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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knowledgement
영화 〈아가씨〉(2015) 단상 (스포 많음) 본문
트윗 아카이빙.
1/ 사실 어디서부터 접근하면 될지 잘 모르겠으니 첫 장면부터 시작해볼까 싶네요. 처음엔 나쁘지 않았어요. 두 가지 대비되는 공간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는 기법은 흔하지만 친숙한 방법이고 초반에 여러 가지 정보를 와르르 우겨 넣기에 효율적이라고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2/ 느꼈어요.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나레이션과 같은 속사포 설명을 맡은 사사키 집사(김해숙 분)가 저택의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1부가 히치콕스럽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모양인데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어요. 아가씨의 이모/엄마가 하나의 방향으로 상징화되기 어려운
3/ 방식으로 곳곳에 등장하고 무서운 집사가 있으니 뭐 (이쯤 되면 비슷하다고 해주자 싶음)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아무튼 문제는 이 다음부터. 일단 숙희가 왜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요. 그냥 예뻐서 좋아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아가씨의 자리를 탐내고,
4/ 빼앗고 싶어하면서 그것을 지금 가지고 있는 아가씨에게 집착할 수도 있죠. 하지만 숙희의 아가씨를 향한 애정은 계속해서 "무해성"을 증명하고자 해요. 숙희는 아가씨의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아름다움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다는 점에서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5/ 그녀를 자랑스러워 하면서 사육하고자 하는지, 아가씨와의 섹스가 잊을 수 없어서인지(그러진 않을 것 같지만), 아니면 그녀의 지위와 부가 탐이 나고 그것을 선망하는 과정에서 아가씨에게 끌리는지—가능성은 여러가지이지만 영화의 흐름과 캐릭터가 스리슬쩍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6/ 엇나가면서 이중 어떤 해석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아가씨에 대한 숙희의 욕망은 '이 전부'라기보다는 이 중 어떤 것도 아닌 느낌을 취하게 되고, 결국 "아가씨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 정도로 어느 순간 탈바꿈하게 되죠.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7/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있다보면 섹스신이 시작돼요. 그리고 그제서야 전 깨달았어요. 왜 숙희의 아가씨에 대한 사랑이나 집착이 무해해야 하는지를. 이 영화는 두 여성의 섹스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관찰해놨어요.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8/ 두 사람의 섹스는 매우 아름다운 두 배우의 나체를 보여줘요.정말로 그게 끝이랍니다. (보시면 앎) 체위 텍스트북마냥 이런저런 체위를 보여주고 이것을 적당한 거리에서 조망하죠. 무튼 이들의 서로를 향한 집착처럼, 섹스도 아주 무해하게 묘사돼요.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9/ 1부 마지막에 나름의 '반전'이 존재하는데 2부는 이 반전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이죠. 2부에서 숨겨져 있던 히데코의 과거라든가, 어떤 학대를 받았는지 묘사돼요. 의견이 갈릴 수도 있지만 전 변태 적인 학대를 받는 장면은 그러려니 했어요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9/ 1부 마지막에 나름의 '반전'이 존재하는데 2부는 이 반전을 설명하기 위한 과정이죠. 2부에서 숨겨져 있던 히데코의 과거라든가, 어떤 학대를 받았는지 묘사돼요. 의견이 갈릴 수도 있지만 전 변태 적인 학대를 받는 장면은 그러려니 했어요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0/ 그렇지만 2부가 진행되면서 아가씨는 남성-욕망의 대상으로서, 그 욕망이 각인된 몸을 가지고 욕망을 읽어내고, 숙희에게 그것을 다시 써내는 존재로 재현돼 버리죠. 이 과정에서도 설명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1/ 숙희에 대한 히데코의 집착은 너무 갑작스러워요. 각인된 남성의 욕망이 히데코를 통해 굴절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전이됨으로써 숙희에게 다시 새겨지는 것이라면, 이건 남성적 욕망의 드라마가 돼 버릴 뿐이죠. 남성의 시선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해요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2/ 시선뿐만 아니라, 모든 소품, 배경, 이야기의 전개, 캐릭터(숙희와 아가씨)와 그들이 몸을 움직이는 방식까지 모두 남성의 욕망이 그려내는 드라마 속에서 도구적으로 활용돼죠. "여성=손에 넣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라는 공식을 예증하는 도구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3/ 문제는 두 여성 캐릭터들이 이 구도에서 탈출하게 되면서 나타나요. 더 이상 욕망이 갈 곳을 잃고 나서 이야기는 텐션을 완전히 놓쳐요. 두 남성이 그리는 장면은 히데코라는 기표를 중심으로 욕망을 교환하려고 시도하지만 당연히 실패하죠.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4/ (뭐 굳이 해석하자면)두 남성의 관계는 히데코를 매개로 가능했기 때문이라 치고. 아무튼 이들은 욕망의 교환을 어떻게든 이어내려고 해요. 예컨대 백작의 남성성을 결코 훼손시키지 않죠. 오히려 고문 장면을 통해 그의 남성성을 강화시켜요.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5/ 결국 백작의 남성성은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동시에 남성이 영웅이 돼야 한다는 강박까지 합쳐져, 코우즈키의 죽음은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묘사돼요. 이건 1-2부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장면을 전부 다 똥으로 만들죠. 그게 다 그냥 코메디였던 거예요.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6/ 모든 영웅의 역할이 백작이라는 캐릭터로 집중되면서, 두 여성 캐릭터는 그냥 남성의 판타지 속 존재가 돼요. 어떻게 탈출했는지, 어떤 삶을 살아갈지--모두 다 미지의 영역에서 일어날 일이죠. 이 무해한 두 여성은 남성을 심판하지 않고 도망칠 뿐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7/ 그리고 정말 끔찍한 마지막 장면이 나오죠. 히데코는 자신에게 새겨진 남성의 욕망을 그저 재현하는 존재로, 숙희는 그 욕망을 받아들이는 존재가 됨으로써 남성의 욕망에 그대로 순응하는 것처럼 그려져요. 아무튼 시각적, 청각적 구림은 뒤로 하고…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8/ 그 순간 저에겐 <아가씨> 자체가 감독이 그려낸 판타지(코우즈키가 히데코에게 읽혔던 것 같은)로 보이더군요. 그러나 관객이 (마치 숙희처럼) <아가씨>를 찢어버리려는 시도는 소용없죠. 결국 숙희도 히데코를 통해 남성-욕망의 경제에 편입되 듯이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19/ 관객은 남성적 욕망의 경제와 이 영화를 뿌려대는 미디어 권력과 자본주의 속에서 놀아날 것으로 이미 결정돼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여러 모로 기분 나쁜 영화였어요.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미술은 좋았고, 배우들은(특히 여배우들이 모두!) 훌륭했어요.
20/ 덧붙여 백작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잠시 등장만 했다가 쓸쓸히 잊혀진 문어 군에게 묵념을. 그리고 이 영화가 서구에서 호평을 받는다면 "동양 감독이 동양풍으로 찍은 찍은 레즈비언 로맨스" < 라는 이유 때문이 아닐지 의심하게 되는군요. (끝)
— 모가지 커팅 허이모 (@aunteathur) 2016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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