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knowledgement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본문

쓰기/쓰기_영화읽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herimo 2018. 3. 30. 15:12


Call Me By Your Name (2017, dir. Luca Guadagnino)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나는 이 영화가 재밌는 영화, 혹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영롱한 색채나 음악, 배우들의 호연은 영화의 지반을 단단히 다지고 있고, 이탈리아 북부의 상류층 백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그렇지만 요즘 한국에서 이 영화가 인기 있는 이유가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다든가 첫사랑의 떨림을 (다시)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라면, 이건 참 난감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이 영화가 첫사랑을 조명하는 방식은 조금 과장한다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데, 지나치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첫사랑의 끔찍함이 아로새겨 있기 때문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전작 중에는 [아이 엠 러브](2009)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도 이탈리아 상류층 집안을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금지된 사랑을 그린다. 게이 감독들은 아무래도 금지된 사랑을 그리는 솜씨가 좋은 경우가 많은데 구아다니노 감독은 그 금지된 사랑의 세목을 채워 넣는 데도 재주가 좋다. 인간은 어째서 해서는 안 되는 사랑에 빠져들게 되는가, 그것은 단지 그의 영화의 주인공들이 멍청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영화 속에서 인물들 사이의 작은 스침과 떨림이 켜켜이 쌓여 어느새 감히 대적하기 어려운 무게로 덮쳐 온다.



엘리오와 올리버


엘리오와 올리버 역시 그렇게 덮쳐 오는 파도에 감히 대적하지 못한다. 17세 소년 엘리오는 정신적인 자원이든 물질적인 자원이든 모자람 없이 누리고 자라 자신이 받는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를 감싸고 있는 세계는 아주 부드럽다. 종종 까끌까끌하더라도 한 모퉁이만 돌면 부드러운 세상에서 그가 받은 호의는 그의 몸 구석구석에 심겨 있고, 그것이 엘리오를 거절하기 힘든 어리광을 부릴 줄 아는 사랑스러운 남자로 키워낸다.


영화는 주인공인 엘리오를 따라가기 때문에 관객이 보는 올리버의 모습도 엘리오의 눈에 비친 모습뿐이다. 엘리오에게 올리버는 한 마디로 이상한 남자다. 낯설고, 저녁을 거르고 온종일 잠만 자더니 계란을 제대로 못 깨질 않나, ‘나중에(later)’라는 거만해 보이는 인사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올리버는 엘리오의 평온한 삶에 불쑥불쑥 끼어든다. 허락 없이 어깨에 손을 얹더니 동네 친구 키아라와 어울리면서 엘리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새로움, 종잡을 수 없음, 불편함. 불편함을 느끼면서 엘리오는 조금씩조금씩 올리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고, 벽을 맞대고 공유하고 있는 화장실에서 느껴지는 그의 기척이 신경 쓰이더니, 어느새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팬티를 머리에 쓰고 자위를 하고 있다.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



이 영화에서 극적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시간은 분수대를 빙빙 돌던 두 남자가 마침내 첫 번째 섹스를 하기 전까지인데, 그 시점을 정하는 건 엘리오다. 엘리오는 휘몰아치는 자신의 감정을 이길 방법을 찾지 못해서인지, 어쩌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올리버에게 고백 비슷한 것을 한다. 억지로 미뤄뒀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승복은 분수대 둘레를 돌며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를 중얼거릴 때 비로소 이루어지고, 그때부터 엘리오는 자신에게 몰아닥치는 감정의 격류에 휩쓸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엘리오가 거침 없이 다가오자 당황하고 몸을 빼려는 건 올리버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어리광쟁이와 제멋대로 자유분방해 보이는 미국인은 어느새 자리를 바꾼다. 이제 자기를 무시하지 말아 달라는 쪽지를 남기는 건 엘리오고 올리버는 자정에 보자는 말로 그들의 관계를 확정 짓는 것을 뒤로 밀어둔다.


두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하나,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는 단순히 시적인 고백만은 아니다.

둘, 올리버는 엘리오가 물러서면 다가서고, 엘리오가 다가오면 물러선다.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담아내지 않고 고백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 순간은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The love that dare not speak its name)이 교환되는 양식과 성취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 성취의 순간은 그려내기 위해 이 영화의 전반부는 사소함에 대한 편집증적 집착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계란, 살구, 유대교, 테니스, 댄스파티, 자전거, 담배, 포커 등이 그려지지만 전경화되지 않은 작은 단서들, 예컨대 사소한 말버릇이나 손짓, 눈길을 그러모을 수 있어야지 엘리오가 마침내 치닫게 되는 감정의 격동은 나름의 설득력을 얻는다. 상당히 조심스럽고 간접적인 어조는 영화의 등장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형식에서도 은은하게 흘러간다. 섬세함에 대한 감독의 묘사는 섬세한 그릇 속에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일인칭 영화이자 한 사람의 내면에 대한 영화치고는 드물게 보이스 오버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영화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영화의 등장 인물들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다소 과할 만큼이나 디테일을 탐지하는 수용력을 갖추기를 강요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면 이런 것이다.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랑을 일궈내고, 또 좇아가 보기 위해서라지만 왜 이렇게 켜켜이 묻어두는가?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이 엘리오가 (뿐만 아니라 점점 명확해지는 바이지만 올리버 또한) 자기 자신의 사랑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그와 올리버의 사랑이 마땅한 형태를 갖춘다는 건 80년대 초에 게이로 여겨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소한 장면 중 하나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엘리오의 아버지는 파트너십을 맺은 두 미국인 게이 친구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엘리오는 그들이 선물해준 큼직한 꽃무늬 패턴 셔츠를 입기를 거부한다. 부모님으로부터 그들이 게이라서 무시하는 것이냐는 꾸지람을 들을 때까지 갈아입지 않는다. 엘리오가 그들을 비웃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꽃무늬 셔츠가 너무 싫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로부터 게이라고 무시하지 말라는 나무람을 일부러 듣기 위해서(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부모님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인지 알아보려는 테스트 기회로 삼으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장면은 다음을 보여준다. 당시에 게이가 되는 것은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고, 엘리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금기는 사회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엘리오 자신이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이것이 엘리오를 극단적으로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몰아넣는다. 엘리오는 차마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전할 수 없는 상대가 자신을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이르는 섬세한 감각을 지녀야 했기에 지니게 됐고, 올리버 역시 마찬가지다. 올리버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이 게이라는 걸 알아내면 ‘정신병원에 처넣어졌을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섬세한 수용 기관과 서툴고 간접적인 표현, 과해 보이기도 하는 조심스러움—어떤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필수 소양처럼 갖춰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영화가 토드 헤인즈의 [캐롤](2015)을 떠올리게 하거나, 비교되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자신을 숨길 것을 사회로부터 강요당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행동 양식으로부터 서로 포개어질 수 있을 만큼 비슷하게 닳아빠진 모서리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러서면 다가서고, 다가오면 물러선다.


