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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세계—사랑을 숨 쉬기

herimo 2020. 4. 18. 21:55

* 이 글은 〈부부의 세계〉에 대한 스포일러 및 폭력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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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애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부부의 세계〉(2020, 모완일 연출, 주현 극본, 김희애 주연)는 방영과 함께 화제가 됐다.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의 선정성에 주목했다(6회까지 19금 판정을 받았다). 불륜이라는 소재 때문만은 아니다. 불륜은 한국에서 새롭지 않은 소재다. 이 드라마가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소재를 파고들어 조명하는 방식 때문이다. 일부러 부부의 정사 장면을 긴 시간 보여주기도 하고 폭력적인 장면도 다소 과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불륜을 다루는 드라마에 거는 기대가 있다. ‘올바른’ 관계와 ‘그릇된’ 관계를 구분할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예컨대, 아직도 인터넷에서 자주 회자되는 〈내 남자의 여자〉[2007]의 인물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긴 하지만 이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부의 세계〉는 이런 기대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주인공 김희애의 흡인력 있는 연기 때문에 부지불식 간에 공감해버리기 쉽지만 선우는 올바른 사랑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관계를 통제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과 영향력을 통해 위력을 행사하며, 효과적인 복수를 위해서라면 외도를 감행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들이 ‘정말로’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적어도 부부 관계를 규율하는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와 그 주인공인 지선우가 사랑의 올바른 용례를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입장을 대변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이 드라마에는 사랑에 대한 규범적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다경(한소희 분)의 사랑은 순수해 보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선우에게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불러올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때리는 남자친구 인규(이학주 분)를 “꼭 괜찮은 남자로 만들 거예요”라며 감싸는 민현서(심은우 분)의 사랑은 자기 파괴적이다. 옆집 부부 고예림(박선영 분)과 손제혁(김영민 분)의 사랑은 서로 어긋나있다. 예림은 제혁의 사랑을 얻길 포기하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소실되었더라도 둘의 인연을 나타내는 최후의 보증물, 즉 아이를 낳을 것을 제안한다. 제혁은 그제야 자신이 한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다는 것을 자신의 부족한 점으로 받아들이고 아이 낳기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 가정에 헌신할 것을 약속한다. 예림과 제혁의 사랑은 형식적으로는 서로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결론을 피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소진한다. 실제로, 아이는 선우와 태오(박해준 분)에게 일종의 족쇄로 작용한다. 준영(전진서 분)은 선우와 거의 같은 시점의 아빠 태오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되지만 엄마 선우에게 이혼은 싫다는 의사를 전한다. 태오는 준영을 사랑했기 때문에 선우의 연극에 넘어가 도를 넘어선 폭력을 행사하고 이 폭력은 세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더욱이, 이 세계에서는 이성애 커플 및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의 우정 역시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은 방향으로 흔들린다. 이성 파트너와 마찬가지로 친구 사이에서도 진실을 기대하긴 어렵다. 선우는 명숙에게 그녀가 자신의 친구라면 태도를 확실히 하라고 말한다. 예림에게는 자신은 진실을 숨기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녀가 마주 하고 싶지 않은 진실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복수를 완수한다.

이 드라마에서 연인, 자식, 부모, 친구, 그 대상이 누가 되었든 올바른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즉, 이 드라마는 올바른 사랑을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사랑이 어긋나는 순간들이야말로 이 드라마가 가장 열성적으로 조명하는 피사체이다. 종종 주인공 선우와 태오의 로맨틱한 과거 이야기가 프롤로그처럼 곁들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장면에 바로 이어서 외도와 불륜 사실을 숨기려는 남편과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의 정보 우위를 이용해 가장 잔인하게 복수하려는 아내의 모습을 본다. 이 차이를 비추는 시선이 예리할수록, 이 차이를 드러내는 서사가 폭력적일수록 더 자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진다. 나는 이 드라마가 관계를 비출 때 불현듯 튀어나오는 서늘함과 잔인함, 킬킬거리는 비웃음 따위에 죄스런 쾌감을 느끼곤 한다. 이 드라마가 비추는 대상은 무엇보다도 사랑이다. 부부를 다루는 드라마이기에 이성애 커플 간 사랑과 애정, 집착이 일차적으로 다뤄지고, 그 부부의 미래를 상징하는 자녀에 대한 그들의 사랑 역시 충분히 다뤄진다. 그리고 ‘세계’라는 말이 환기하듯, 이들을 감싸고 있는 세계가 때로는 부드럽지만 돌연 쓰라린 현실로 변모하는 일 역시 잘 다루고 있다. 친구의 걱정이 그네들의 시기, 질투, 집착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좀 더 넓게는 타인이 나를 얼마나 진실하게 대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다. 1회의 마지막 선우의 내레이션은 이 믿을 수 없는 세계를 정확히 겨냥한다. “모든 게 완벽했다. 나를 둘러싼 모두가 완벽하게 나를 속이고 있었다”(1회, 강조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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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세계에서 숨을 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숨 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숨은 내가 나의 바깥과 교류하지 않고서는 잠시 존속하기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선우는 큰 충격을 받을 때마다 숨을 쉬기 어려워한다. 과호흡은 그녀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복수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 세계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이 자기 자신을 숨 막히게 한다면 이 세계를 깨부수고 자신이 숨 쉴 수 있는 세계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정당방위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선우가 자신을 숨 쉴 수 없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은 어렵다. 선우의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은 태오의 외도가 정당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일깨운다. 선우의 시어미니(정재순 분)는 선우를 나무란다. “바늘 끝 하나 안 들어가는 너랑 사느라 내 아들도 고단했다. 태오가 오죽했으면 그래, 네가 숨 쉴 틈만 줬어도 딴눈 안 팔았어….”(3회, 강조 추가) 선우는 이 질책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반박하지는 않는다. 그저 복수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준영의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입장을 번복하지 않은 채 자신의 복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니 죽지 말고 똑똑히 지켜보라는 협박을 남기고 면회를 마칠 뿐이다.

