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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토 - "오늘은 술을 먹고 싶다." 본문
#북리뷰
권여선, 《레가토》, 파주: 창비, 2012.
권여선은 내가 정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현대 한국 소설 작가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녀가 다른 모든 작가들보다 우수해서가 아니라 그를 제외하고 내가 눈여겨 본 작가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찬찬히 훑어봐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2008년도 이상문학상에서 대상으로 선정된 <사랑을 믿다> (2007)를 읽고 나서였다. 이 후에 장편 소설이자 데뷔작품인 《푸르른 틈새》(1996)를 읽었고 2010년에 출간된 단편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2010)도 읽어 보았다.
나는 이전에 《푸르른 틈새》(1996), 단편 <내 정원의 붉은 열매> (2007), 《레가토》(2012). 이 세 소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기원이 있다면 그것은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향수일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푸르른 틈새》의 주인공인 손미옥은 실패한 영웅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특정한 영역에 속하기를 원하지만 그러한 동화와 영속화 앞에서 미옥은 분열하고, 분열된 주체로서의 손미옥은 하나의 영토에 속하기를 격렬하게 거부한다.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 '나' 역시 언더 서클에서 만난 선배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지만 그것은 술버릇으로 치부되고 그 고백은 기각되어 버린다.
15년만에 발표한 장편 《레가토》의 정연에게서는 손미옥의 모습과 <내 정원의 붉은 열매>의 '나'의 모습이 아른거리지만 정연은 그 둘과 같지 않으며, 그 둘의 단순한 조합과도 다르다.
예컨대 정연은 미옥과 유사하게 굶주려 있고 허기진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특히 부각된다:
오른손엔 토한 직후에 베어문 쑥개떡이 잇자국을 보인 채 비죽이 나와 있었다. … 이 녀석이 틀어쥔 쑥개떡처럼 이 녀석을 꽉 트렁쥐고 놓아주지 않는 이 어마어마한 슬픔과 허기는 뭘까? (222-223)
정연은 닭날개를 세 토막째 먹고 있었다. 포크로 닭 토막을 누르고 손으로 날렵하게 날개 끝을 분질러 입에 넣고 뼈째 오독오독 소리가 나게 씹었다. 닭봉의 살을 발라먹고 관절을 감싼 물렁뼈를 말끔히 뜯어먹은 후 어금니로 동그란 관절뼈를 아작아작 씹었다. 그녀 앞에 쌓인 소복한 뼈들은 살점 하나 없이 깨끗했고 뼈의 양 끝은 납작하고 거무스레했다. (231-232)
그러나 굶주림의 원인은 조금 다르다. 미옥의 굶주림이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면 정연의 굶주림은 직접적으로는 뱃속의 아기가 그 원인이다. 그러나 그 아기가 탄생 이전부터 굶주리는 이유, 굶주린 어미의 뱃속에서 탄생하는 이유는 결국 그 아기가 자신의 아비를 알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연의 과거를 조금 더 살피면 권여선 소설에서 일관된 '유년기 아버지의 부재'라는 모티프가 그 예각을 보다 날카롭게 드러낸다. 정연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지 않았던가. 김애란의 소설에서 아버지의 부재가 부권적 절대성의 무너짐으로 나타난다면 권여선 소설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되려 그 부권적 절대성을 강화시킨다. 아버지는 실체를 갖지 않고, 내용을 갖지 못한 채 사라지지만 동시에 그 이름과 자리만은 남아서 주인공들의 정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끈다.
