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영화관 어플을 살펴보니 2018년 9월 10일에 본 영화다. 글을 쓰는 지금은 10월 25일이니 한 달 반 정도가 지났다. 바빠서 적기를 놓친 셈인데, 그런 만큼 강렬한 인상들을 긁어모은 리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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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성철(최무성 분)의 시각에서 시작된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어느 방에서 한 학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고, 또래 학생들이 뒤따라 가는 광경을 목격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태인데, 장면이 바뀌고 조금 더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의 정보들이 차근차근 제시된다. 성철의 아들 은찬(이다윗 분)은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인인 미숙(김여진 분)과의 사이도 좋지 않아 보인다. 은찬의 사망보험금은 은찬이 다니던 학교에 장학 재단을 설립하는 것으로 쓰고자 한다. 사망보험금의 쓰임새에 대해서, 성철과 미숙은 비록 동등한 수준의 합의에 도달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아들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뜻만큼은 함께한다.
성철은 맨 첫 장면에 등장했던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소년, 기현(성유빈 분)을 만나러 간다. 기현은 성철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데, 성철은 기현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 기현이 자기 아들인 은찬이가 죽어가면서 구해준 친구이기 때문이다. 곧, 기현은 아들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사람이다. 기현이는 마지못해 치킨 집 배달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고, 성철은 기다린다. 이 장면에서 성철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아주 끈질긴 사람이다. 어느덧 기현의 배달 일이 끝나서 얘기를 좀 할 수 있게 되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기현이가 쓰던 가게 오토바이가 도둑 맞게 되고, (치킨 집 사장은 기현이가 거짓말을 해서 오토바이를 팔아넘겼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의심하니 더 이상 같이 일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기현이 돈을 물어줘야 하자 성철이 그 값을 대신 치른다. 이 장면에서 엿보이는 성철의 또 다른 면모는 목적이 생기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가장 빠른 길을 택하는 과감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이런 사정으로 기현은 성철에게 빚을 지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성철을 동행 삼아 귀갓길에 오른다. 기현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지만 그래도 묻는 말에는 대답한다.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집을 나가서 홀로 살고 있고, 돈이 필요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쓸만한 기술이나 지식은 없는 상태다. 성철은 자신의 일을 거들어 보라고 권한다. 다음날, 별 수가 없었는지 기현은 성철이 알려준 현장에 나와서 성철이 하는 일을 돕기 시작한다.
성철은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이고, 영화에는 주로 리모델링을 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리모델링을 위한 전반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전기 배선이라든가, 벽지를 바르는 일에도 능하고, 꼼꼼하고 깐깐하기로는 주변에 정평이 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와 친한 도배장이에게 기현이를 교육시켜보라고 하는데, 두 사람은 성격이 잘 맞지 않아 교육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기현은 성철이 직접 가르쳐주면 안 되느냐고 묻고, 성철은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한다.
이야기가 이쯤 진행됐을 때, 이 영화에서 중요한 마지막 인물, 미숙의 이야기가 좀 더 밀도 있게 그려지기 시작한다. 겨우 기력을 회복하고 인테리어 사무소에 간만에 일하러 온 미숙은 우연히 성철이 기현을 맡아서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분노한다. 미숙에게 기현은 자기 아들 은찬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이고, 성철에게 기현은 은찬이가 살려준 애다.
성철의 태도는 그가 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영화에서 줄곧 무언가를 고치는 사람이다. 남의 집을 고치기도 하지만, 끈질김과 과감함을 동시에 갖춘 그는 아들의 죽음이 휩쓸고 지나간 자신의 삶을 고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부스러기와 잔해를 깔끔하게 쓸어 정리하고, 필요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차례차례 진행한다. 그가 은찬의 죽음이 가져온 감정의 편린을 마음 한구석에 몰아두지 않았더라면 은찬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장학 재단 사업과 같은 일을 추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붙인 벽지가 울지 않고 말끔히 붙는 것처럼, 그는 감정이라는 풀을 적재적소에 바르고, 필요한 만큼의 힘을 주어 펴 바른다. 미숙과의 관계도 차차 회복되어 가고, 그와 기현과의 관계도 꼭 맞은 모양새로 달라붙어 있다.
미숙은 성철과는 달리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말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항상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은찬의 사망보험금 액수 앞에서는 죽음의 값을 어떻게 잴 수 있는지 묻고, 은찬을 의인으로 추켜세우는 사람들 앞에서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만 그 일을 잊으라는 사람들에 대한 짜증도 숨기지 않는다. 미숙은 은찬의 죽음이 불러온 울퉁불퉁한 감정에 솔직해지는 방식으로 자기 안의 은찬을 보내지 않고 붙잡으려고 한다.
기현은 은찬의 죽음을 가장 복잡하게 받아들인다. 어리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만의 방식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기현은 자기 이야기를 안 하고 퉁명스럽고 굴다가도 성철에게 도배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하고, 처음에는 제대로 벽지를 붙이지 못하지만 세 사람의 관계가 점점 모난 데 없이 밀착되어 갈수록 성철처럼 빈틈없이 꼼꼼히 벽지를 바를 수 있게 된다. 도배사 자격증을 따고 과일 상자를 사서 성철의 집에 찾아온 기현은 미숙이 열어준 은찬의 방에서 은찬의 흔적을 마주하지 못하고 울어 버린다.
