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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herimo 2013. 4. 27. 18:23

라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오늘은 오랜만에 정신분석학 쪽 얘기를 조금 할까 한다. 이 생각을 촉발시켜 준 글은 이 글이다


이 글은 딜런 에반스라는 사람이 자신이 왜 라캉주의자(Lacanian)에서 진화심리학자로 전직을 했는지를 설명하는데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라캉의 이론이 "과학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딜런 에반스는 "라캉 정신분석 사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을 정도로 라캉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는데 이런 식의 전향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떻게 보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내가 그의 "정신분석 사전"을 산 것은 알라딘 강남점이었는데 마침 심리학을 연구하고 있는 선배와 함께 였다.


나 역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라캉에 대한 글들을 꽤 여러 편 읽었고(거꾸로 말하자면 라캉이 직접 쓴 글은 거의 읽지 않았다. 조금 격하게 말하자면 "그럼 번역 좀 제대로 하든가?" 정도의 심정에 가깝지만. 그래서 Ecrits는 영어 완역본을 사두긴 했는데 장소과 공간의 한계로 인해 아직 손을 못 댔다), 그 이론이 대단히 매력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의 이론이 영화와 문학 비평에 있어서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나는 정확히 그의 이론이 아주 광범위한 의미의 "철학"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철학을 배운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말이 대단히 무례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사상"이라든가 "인문학", "비평 이론" 등의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도 큰 주저함은 없다. 다만 "철학"이라는 단어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과학"에 대비되는 학문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으며 인문학이라는 보다 넓은 외연을 갖는 말보다는 조금 더 적확하게 대상을 지칭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흔히 문사철, 문사철할 때의 "철"을 말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여기서 나타나는 큰 문제는 라캉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을 "철학"이 아니라 일종의 심리학이고 심리 치료법으로 봤다는 점에 있을 것 같다. 에반스의 지적은 내가 알기로도 매우 타당하다. "라캉은 오직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해설하기 위해서만 문학을 기용하며, 문학만을 그 대상으로 삼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에반스의 행동에서 우스운 것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이다.


1) 에반스는 라캉주의자들을 라캉의 추종자들이며 스승(Master)이 어떤 말을 했는지만 좇는 이들로 묘사하고 있지만 막상 라캉의 원래 의도했던 의미에 가장 몰두하고 있는 이는 에반스 본인이 아닌가? 라캉이 말한 바가 현대 심리학/의학적 관점에서 틀렸다고 해서 그것의 비평 이론으로서의 잠재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문학 분과에서 라캉을 이용하면 "안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단순히 "라캉은 원래 그런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는 이유 외에?


2) 결과적으로 그가 속하게 된 학제가 "진화심리학"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난 진화심리학에 별로 우호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난 그 학문을 잘 모르지만 적어도 진화심리학의 "가설"들이 무척이나 비과학적 전제들에 의존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예컨대 왜 우리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이러이러하다'는 류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검증해볼 만한 전제로 삼는가? 그럼 '여성'과 '남성'이라는 범주는 얼마나 타당한가? 그리고 이 두 가지 변인이 그렇게 대단한 차이를 유발한다는 것이 정말 생물학적, 의학적, 심리학적 지식에 의해서 이미 증명된 것인가?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알고 있다. 에반스라는 사람이 어떤 종류의 "진리"를 얻어르녀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진화심리학을 진리라고 여기는 점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정신분석학의 위치와 자리매김이 중요해지는 것 같다. 일단, 난 라캉이 의도했던 것처럼 그의 이론을 심리학적 치료에만 국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반대하고 싶다. 그것이 라캉에 대한 모독이라면 나는 라캉을 모독하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난 적어도 라캉이 그것을 의도했다는 것 외에 그러면 안 되는 이유를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물론, 여기서 정말로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긴 하다).


동시에 정신분석학이 정말로 심리학적인 분과가 되고자 한다면 심리학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사례 연구와 실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러한 과정이 적절하게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분석학을 심리학이며 이것을 치료에 큰 손질 없이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이야기하긴 어렵다는 생각. 하지만 이 부분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실제로 실험적으로 적용하는 정도까진 가능한 것 같기도 하다. 이 기사에서는 의학을 포함한 다른 과학적 분과학에 종사하는 교수들이 라캉에게서 어떤 영감을 받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영감을 얻는 수준과 그것이 완전히 "과학"의 모습으로 손질하는 것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부분은 내가 한의학과 의학의 관계에 대해 하고 있는 생각과 유사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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