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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응답하는 방식 — <응답하라 1988>

herimo 2016. 8. 11. 21:56

자본이 응답하는 방식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시리즈

<응답하라> 시리즈는 tvN에서 제작 중인 시즌제 드라마이다. 시즌제 드라마라고 하기는 약간 묘한 것이, 이 드라마는 미드처럼 같은 인물을 등장시키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제 드라마라고 묶기에 어색하지 않은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이 몇 가지 특징은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88>을 거치며 반복되고 있는 이 드라마의 고유한 문법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첫째로, 이 드라마는 “과거”를 대상화하여 드라마 구석구석에 골고루 배치해놓는다. 그렇지만 이 정도 세팅은 시대극이라면 응당 갖추고 있어야 할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최초로 시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세 번의 시즌을 연달아 큰 성공을 거둔 묘수는, 과거로부터 현실 사이의 간극 자체를 드라마의 (이를테면) 주인공·주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대상이 되는 과거 시점으로부터 방영 당시 사이의 차이는 작품 안팎을 걸쳐 누차 강조된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시차는 작품 외적인 코드로서 여러 번 회자돼 왔다.


추억팔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과거에 대한 향수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이 시리즈의 성공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그 향수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분명히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현실과의 대조군으로 제시되는 과거에는 우리가 지금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을 소비하기 쉬운 형태로 가공해 제시한다. “그 시절(1997·1994·1988)”의 노래나 생활상으로부터 시작해 이웃·가족·친구를 아우르는 인간 관계, 그 와중에 물질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한국의 모습이나 희망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지점을 미래로 삼을 수 있는 경제발전기의 여유로움은, 옹기종기 뭉쳐져 “그 시절”에 대한 낭만적 대상화와 동일시 및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대상화되어 작품의 내적 맥락에서 어느 정도 분리되어 소비되는 “그 시절”을 배경으로 깔아두면서도, 이 작품은 서사 내적으로도 관객들에게 시차를 주지시킨다. 이 작품은 계속해서 서사를 덜컹거리게 만들면서 ‘남편 찾기’라는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곧, 관객(시청자)는 이중의 시차가 얽혀있는 수수께끼의 장으로 초대 받는다. 자신이 누려보았든 누려보지 못 했든 향수를 품게 되는 (살기는 어려웠어도 정은 많았던 시절 따위로 포장되는) “그 시절”을 대상화해서 과거 배경으로 두고, 등장인물 중 과연 누가 여주인공의 현재 시점에서의 ‘남편’이며, 남주인공이 될 것인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극에 몰입할수록, 관객은 계속해서 현재와 과거의 시차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과거의 조각들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조합되는지 몰입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와 이성애규범성

이러한 몰입을 바탕으로 향수가 현재적 문제를 가려버리는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다는 점은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 껄끄러운 현상이다.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과거에 대한 이상화는 기약없는 민족주의나 파시즘을 떠올리게도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경제적 발전의 이데올로기만큼이나, 이 작품이 은폐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화적 가정이 존재한다. 바로 ‘남편’을 찾을 수 있다는 가정—여주인공의 남편이 작품의 남주인공이 된다는 가정이다. 요컨대 시차를 중점에 두고 이 작품이 소비되는 외적 맥락은 이데올로기적이고 내적 서사는 이성애규범적이다.


이 작품은 <응답하라 1997>에서 보여주었듯 동성애자 캐릭터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한국 드라마는 몇 번에 걸쳐 남성 동성애자를 재현하곤 했다. 몇 가지 예외가 있긴 하지만 게이 재현은 대개의 경우, 그들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강조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슬픔 따위를 환기해주기 위한 소도구 정도로 소환되어 왔다. <응답하라 1997>에서 강준희가 좋아하는 대상이 성시원이 아니라 윤윤제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남편 찾기의 난이도는 급강하한다. 케이블이든 뭐든 한국 드라마에서 게이 커플이 주인공이 되는 트렌디 드라마가 나올 리 없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에서처럼 이 작품의 구조에서도, 동성애는 이성애를 더 아름답게 빛내주기 위한 조력자의 역할을 충실히 할 것으로 가정되고 실제로 그 가정을 순순히 따르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동성애는 이성애 드라마에서 주목받는 조연 자리를 꿰찰 수 있다. (비슷한 역할을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W>의 이종석이 연기한 적도 있다. <시크릿 가든>의 천재 뮤지션 썬 역) 이성애규범성은 <응답하라 1988>에서도 서사의 중심축을 조정한다. 앞서 방영된 두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여주인공 성덕선의 남편이 누구인지 찾는 것이 이 드라마가 시청자/관객에게 제시하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최택의 섹슈얼리티-젠더

