과 대립되는 세력과 주장을 그 실질적인 내용과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좌익이라고 몰아붙이는 현실이 되풀이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좌익이라는 개념은 그 정치사상의 고유한 내용과 특질에 따라 쓰이기보다는 국가나 정권의 지배이념과 정책을 반대하고 대립되는 일체의 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모호하게 사용되는 경향이 크다. 


[출처] 좌익 | 두산백과


첫째 단락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좌/우의 구별이 매우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사전적 설명에 따르면 그 상대성은 해당 사회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곧,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좌/우는 개인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예컨대 속 알맹이는 보수적인 사람이 자신을 좌파라고 스스로 선언한다고 그가 좌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보기에도 자명한 이런 일이 내가 보기엔 상당히 자주 일어난다. 군비 확장이나 국가 주도적 경제를 옹호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좌파로 규정하는 일은 쓴웃음을 자아내기에 알맞다. "사회"라는 용어는 여전히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는 군비 확장과 국가 주도적 경제에 대한 옹호가 좌파에 속한 사람의 속성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째 단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치사상의 분화가 뚜렷해지면서 우익 사회운동과 시민운동도 등장해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사회운동 자체를 좌익으로 여기는 기존의 권위주의적 인식이 통용될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국가의 권위에 다소 간의 의심을 품고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국가의 의도에 찬성하며 국가가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진보"를 위해 행하는 모든 활동은, 내가 보기엔 우파적이다. 나는 이에 대해 어떠한 도덕적 가치의 우열도 두지 않는다. 우파이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든가 좌파이니까 옳다와 같은 도식은 무의미하다. 애초에 그 두 구분은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일군의 집단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둘째 단락에서는 한국의 특수성이 서술되어 있다. 한국의 특수성은 실상 한국이 스스로를 "분단 국가"라 부르는 데서 기인한다. 대한민국 혹은 남한에서 조선인민주의민주공화국 혹은 북한에 대한 입장은 국가관과 정치관을 판별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취급되어 왔다. 예컨대 "좌익 빨갱이"와 같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지만 아직까지도 통용되고 있는 용례에서 이러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매우 아쉬운 일이지만 내 생각에는 "노동" 혹은 재산에 대한 입장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북한 및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은 이 사회에서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을 규정짓는 근거가 돼 오곤 했다. 예컨대 북한에 찬성하지 않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볼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좌파 혹은 빨갱이라는 꼬리표는 따라 다니게 마련이다. 예컨대 나는 북한의 정권은 도덕적으로 매우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북한 문제는 감정적으로 대응해선 안 되고 보다 냉정한 판단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고 여긴다. 북한 문제는 단순히 누가 더 강한 무기를 가지고 먼저 상대의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입장 역시 충분히 우파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저 서술 어디에도 국가와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와 같은 입장은 종종 "좌익 빨갱이"라는 이름을 뒤집어 쓰곤 한다. 그런 이들에게 "빨갱이"로 낙익 찍히지 않기 위해서는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성을 잃고 공격적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한국 역사의 특수성은 분단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십 년에 이르는 독재가 있었고 몇 번의 계엄령도 있었다. 나는 최근 두려움을 느낀다. 독재자의 자식이 나라를 이끌고 있다. 그 사실 자체가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독재자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상 연좌제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다만 같은 의미에서 독재자의 딸은 독재자로부터 아무 것도 물려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을 물려받고 과는 물려받지 않은 채로 독재와 그 시절의 발전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현 대통령의 모습은 심히 공포스럽다. 정확히는 현 대통령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파시즘적 향수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국가 주도의 사업에 찬성표를 던질 수는 있다. 그러나 왜 그 어떤 비판도 반동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놓으려는 것인가? 파시즘을 추억하는 것이 정말로 지금의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도움이 된다면 누구에게 되는 것인가? 파시즘을 추억하는 일련의 발화들은 사실상 그 뒤에 가려져 있는 배제되는 소수의 인권과 권익의 실현을 뒷전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지금 좌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파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다. 