주인공의 정신을 이끌어낸다, 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권여선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주체화(subjectification)의 과정이 드러나며 그 주체화 과정에서는 필연적인 상실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푸르른 틈새》의 미옥이 자기 소개 과정에서 자신의 풍부한 신화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름과 학과와 같이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자신의 상징적 위치로 자기자신을 재현하는 데서 느끼는 단절감은 이러한 상실의 한 양태이다. 《레가토》에서는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가 이중적으로 제시되며, 이는 정연이 자신의 상징적 위치를 고수할 수 없도록 그녀의 주체성을 뒤흔들어 버린다. 주체는 고꾸라져 유년기로 퇴행한다. 정연을 키워준 안락한 동굴과 같은 성암사로 그녀가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아이의 출산은 그녀를 결코 회복할 수 없는 과거와 분리시킨다. 산후 조리를 해서 옛날에 입었던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지만 예전과 아예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깨닫는다. 그녀는 옛날 기분을 내며 산뜻한 마음으로 광주에 놀러 가지만 그곳에서 자신이 대학 시절 운동권에서 싸워 왔던 폭력의 적나라한 실체와 마주친다.
권여선은 어떤 인터뷰에선가 언젠가 한 번 "광주"를 다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이 소설을 쓰게 한 원동력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녀가 묘사하는 광주는 언젠가 보았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상처와 흔적을 기록해 놓은 추모관을 떠올리게 했다. 잔인함과 폭력성, 그리고 누구라도 생명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협 속에서 그녀는 군사 독재 정권은 물러가라는 소리를 지른다. 삐라 하나 돌리기도 겁내던 정연이 그렇게 바뀐 것은 역시 그녀가 과거와 "회복할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이렇게 《레가토》의 문제 설정은 《푸르른 틈새》에 비해 한층 더 복잡하며 다층적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주체화의 문제와 사회화의 문제를 교묘하게 하나의 실로 엮어 단숨에 묻는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할 것인가?"
예컨대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고단한 시기를 맞아 위안과 구원을 찾지만, 그런 것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는 그런 시간"을 맞이하였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How to Read 니체》, 126)?
고통은 영원히 되돌아온다. 시간이 지나도 그것은 반복되며 회귀한다. "사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모든 시간이 첫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은수는 생각했다. 이십대도 처음이었지만 오십대도 처음인 것이다. 인생에 두번째란 없다. 그래도 만약 두 번째의 이십대가 온다면 링에 모인 이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레가토》, 292).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그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우연에 기대는 것처럼 보인다. 정연을 구해준 사람이 프랑스인이며, 같이 서클 활동을 했던 은수가 프랑스에 가 있는 것이며 정연의 딸인 하연의 남자친구가 한 날, 한 시에 프랑스에서 정연을 만난다는 것은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여기 빠리에만 한국 사람들이 팔천명 넘게 살아요. 근데 제가 아는 한국인은 사십명도 안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만날 확률은 이백분의 일이었던 거죠.” (405)
이것이 너무 작위적인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대해, 작가는 미리 대답을 준비해 두고 있다:
자신이 운동권이 되고 안되는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었다는,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한대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신입생 헌터의 역할을 맡은 선배들은 하달 안에 낙점을 끝냈고, 낙점된 신입생들은 대개 한 학기 안에 마음의 결정을 끝냈다. 운동권에 몸담고 지낸 십수년의 기간에 비해 한달과 반년은 얼마나 짧은가. 그 짧은 동안 일어난 몇가지 단편적인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후의 기나긴 청장년의 삶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나 싶었다. … 편재하는 우연이 새처럼 날아들면 그 순간 인생은 단박에 뒤틀린다. 그런 의미에서 스무살 청춘에게 허여된 한달 또는 반년의 말미는 필연의 첨탑을 쌓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기도 했다. (390)
다시금 돌아보면, 결국 그 고통을 이겨내고 이날 이때까지 살아서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것은 모두 다 강인한 의지, 불굴의 정신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녀가 모든 고통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희망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더 품을 가치가 있다는 진실을, 저 부서지기 쉬운 그녀의 육체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입증해왔는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428)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이 모든 고통을 그대로 두고, 한 잔의 술을 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작가 권여선이 그렇게 하듯이 말이다.
「소설가란 글을 한 글자씩 한 문장씩 한 문단씩 한 챕터씩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벽돌공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뻔한 사실을 내가 뒤늦게 늦깎이로 겪어다는 것뿐이다. …
……
오늘은 술을 먹고 싶다.
벽돌공들이 원래 술을 잘 먹지 않는가」 (43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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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9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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