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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섹스, 운명 본문
마법, 섹스, 운명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에 대하여
스포일러가 매우 많으므로 9화까지 보지 않은 분은 열어 보지 마세요.
시작은 마법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2020)는 같은 제목의 만화책을 원작으로 하여 테레비 도쿄(テレビ東京, TV TOKYO)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최근 한국, 대만, 일본의 하위문화 중 이른바 'Boys' Love'를 애호하는 시청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제목에 들어가 있는 '마법'이라는 중심 요소는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된다'는 널리 퍼진 농담에 착안한 것이다. 30살까지 동정을 탈출하지 못한 아다치 키요시(安達清, 赤楚衛二 扮)는 30살이 된 첫날부터 접촉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된다. 이 능력은 접촉한 순간 무조건적으로 발휘되며 아다치는 능력의 발동 여부를 통제할 수 없다. 다른 이들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아다치는 사람들과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방식을 생활 방식을 바꾼다. 그러나 대도시 도쿄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고 그의 노력이 늘 성공하지는 못한다. 아다치는 출근길에 회사의 에이스이자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받는 쿠로사와 유이치(黒沢優一, 町田啓太 扮)를 만난다. 아다치는 30살까지 동정을 잃지 못한 자신이 인기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과 쿠로사와를 대척점에 둔다. 즉, 아다치는 "동기라는 사실과 성별"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쿠로사와를 자신과는 아예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인물로 취급한다. 그런데 만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원치 않게 그의 마음을 읽어버린 결과 그런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에 등장할 만한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약간의 위기를 겪지만 두 사람은 결국 사귀는 데 성공하여 서로를 도와주는 행복하고 건실한 커플이 된다.

그 다음은 섹스?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두 사람이 남자라는 점을 빼고 보면 지나치게 평범하다. 심지어 둘 중 하나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까지 어디선가 본 거 같은 이야기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 드라마의 평범한 (보기에 따라서는 진부하기까지도 한) 스토리는 원작과 비교할 때 더 두드러진다. 제작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코믹스는 BL 장르에서도 영상매체에 비해 더 여러 가지 시도를 해 왔고, 이제 코믹스에서도 이런 오래된 이야기 구조로 인기를 끌기는 어렵다. 코믹스 판이 택한 해법은 두 주인공을 지나치게 멋있지 않은 캐릭터로 설정하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의외의 흐름을 즐기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예컨대 원작의 아다치는 능력이 생겼을 때 능력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동정을 잃기 위해 성매매 업소를 방문해보기도 한다. 드라마 판의 아다치는 그런 해법을 생각하지 않는, 어느 정도 현실성이 탈각된 인물로 그려진다. 쿠로사와는 원작 코믹스에서도 꽤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드라마에는 개인 서사가 덧붙여지면서 좀더 다정하고 결점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두 캐릭터를 이상화하는 이런 번안이 이 드라마가 지닌 독특한 매력의 핵심이다. 드라마는 조심스럽게 살펴보지 않으면 이 드라마는 큰 굴곡 없는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의 정석을 제시한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것이 연애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그런 마음이 통하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믿음이 확인된다(7회).