두 번째로, 올리버는 엘리오가 물러서면 다가서고, 엘리오가 다가오면 물러선다. 엘리오가 이번 여름에도 아버지의 조수가 찾아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익히 그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확인했을 때, 첫 만남 특유의 긴장감이 잠시 감돈다. 자신의 사적인 공간을 내주어야 하고 화장실을 공유해야 하는 상대에게 취할 만한 마땅한 태도다. 그 남자는 끊임 없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 하이데거나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무언가 알아들어 주어야 할 것 같은 얘기를 하더니, 어느 날은 같이 자전거를 타자고 하고, 맨 어깨를 감싸 쥐고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낸다. 엘리오가 그의 말버릇, “다음에(later)”를 오만불손하다고까지 느끼는 이유는 올리버가 계속해서 자기를,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엘리오가 적극적으로 나서자마자 올리버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중(later)’으로 미룬다.


왜 처음에는 성가실 만큼 적극적이었던 올리버는 한없이 의뭉스러워지는가.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계란을 너무 많이 먹게 될까 봐 차라리 먹지 않기를 택하는 사람이다. 그는 잠시 머무는 조수의 삶에 충실히 임하고자 하며 사람들과 테니스를 치다가 키아라와 어울려 춤을 추고, 동네 아저씨들과 포커를 친다. 사실 그는 굳이 엘리오를 얻으려 애쓰진 않는다. 결국 계란을 깨뜨려 줘야 하는 건 엘리오이고, 엘리오가 자신의 순정을 고백해도 나중으로, 하루의 끝, 자정으로 이야기하길 미룬다. 올리버는 자신이 계속해서 관계를 맺어가야 할 사람들에게는 들키지 않을 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엘리오에게 키스를 하고 엘리오와 섹스를 한다. 늦은 밤 원래 엘리오의 방이었던 자신의 방에서, 다락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 이탈리아 어느 도시의 밤거리에서…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라는 제목의 출처는 올리버를, 그리고 엘리오와 올리버가 맺은 관계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를 포착하고 있다. 이들의 세계에는 둘만 있다. 바꿔 말하면 이들의 사랑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둘만 있는 장소, 둘만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이들이 끼어드는 순간 이들은 키스는 멈춘다.


이런 그의 모습을 곱씹어 보면 주변 사람 모두가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곳으로 돌아간 그가 엘리오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이성과 결혼을 택하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무대 위에서 외롭게, 사람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을 연기하며 살아가기를 택한 것이고, 올리버는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만한 삶에서는 엘리오의 아버지나 키아라만 있다. 섹스하지 않는 남성과 섹스할 것처럼 여겨지는 여성.



잊힌 것들의 목록에는


올리버의 사랑이 이인칭이라면, 엘리오의 사랑을 일인칭이다. 일인칭이라는 시점은 첫사랑의 시점이기도 하다. 첫사랑에 빠진 이는 객관적인 시각이란 없이, 상대방을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내 멋대로 싫어했다가, 어느새 그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분명히 짚어야 할 점은, 아무튼 올리버도 엘리오의 첫사랑에 휘말린 이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엘리오는 올리버가 거부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그의 거부를 다시 비집고 들어가 자신의 사랑에 결국 이름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 휘말린 이들을 공정하게 대할 여력도 없다. 마르치아에 대한 엘리오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든 그녀와의 관계에서 엘리오가 느끼는 죄책감은 올리버와의 극적인 연애가 좌절될 때 느끼는 격동을 넘어서지 못 한다.



이 영화는 이런 무례함을 정당화했던 시절을 상기시킨다. 어리고, 처음이고, 자신은 잃을 것이 없다고 믿는 소년이 오직 자기 자신의 공포를 이겨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첫사랑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삼아버린다. 공포야말로,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충동과 공포에 맞섰기에 보답 받고자 하는 어리광이 엘리오에게 용기와 행동력을 불어넣는다. 정작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정말로 필요했던 다른 것들은 이 결과에 거대한 파고에 묻혀서 잊혀진다. 잊힌 것들의 일람표에는 조수를 부릴 수 있는 아버지의 지위, 전화를 걸면 자신을 데리러 와 주는 엄마, 정성 어린 충고, 다락이 있는 넓은 집, 그 집에 딸린 살구와 복숭아를 따먹을 수 있는 정원, 자전거를 고쳐주는 안치세스 아저씨, 마팔다 아주머니의 아침밥, (자신과는 달리) 자신의 자리를 서둘러 치워 버리지 않는 마르치아의 사려 깊음 같은 것들이 자리 잡고 있을 터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