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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knowledgement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본문
Milan Kundera (1984),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Paris: Gallimard.
이재룡 역 (1999; rpt. 200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울: 민음사.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12-13)
대부분 “영원회귀”라고 하면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알기 전에 저명한 루마니아 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영원회귀론에 대해 먼저 배웠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내가 철학이라는 분과에 조예가 없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교학이라는 한국에서는 다소 특이하게 비치는 분과를 전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엘리아데의 영원회귀론을 알아보기 가장 쉬운 책은 제목부터 그런 티가 나는 『영원회귀의 신화』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엘리아데는 고대인과 현대인 사이에 어떠한 단절을 가정하고 고대인이 어떻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고통스러운 “역사의 공포(Terror of History)”를 견뎌낼 수 있었는지 서술한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가장 핵심적인 것은 현대인과 다른 고대인의 시간관에 있다. 그들의 시간은 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주기적으로 시간의 의미가 갱신되고 반복되는 시간이다. 이에 반해 현대인의 시간은 직선으로 뻗어 있으며 이에 따라 현대인들은 역사의 공포에 적나라하게 노출돼 있는 셈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짧은 해설을 참고하고 있다.
이 개념[영원회귀]은 스스로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는 무력한 상태로 영원한 반복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이 삶을 다시 그리고 또다시 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삶 속에서 되뇌어보라고 요구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하고자 하는 것들의 무게를 재볼 수 있게 된다. (Keith Ansell Pearson, 122)
그럼 이 세 가지 사상을 비교해보자. 나는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쿤데라가 엘리아데를 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고 적어도 그가 엘리아데 영원회귀론의 일부에 대해서는 찬성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그들이 원형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선의 시간을 보내고 있고 이러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드러난다.
모든 것이 다시금 되돌아오며 반복된다면 그것은 한없이 무거운 것이 된다. 그러니 인간의 삶이 단 한 번 뿐이라면 그 존재는 한없는 가벼움에 시달린다. 이 소설은 이러한 존재의 필연적인 “가벼움”을 이야기하면서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진저리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조명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만남은 매번 새로운 어떤 음탕한 짓을 상상했던 에로틱한 게임의 연장이 아니라 시간의 회복, 함께 보낸 과거를 기리는 노래, 저 멀리 사라져 버린 비감정적인 역사의 감정적 회복이었기 때문이다. (142)
예컨대 토마시는 테레자에게,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사비나는 그녀 자신, 혹은 “배신”이라는 행위에 어떠한 무게를 부여하고 이를 무게 추 삼아 끊임없이 흘러가는 무의미한 시간의 직선적인 흐름에 휩쓸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엘리아데가 떠오르는데 그는 단연코 현대인은 이러한 “역사의 공포”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토마시도, 테레자도, 프란츠도, 심지어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사비나조차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괴로워한다. 그렇지만 인간은 (쿤데라의 표현에 따르면) 동물, 혹은 고대인이 그러한 것처럼 원형의 시간을 살아갈 수 없기에 이 시간을 살아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간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쿤데라식의 받아들이기[受容] 혹은 초극은 단순한 체념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흘러가는 시간의 형식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내용이라고.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짧은 문장 몇 자를 옮겨 쓰며 글을 마칠까 한다. 장편의 호흡에는 짧은 감상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이상으로 이 소설 전체의 숙명적인 슬픔과 동시에 행복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문장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484)
참고도서
Keith Ansell Pearson (2005), How to Read Nietzsche,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서정은 역 (2007), 『How to Read 니체』,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보다 긴 해설적인 논평은 링크를 참조[네이버 캐스트]
서지 정보 참고
→사실 민음사에서는 이재룡 씨의 번역을 여러 종류로 제공하고 있는데 할인율이 좋아서 5000원 대에도 구할 수 있고 조금 멋진 장정을 원하면 쿤데라 전집을 따로 기획하고 있으니 참고하길. 그러나 역자가 같으므로 내용은 완전히 똑같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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