이 사랑을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조건은 BL, 로맨스, 판타지 장르의 문법 속에 숨겨져 있기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려면 두 사람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어야 하고 이것은 두 사람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쿠로사와가 7년 간 짝사랑을 할 수 있으려면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안정적인 일터와 소득이 깨지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한다. 반면, 연애의 물적 조건이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같은 드라마 안에서 츠게와 미나토의 연애가 주인공 커플에 비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츠게와 미나토는 쿠로사와와 아다치처럼 매일매일 만날 수 없다. 츠게가 미나토를 만나려면 계속해서 택배를 주문해야 한다. 츠게는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미나토와 겨우 친해지지만 그 이후에도 일부러 미나토를 보러 가지 않으면 만남이 이뤄질 수 없다(8화). 만난 지 몇 달이 되지 않았는데도 금방 섹스까지 진도를 뺄 만큼 두 사람의 연애 속도는 빠른 편인데 이 속도는 만남이 절박한 정도에 비례한다(9화). (작품 외적으로는 당연히 이들에게 할애된 시간이 더 적어서 그런 것이지만, 그 모든 상황 속에서 결실을 맺는 서사의 흐름을 그 나름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반해, 아다치와 쿠로사와 사이의 관계는 섹스까지 이뤄질 가속도를 얻기가 힘들다.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알고 지냈고 그런 사이에서 섹스는 더 부끄럽거니와 새삼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물론 작품 외적으로 두 사람이 섹스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아마도 이 드라마의 종장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 외적 맥락을 작품 자체의 맥락과 더불어 읽을 때 섹스가 연애의 마지막 단계, 적어도 연애의 한 단락을 매듭짓기 위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이게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섹스가 연애의 한 단면을 마무리하는 위치에 놓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섹스로 관계를 시작하기가 쉽고 오히려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을 더 어려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아다치와 쿠로사와의 관계 맺기는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그들은 직장을 통해 경제적 토대를 이미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고, 오랫동안 (서로 일방적으로) 쌓아 온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제 여기에 애정이라는 요소가 덧대져 있다. 여기에 섹스를 지연시키는 플롯까지 포함하면 이 드라마에 빅토리아 시대 가정소설에 등장할 법한 사회적 보수주의의 그림자가 수 백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드리워져 있는 것 같다. 이 작품이 평범하고 뻔한 연애담을 동성애라는 주제로 특별히 소비할 만한 것으로 만들 듯 (쁘띠)부르주아적 섹슈얼리티 관념이 동성애를 통해 정당화된다. 사실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랐으나 얻지 못한 순수한 사랑을 표상하기에 이른다. 삽입 섹스를 하지 않는 남성 사이의 이상화된 사랑에 반영된 순수함에 관한 뒤틀린 환상은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를 떠올리게 할 만큼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드라마가 섹스를 배치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낡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가 주는 쾌감이 문화 상품 속에서 길들여진 보수적 남성 동성애 서사 속에 담긴 (우리가 포기해야 했던) 이성애규범적 문화를 끈질기게 갈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드라마 수용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축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작품에서 급진적 가능성을 읽어내려면 이 작품의 뚜렷한 한계를 언급하는 것이 더 적절한 시작점을 마련해준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다소 때맞지 않아 보이는 이 서사에는 섹스를 뒤로 미뤄둠으로써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지점이 있다.
아다치가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된 후에 그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속으로 말하는 사람을 두 명 발견한다. 한 명은 쿠로사와고, 다른 한 명은 후지사키 노조미(藤崎希, 佐藤玲 扮)다. 후지사키는 결혼 적령기의 끄트머리에 걸친 나이인지 계속해서 결혼하라는 가족의 압박에 시달린다. 이 상황에서 다른 여사원들이 아다치에게 가짜 남자친구 행세를 해주면 어떻겠냐는 기묘한 제안을 한다. 아다치는 후지사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투로 생각하는 것을 의도치 않게 읽어버리고 자신에게 두 개의 길이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후지사키 같은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이성애 커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예기치 않게 아다치가 자신과 쿠로사와 사이의 관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이야기는 한 발 더 나아가 상황을 좀더 흥미롭게 만든다. 드라마의 후지사키는 원작의 후지사키와 달리 자신이 연애에 관심이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드라마의 후지사키에게 아다치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보거나 자신에게 성적 규범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사람인지 관심을 갖고 보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이 시점에서 그 자신에게도 확정되지 않은 아다치의 섹슈얼리티는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던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다. 