배우 박보검은 출중한 외모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과 케미를 잘 살리는 것으로도 유명한 만큼, 박보검이 연기하는 최택이 누구와 이어질지도 방영 기간 내내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준희의 전례가 있느니만큼 작품 내에서 잘 붙어다니는 성선우, 김정환 등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남편’으로 확정되는 작품 극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최택은 성덕선을 좋아하는 해바라기형 인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택이 왜 성덕선을 좋아하는지, 그 이유가 뚜렷하게 밝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덕선을 보는 눈빛이 다르다는 선우의 말에 “당연한 거 아니냐, 니들 볼 때랑 같겠어?”(15화)라고 말하지만, 덕선이가 왜 좋냐는 물음에는 “그냥 좋아. 같이 있으면 그냥 좋아”(14화)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없으면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아”라고 덧붙이지만 최택에게는 그런 친구가 적어도 세 명은 더 있다. 다시 말해, 덕선을 바라보는 눈빛과 덕선의 젠더 외에 덕선과 다른 소꿉친구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는 극중에서 밝혀지지 않는다.



정환이 얽혀있는 삼각관계 구도에서 보면 그 모호함은 심화된다. 정환은 최택에게 이불을 덮어주거나(12화), 택의 풀린 운동화 끈을 묶어준다(15화). 택은 운동화 끈을 웬일로 잘 묶었냐는 정화의 질문에 “풀어지면 다시 못 맬 것 같아서 내가 한 번 더 세게 묶었어”라고 대답한다. 이 드라마에서 정환과 택의 관계는 “당연히” 우정이라는 내러티브로 읽히도록 짜여져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당연히” 이성애 커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내서 마무리지을 작품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이 둘의 관계 역시 연인으로 맺어질만한 충분한 떡밥과 개연성이 있다. 정환은 택이 덕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고백하지 않고(11화 이후, 특히 19화), 택은 정환이 덕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덕선에게 고백하는 것을 포기한다(16화). 이로부터 미루어보건대, 이 두 사람은 덕선과 이성애 커플로 맺어지지 못하는 것보다 자신이 덕선과 이성애 커플이 됐을 때, 자신과 다른 남자와의 관계가 예전 같지 못할 수도 있음을 염려한다.



더욱이 최택에게 부여된 속성은 이 캐릭터가 읽히는 방식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최택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의 페르소나가 분리돼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바둑 기사로서의 최택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을 지닌 프로페셔널로 묘사된다. 하지만 봉황당 골목에 있는 최택은 일상 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생활 능력이 없으며, 극단적으로 의존적인 인물이다. 운동화 끈을 못 매는 건 예사고 돈가스도 못 썰고, 마이마이도 못 켜고, 물끓이개도 못 틀고, 깍두기도 젓가락으로 못 집는다. 이 때문에 최택의 소꿉친구들은 계속해서 택을 챙겨주고 보호해준다. 심지어 험한 세상을 잘 살기 위해 필요하다며 욕까지 가르쳐준다. 최택의 이런 의존성과 수용성은 한국 드라마에서 대개 여주인공이 짊어질 것을 요구받았던 특성이 아니던가. 만약 젠더가 여러 가지 사회적 자아를 응집시켜 형성되는 하나의 패키지 같은 것이라면, 최택의 젠더 패키지의 어떤 부분은 전통적으로 여성이 맡아온 성의 위치를 답습하고 있으며,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최택은 공히 상징적 여성성의 빗금의 안쪽 어딘가에 (최소한) 한쪽 발 정도는 걸치고 있다.



자본은 응한다.

최택의 모호한 섹슈얼리티와 젠더 위상은 이 작품의 결말 외에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응답하라 1988>은 19화에 이르러 최택과 성덕선이 이성애 부부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십수년 뒤 부부가 돼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줘버린다. 마치 ‘이렇게 돼 버렸는데 어쩌겠어요?’라는 듯한 태도랄까. 아무튼 이런 결론은 애초에 <응답하라 1988> 혹은 <응답하라> 시리즈 자체가 기획되면서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게이 주인공 커플로 끝난다는 결말은 21세기 한국 사회에선 여전히 의문스럽고, 별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며, 적잖은 사람이 좀 역겨워 할 수 있는 결말 아니겠는가. 자본은 투자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을 시장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퍼뜨리며 현실에서 눈을 돌릴 것을 제안하는 이데올로기적 외피나, 누가 봐도 편안한 주인공=이성애자 로맨스를 재생산하는 이성애규범적 서사나 이 자본의 작동 방식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본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과거의 이상화와 이성애 로맨스에 의존하고, 추억팔이와 규범적 섹슈얼리티의 재현은 자본이 더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동력을 불어넣는다. <응답하라 1988> 혹은 <응답하라> 시리즈 전체에서 반복되고 있는 ‘응답하라’는 요구를 받는 대상은 누구인가? 결국 그것은 편안하게 제련된 레일을 따라 질주하라는 요구를 받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이며, 요구의 정체는 돈을 더 벌어오라는 명령 아니겠는가. 이렇게 자본주의라는 기차에 실려 있는 이데올로기적 기구라는 내연 기관에 이성애규범성이라는 연료를 퍼넣음으로써, 자본주의는 자신에게 주어진 요구에 무리 없이 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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