좌/우의 대립이 모호하더라도 어느 한쪽의 윤곽을 흐릿하게나마 그릴 수 있다면 다른 한쪽의 경계선을 그려 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소위 "강남좌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한글판 위키피디아에서는 강남 좌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강남좌파는 대한민국 사회의 진보적 이념, 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을 지닌 고학력, 고소득 계층을 지칭한다. 2005년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범여권 386세대 인사들의 자기모순적 행태를 비꼬는 말로 쓰면서 일부 학계와 언론계 등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범여권 386 인사들의 특성을 비꼬는 말이었지만 최근에는 신개념의 전문직, 문화계 종사자, 지식인 또는 고유한 특성을 가진 집단군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대되어 쓰이고 있다. 물론 의식과 물질이 따로 노는 이 같은 경향은 때때로 가진 자의 위선이나 허위의식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 양극화 방지', '인권', '평등개념' 등 이들의 의식적 진보성이 많은 사회운동과 변혁의 동인이 돼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강남좌파"란 표현은 "좌파"에 대한 하나의 합의점을 반영하는 넌센스적 용어다. 고학력, 고소득 계층이 좌파적 인식을 갖는 것은 어째서 위선이나 허위의식이 되는가? 이는 좌파의 구성을 경제적 영역에서만 도출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정말로 좌/우의 경계는 경제라는 하나의 잣대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일까? 경제가 좌/우를 신분처럼 고정된 것으로 산출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경제 자체를 보다 기준이자 고정점으로, 경합에서 초월적인 기본항으로 고양시키는 활동이나 다름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못 가진 자만으로 구성된 "좌파"가 어떻게 우파를 전복시키고 권력을 얻을 수 있는가? 총파업, 총체적 혁명의 가능성은 이미 30년 전부터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설득력 있는 작업을 보라[각주:1]). "좌파"는 연합해야 한다. 현대사회의 구조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혁명도 불가능하다. 이는 분명히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을 일단, 지금, 먼저 시도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실천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좌파의 흐릿한 윤곽선을 그리고 있다. 좌파는 사회적 함의를 갖는 집단이며, 고정되어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유하지도 않은 채 닻을 내리고 서 있는 배와 같다. 이 배에 승선할 자격은 제한되어선 안 된다. "좌파"는 열려 있는 집단이어야 하고 끊임 없이 그 틀 내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실천하고 고정되고 고착되려는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동," "재산" 혹은 "사회주의"와 같은 도그마적 틀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매우 여유로운 행동이고 이상주의에 도취된 게으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난 나 자신을 좌파라고 부르지 않고, 부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좌파가 가져야 하는 절박함, 변화에 대한 열망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의 선장은 의제에 따라 가장 적합한 이가 맡아야 한다. 그리고 배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든 선원의 참여가 필요하다. 배가 움직이면 좌파를 일시적으로 고정시켰던 닻도 같이 움직이게 되며, 이전과는 다른 영역에 새로이 닻을 내리게 될 것이다. 진정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섞여 들어가는 것은 이 배를 이끄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요컨대,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실례가 될 뿐이다. 사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좌파임을 자신할 수 없다. 다만 때때로 좌파적일 뿐이다. 경우에 따라서 이 "때"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고, 아주 일부일 수도 있다. 나 역시 나와 관련된 특정 부분에서는 "좌파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까진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는 일종의 비어있는 기표가 되어야 하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경합들을 조율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변화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좌파"가 마치 자동인형같다. 어느 정도는 옳다. 하지만 그 태엽을 돌리는 것은 어찌 됐든 인간이다. "좌파"라는 자동 인형의 작동을 위한 동력원은 단순히 결핍과 결핍 해소에 대한 욕구로 환원하는 것은 지나친 이상주의다. 우리는 이를 위한 시스템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 어떤 시스템도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의 절박한 시도로서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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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서술은 아니지만 대충 하고 싶은 말이 정리된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내 생각은 순전히 생각에 불과하고 매우 이상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인 게 사실이다. 좌파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일종의 믿음이고 바람이다. 내가 어떤 기회를 만나거나 스스로의 삶에서 기회를 만들 수 있게 될지는 알 수 없겠으나 난 적어도 이 믿음을 스스로 배반하고 싶지는 않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저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지음
출판사
후마니타스 | 2012-05-0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대표 이론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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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clau, Ernesto & Chantal Mouffe (1985; 2001), Hegemony & Socialist Strategy: Towards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 London and New York: Verso. 이승원 역 (2012),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서울: 후마니타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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