만약 아다치와 후지사키가 이어진다면 아다치는 완전히 결정되지 않고 남아있는 쿠로사와에 대한 동성애적 애정을 간직한 채로 섹스나 연애를 하지 않는 모종의 연대를 그려냈을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닫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에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관계와 애정의 형태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물론 사회적 압력이나 변화하는 관계성에 의해 규범적 이성애로 선회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두 사람의 관계는 외견상 이성애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성애자로 보이는 것은 후지사키의 동료 여사원들이 제안한 것처럼 '행세'고 '시늉'이다. 외견상의 이성애 속에서 후지사키는 이성애적 관계 속에 놓인 여성처럼 보임으로써 여성이 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아다치는 이성애적 관계 속에 놓인 남성처럼 보임으로써 자신의 동성애를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은폐할 수 있다. 이 계약은 두 사람 모두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이고, 이 선택지가 매력적인 만큼 쿠로사와는 (아다치가 후지사키 같은 사람을 좋아할 것이라는 착각과 뒤섞인) 조바심을 느낀다. 이것이 이 드라마가 섹스의 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조명하는 첫 번째 차원이다. 즉 섹슈얼리티는 결정되지 않고 흔들릴 수 있고, 결정된 것처럼 보일 때에도 다른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다. 이 차원을 섹슈얼리티의 결정불가능성이라고 대충 이름 붙여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이 드라마에서 섹스의 지연이 조명하는 두 번째 차원은 섹슈얼리티가 고착되기도 하며, 이 고착 과정에서 개인의 결심은 중요하지만 그런 결심은 결코 그 사람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자기 자신을 게이라는 사회적 호명에 부착시키는 인물은 미나토밖에 없고, 쿠로사와, 아다치, 츠게의 섹슈얼리티는 모두 특정 시점에서는 불확실하다. 예컨대 쿠로사와가 자신의 외모를 보고 접근했던 여성들을 거절할 때 그 함의는 이중적이다. 쿠로사와는 자신을 성적으로 물화시키려는 태도에 저항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성애적 관계에 연루되는 것에 저항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저항이 얼마큼 성공적이었는지는 다뤄지지 않는다.) 둘 중 어떤 것이든 쿠로사와는 자신에게 덧씌워지는 사회적 틀에 저항한다. 이 점에서 쿠로사와는 후지사키와 크게 다른 인물은 아니다. 쿠로사와가 아다치에게 반하게 된 계기는 후지사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력을 모종의 사회적 카테고리로 환원하지 않고 온전히 평가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쿠로사와가 품어 온 7년의 짝사랑은 어떤 사회적 카테고리를 적용해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까? 쿠로사와는 언제 '게이'라는 사회적 카테고리에 포섭되는 것일까? 물론 그의 성적 욕망이 남성을 향해 있으며 그가 게이라는 생활 양식이 널리 알려진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는 게이라는 호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아다치를 향한 그의 망상이 순전히 섹스를 갈망하는 것을 넘어서 생활을 공유하는 내러티브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데 주목하면 쿠로사와의 섹슈얼리티에는 섹스를 덜어내도 남아 있는 것들이 많다. 그가 바라는 것들, 이를테면 식사나 잠자리 등 생활을 공유하는 것, 외면받지 않는 미래, 달콤함이나 안온함, 인정 따위가 그런 잔여물로서 제멋대로 뒤섞여 있다. 쿠로사와가 자신의 로맨스를 조금씩 실현할 때마다 아다치는 그가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음을 읽는다. 표면상 아다치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거나 위협했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표하는 것이지만, 쿠로사와가 미안해지는 좀더 근본적인 이유를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쿠로사와가 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여러 가지 희망과 갈급함으로 얼룩져 상대방을 상처 입힐 수도 있는 애정 속에 아다치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쿠로사와의 사랑은 모순적이다. 그는 아다치가 자신과 함께 행복하길 바라지만 그것이 실현되려면 아다치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그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특권적인 것으로 결정하거나 그렇게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삭제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운명은 신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이자 속박이다. 두 사람이 운명적 사랑을 이뤄낸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마음대로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감행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어찌됐든 게이라는 호명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쿠로사와의 사과는 자신을 틀 바깥에서 봐줬던 사람을 다시 어떤 틀 속에 가두려는 이기심에 대한 사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로 아다치가 자신도 쿠로사와를 좋아한다면서 그의 고백을 받아주고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이 녀석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 마법사가 된 걸지도 몰라"(7회)라고 말하는 순간을 꼽는다. 여러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마음을 읽는 능력의 의미가 이 순간에 쿠로사와와의 관계를 맺기 위한 것으로 규정된다. 폭력과 완전히 유리되지 못했던 애정은 상처를 감내하기로 하는 결심 속에서 호혜적인 안온함으로 전환된다. 사랑을 운명과 접붙이는 이 수행문을 통해서 쿠로사와의 애정은 더 이상 미안한 것이 아니게 되고, 아다치는 결정하지 않기를 포기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서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선언하는 아다치의 행위가 순전히 그의 의지에 따르는 행동은 아니다. 그는 다시 예전처럼 되돌아가자는 쿠로사와의 말을 곱씹어보다 자신에게 그의 생각이나 말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상대에게 달려간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람이 서로의 애정을 소화하는 방식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고 그것이 고백을 위해 선택한 단어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은 결과의 또 다른 이름인가?