선우의 협박이 시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줬는지, 그 충격이 다음 날 들려온 시어머니의 죽음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선우의 복수가 그녀의 계획을 항상 넘어서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선우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을 긁어모으지만 생각보다 의존할 만한 사람이 없다. 현서의 남자친구인 인규를 협박하면서 내뱉은 자신의 자원, 이를테면 종합병원 부원장이라는 직위, 지역 의사회나 지자체장을 동원할 수 있는 인맥 등은 자신의 삶에 돌출한 남편의 불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럴듯한 사회경제적 네트워크 사이에서 얻고 개인적으로 가꿔온 인연들 역시 자신을 속여 왔음을 깨달은 이후라면 더더욱 그렇다. 오히려, 이들은 은연중에 다른 선택지가 더 합리적이지 않냐고 선우를 다그치는 것처럼 보인다. 지역 유지의 아내(서이숙 분)는 선우의 진료를 받고 자신이 성병에 걸렸고, 감염은 남편의 외도를 가리키는 증거라는 사실을 들었는데도 이혼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깟, 여자랑 한 번 놀아난 거 용서하고 말 게 뭐 있겠어요? 남자한테 섹스, 배설 같은 거잖아요. 지금의 그 남자를 있게 만든 건 나예요. 배경, 재력, 하다못해 성격까지. 이혼으로 지난 세월 동안 쏟아부은 내 정성을 허공에 날리기 싫어요.” 이 말은 자신의 삶을 완벽한 모습으로 가꾸는 데 큰 공을 들여온 선우로서는 단번에 반박하기 어려운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획득한 선우가 이 숨 막히는 네트워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이자 가장 마음 편히 의존할 수 있는 상대는 자신의 환자이자 남자친구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현서다. 물론, 현서는 연민과 연대 의식, 실리 계산이 어우러진 판단을 바탕으로 선우를 성실하게 도와주지만, 선우는 그녀를 구하는 과정에서 악연을 맺게 된 인규의 예측할 수 없는 폭력과 협박에 시달리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준영의 친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현서의 도움은 불리한 정황으로 되돌아온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헐떡거리는 숨을 타고 억눌러두었던 과거의 트라우마도 흘러들어온다.

 

그리고 선우는 자신의 사랑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준영을 말 그대로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다. 선우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내기를 하는 셈이다. 준영이 엄마와 함께 살기를 선택한다면 자신의 겪어온 과거의 고통이 이제 희미해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지금 맞닥뜨린 태오와의 투쟁에서도 이길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그녀에게 가장 확실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준영은 선우를 선택하지 않는다. 준영은 자신과 같이 놀아준 사람은 항상 아빠였고, 아빠가 엄마를 배신했을지는 몰라도 자신을 배신하진 않았다면서 둘 중 한 사람을 고르라면 아빠를 고를 것이라고 말한다. 이 순간 선우는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상대로 하는 도박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복구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그녀는 그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남아있는 조건을 긁어모으고 아들에 대한 태오의 사랑을 자신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시키고, 이를 준영이 목격함으로써 양육권과 친권 소송에서 승리하지만 준영과의 관계에는 메울 수 없는 골이 파인다.