은찬의 죽음은 세 사람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에 혼란과 미움, 두려움을 갖게 하는 원인이지만, 반대로 세 사람을 떼낼 수 없는 방식으로 이어 붙이기도 한다. 은찬이의 동생을 낳아서 그 빈 자리를 채워보려던 미숙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원래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기현이가 점점 더 아들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된다. 사실, 자기가 불편할까봐 숨어버리는 기현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미숙은 조금씩 기현에 대한 생각을 바꿔왔던 것 같다. 기현이 은찬의 유품을 나눠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조금씩 진행되어 온 변화의 한 부분일 테니 말이다. 은찬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버거워 하는 기현의 모습은 그전부터 조금씩 이완되어 온 미숙의 태도가 변하는 분기점이 된다. 성철이 기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기에 기현을 조금씩 받아들였다면, 미숙은 자신의 마음 상태가 기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됐을 때 기현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성철, 미숙, 기현은 은찬의 죽음을 통해 단단하게 얽매인다.
카메라는 이 세 사람이 가깝게 얽매이는 과정을 차근차근 쫓아간다. 각본도 억지스럽거나 우악스러운 데 없이 참을성 있게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찬찬한 호흡으로 켜켜이 쌓여온 관계의 뒤에 오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반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달이 나게 만든다.
기현은 미숙에게 스스로 밝힌다. 은찬은 기현을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뛰어든 것이 아니라, 기현과 다른 아이들이 쳤던 장난 때문에 익사한 것이다.
세 사람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기현은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두 사람에게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된 것이다. 평평하게 잘 붙은 벽지 위로 빼꼼 튀어나와 있는 뾰족한 거스라미처럼 관계가 가까워졌기에 진실이 더 이상 감출 수 없을만큼 날카로운 형태로 벼려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숙과 성철은 혼란에 빠지지만, 일을 ‘바로잡기’ 위해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한다. 기현은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지 않지만, 다른 아이들은 기현이 밝힌 ‘진실’을 완강히 부정하고 증거가 없어 재수사는 이뤄지지 않게 된다.
재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세 사람이 너무 가깝게 지냈기 때문이다. 기현이 성철과 미숙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면 진실이 드러날 일이 없었겠지만, 결국 셋이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이 진실은 공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분노와 절망, 배신감에 휩싸인 성철과 미숙은 기현을 불러 은찬이 죽은 계곡으로 소풍을 떠난다.
성철은 그의 꿋꿋함과 섬세함으로도 고칠 수 없게 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관계를 아예 깨부숴 없애려고 한다. 그는 은찬이 죽은 계곡에서 기현의 목을 조르지만, 차마 끝까지 목을 조르고 있지는 못한다. 기현은 성철에게서 도망치지만, 다른 곳이 아니라 자신이 은찬을 죽였던 바로 그 계곡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미숙은 주머니와 옷 사이에 돌을 가득 넣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기현을 억지로 끌어내고 뒤늦게 도착한 성철은 미숙을 도와 기현을 물 밖으로 끌고 나온다. 영화는 숨을 몰아쉬면서 떨리는 눈빛으로 기현을 바라보는 미숙의 얼굴을 비추면서 끝난다.
이렇게 기현과 성철, 미숙은 함께 살 수도, 죽일 수도, 죽게 둘 수도 없는 관계로 들어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장면에서 미숙의 눈빛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사태를 어디서부터 풀어나갈 수 있을지 묻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실낱처럼 가느다랗기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 길을 더듬어 찾아갈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있을까?
아니면, 영화의 초반에 기현이 무뚝뚝함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쓰라린 진실을 일부러 뭉툭하게 깎아낸 둔탁한 감정의 덩어리 안에 감싸두고 마주하지 않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일단 드러난 일을 애써 무시하는 일이 어렵기도 할 테지만, 진실을 덮어두는 일은 세 사람에게, 특히 기현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다. 기현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보냈던 시간 때문에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렸고, 결국 진실을 밝히는 것은 두 사람과의 관계를 가장 나쁜 형태로 바꾸어 놓았지만,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했던 것도 아마 셋이 함께 보냈던 행복한 기억이었던 것 같다. 영화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 기현이 성철로부터 같이 소풍을 가자는 이야기에 무척 설레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럼 그를 버티게 했던 행복의 기억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혹은 그 이후에 기현은 무엇을 위해 또 다시 자신을 깎아내야 할까?
이런 점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살 만한 방법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지 묻고 있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미 답은 나와 있는 셈이다. 그런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방법을 미리 알 수 없다. 미숙이 숨을 몰아쉬며 기현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혹은 여러 가지 일을 묵묵하게 해결해오던 성철의 굳건한 태도가 흔들리는 것처럼, 진심어린 말이나 올곧은 태도마저도 이런 사태 앞에서는 무의미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지만 결국은 그냥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세 사람이 은찬의 죽음 직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이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들 사이가 기현 자신마저도 예상치 못 했던 기현의 고백으로 변했던 것처럼 삶의 만남과 접촉은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기도 한다.
그러니 희망을 걸 만한 최후의 보루는 그들이 (혹은 우리가) 특정하는 무언가를 하기만 하면 괜찮아 질 것이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더라도 어쩔 수밖에 없이 그 고통을 마주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들이 (우리가) 고통과 부대끼며 살아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세 사람은 같이 그들에게 주어진 이후의 삶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또 다시 예상치 못 했던 곳으로 데려가질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