아다치의 마법이 정말로 운명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인지 논의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다치는 서른까지 동정을 지켜(?)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그리고 타인의 솔직함이 그에게 작은 상처를 입히기 때문에 사람을 피할 방법은 강구한다. 전자화폐를 쓰고 러시아워를 피하고 붐비는 엘리베이터에도 타지 않는다. 이런 자구책은 그가 이십대까지 살아온 방식의 연장선에 위치한다. 하지만 롯카쿠(六角祐太, 草川拓弥 扮)의 말처럼(5회) 아다치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예민함을 함의한다. 마법사들이 더 이상 둔한 척 남아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법의 핵심이다. 아다치가 쿠로사와의 마음을 읽을 때마다 계속 되뇌는 것처럼 알고 있음에도 둔한 채로 남아 있는 건 도망가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아다치는 더 이상 도망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너무 늦지 않기 위해 달려가고 말한 적 없던 자기 마음을 두서 없이 토해낸다. 그리고 서로를 껴안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쿠로사와의 감정이 아다치에게 흘러들어 올 때 이 능력이 처음 주어졌을 때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타인이 마음 속에 품은 무심한 날카로움에 상처 입고 멀어졌던 아다치는 쿠로사와의 진심에 얽혀 그와 가까워지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읽는' 능력은 단순히 읽어내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읽어버린 마음을 읽는 이의 마음 속에 재현하는 작용을 수반한다. 그리고 읽는 이는 읽음을 통해 읽어진 것을 배워 반복할 수 있게 된다. 쿠로사와가 아다치를 믿어주었기 때문에 아다치도 쿠로사와를 믿을 수 있는 것이고, 쿠로사와가 아다치와 가까워지려는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아다치가 쿠로사와에게 달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다치의 마법은 이런 결과를 (아다치의 선언과 달리) 필연적으로 가리키고 있지 않다. 분명히, 상대의 생각을 삼키고 우물거리고 뱉고 되삼키기를 반복하는 유희는 어떤 면에서는 섹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짜릿한 것이다. 하지만 섹스가 이런 능력을 다시 앗아간다는 사실은 다른 종류의 관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확고한 틀에 의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는 상태, 안온함과 불안, 고통과 쾌감이 뚜렷하게 나눠지지 않는 부딪힘, 부족이나 만족을 객관적으로 잴 수 없는 '몸'이 감각을 체험하고 교류하는 새로운 장이 된다. 더 이상 확신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도 과거와 미래를 모조리 현재의 상태를 이어나가기 위해 희생시킬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사랑을 운명이라고 선언하는 서툰 믿음에 다시 한 번 속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신이 불안으로 인해 길을 잃고, 미래가 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것'임이 드러날 때, 곧 현재의 사랑이 끝까지 이어질 수 없다는 가능성이 뚜렷해질 때, 두 사람의 관계가 계속 변해 왔었고 앞으로도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실은 마법이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마련된, 확실성을 보증하는 장치라기보다는, 그 반대로 불확실함이 어떤 노력을 통해서도 지울 수 없는 삶의 조건임을 부각하기 위해 주어진 불안의 뒷면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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