 


세계를 바꾸려던 선우의 투쟁이 이렇게 그녀가 예측하지 못했던 과잉으로 인해 어그러지면서 선우는 자신이 숨 쉴 수 있는 아주 좁은 공간에 만족하기로 한 것 같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인연(신경정신과전문의인 윤기)과도 거리를 두고, 서먹해진 이웃사촌 예림과 제혁과도 까끌한 관계를 유지한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이 집에 대한 준영의 애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선우 자신도 겨우 숨 쉴 틈을 만들어낸 환경을 완전히 바꿀 여력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한때 자신을 속였고 삶을 위협했던 세계에 힘겹게 끼어들어 겨우 맞춰둔 관계의 농도와 밀도, 그곳에서만 숨 쉴 수 있는 연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함께한 시간들은 뭐였으며, 그토록 서로를 잔인하게 몰아붙인 건 뭐였을까? 사랑해서? 미워해서? 결국은 인간이라서?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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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에게 사랑을 전하는 통로를 독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여태까지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선우가 택한 생존 방식일 수 있다는 인식을 통해 다시 다경, 태오, 제혁의 선택을 바라보면 이들이 살아가고 도망치려 하지만 결국 적응하고 마는 세계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다경은 부모가 미리 만들어둔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들이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사랑을 선택한다. 태오는 선우와 다경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모두 진심이며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제혁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하나로 고정하고 그 관계에 깊이와 무게를 더하는 데 거부감을 느낀다.

선우가 사랑을 활용하는 모습과 이 세 사람의 사랑에 대한 태도를 견주어 보면, 의외로 선우가 가장 보수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만큼 세 사람이 사랑을 활용하는 방식은 꽤 급진적이다. 예컨대 다경을 감정의 자유를 논하면서 결혼 제도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로, 태오를 사랑을 소유할 수 있다는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폴리아모리스트로, 제혁을 로맨스 플롯과 결혼 플롯을 견디지 못하는 에이로맨틱 폴리섹슈얼로 읽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아들에 대한 선우의 사랑을 부르주아 가족의 재생산일 뿐이라고 일축한다면 선우와 대립하는 세 사람이 사랑을 활용하는 방식을 비판하려면 이들이 결혼이라는 ‘숭고’한 제도를 깨버렸기 때문일 뿐이라는 반동적 옹호만 남을 것이다. 혹은, 이들은 단순히 때를 잘못 만난 것일 뿐이고 이들의 사랑을 억압하는 사회가 나쁜 것이라는 과감하지만 설득력 없는 결론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극단적인 만큼 동의하기 어려운 두 가지 결론을 피하려면 이혼 이후 선우의 삶을 공정하게 읽으려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그녀는 물론 중산층의 계급과 지역사회에서 한몫하고 있는 자신의 지위를 준영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재생산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그녀의 삶이 이렇게만 요약할 수는 없다. 선우는 계층 재생산이나 모자간의 사랑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이라는 자신의 환경 속에서 되풀이하면서 낯선 상황을 수없이 마주치고 홀로 그 상황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세 사람의 사랑은 일견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각각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에 힘을 싣는 길을 따라간다. 다경은 혼자서라도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고 결심한 듯 보이지만 결국 태오와 재혼을 원하고 그것을 이뤄낸다. 태오는 선우와 다경은 물론 선우의 지분이 상당 부분 들어가 있는 자신의 지위나 재산, 준영에 대한 친권 등 결혼으로 인해 발생한 자신의 이권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고 포기하기를 거부한다. 제혁은 결혼 파트너를 배신하고 결혼이라는 계약의 조건을 위배하는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어느 정도) 도착적인 성욕의 기반으로 삼는다. 곧, 세 사람이 사랑과 결혼에 깃든 모노가미와 모노아모리라는 규범에 저항하는 것은 또다시 ‘어떤 일이 있어도 존속할 수 있고, 존속해야 한다’는, 결혼 제도의 가장 규범적인 담론 중 하나에 의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결국, 나에게 〈부부의 세계〉가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이 드라마가 어느 한 사람을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두었다는 사실을 짚을 것이다. 관객으로서 나는 이런 자리 잡을 수 없음을 실감하면서 사랑과 결혼 사이의 연계가 강고하면서도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감정과 관계를 소유물로 보는 것이 어째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내기에 뛰어드는 것인지 불현듯 일깨워지곤 한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교훈은 스펙터클한 섹스, 배신, 폭로와 폭력의 장면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스펙터클이 지나간 후에야 내뱉을 수 있는 한숨, 혹은 과호흡을 통해 전달된다. 아무튼 우리는 이 드라마를 본 후에 마치 ‘너 지금 숨 쉬고 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과 소유욕의 추악함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로부터 멀지 않은, 어쩌면 정확히 그러한 세계 속에서 살아 숨 쉰다는 사실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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