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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크

herimo 2013. 4. 27. 19:34

#북리뷰


김혜나 (2012), 『정크』, 서울: 민음사.




정크

저자
김혜나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12-3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루저 중의 루저, 정크!《제리》로 2010년 ‘오늘의 작가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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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제리』라는 소설로 데뷔한 소설가 김혜나의 신작. 주위에서 호오가 심하게 갈렸던 소설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소설의 주제 의식보다는 소재 선정의 문제 때문인 것 같은데 "왜 하필"이라는 생각을 읽기 전에도 했고 읽는 중에도 했고 읽은 다음에도 했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불쌍함과 주인공의 정신적인 고통이 매우 많이 절대적이면서 피할 수 없음과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것으로 제시되는데 마치 개미지옥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마무리를 좋아하진 않지만 소설로서는 존중할 만한 구성이라고는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이 소설에 대해 혹평을 한다면 역시 "왜 하필"로 요약되는 소재 선정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정크"의 존재론적 위상


이 시대 루저의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주인공의 이력은 이렇다. "사생아로 태어난 비정규직 동성애자. 애인은 유부남인데다가 본인은 마약과 섹스에 중독되어 있으며 모친은 노래방 도우미."


한 두 개 빼먹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실상 저 대단히 긴 불행의 이름표들을 상세히 서술하는데 대부분이 할애되어 있다. 작품 해설 중에 " ‘존재’란 어떤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축복이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무시, 그리고 자기 비하와의 힘겨운 싸움을 통해서만 간신히 얻어 낼 수 있는 자격인 것이다."라는 부분이 제시되는데 말 그대로 이 작품에서 정크/루저의 존재론이 제기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상태가 결코 바뀔 수 없는 존재론적 위상을 가지고 고정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크"라는 상태가 결코 바뀔 수 없고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단순히 "열심히 해서 빠져나올 수 있어"라는 말로 그들을 위로할 수 없다. 작가는 이 부분을 명확히 짚어내고 있다. 주인공은 꿈을 가지고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 꿈을 이룰 길은 요원해 보인다. 그것이 그가 사생아이기 때문인지 동성애자이기 때문인지 마약중독자이기 때문인지 경력이 없는 비정규직 화장품 판매원이기 때문인지를 나누는 것은 의미도 없을 뿐더러 불가능하다. 그 모든 상황이 그로 하여금 도저히 빠져나가기 힘든 하나의 수렁같다. 작가의 시선은 건조한 듯 하지만(혹은 문체가 건조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주인공의 수많은 고통을 종으로, 횡으로 그려낼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매우 고통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 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다. 실제로 존재하는 유형의 사람이든 아니든 이 소설에서는 소설의 특권으로서 하나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제 의식에 대두했을 때 우리는 대답을 피하거나,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크의 존재에 대한 작가의 문제 의식을 공감하든 안 하든 그것은 독자의 자유이다. 다만 나는 "그런 게 존재하지도 않는데 생각해서 뭐 하냐"는 유의 평가는 별로 생산적인 것 같지 않은 것 같고 비슷한 포지션이긴 하지만 보다 생산적일 수 있는 다른 표현 "왜 하필…"의 문제에 몰두하고자 한다.



-"왜 하필": 소재의 문제


어찌됐든 간에 이 소설에서 제기하는 저 대단한 불행의 이름표는 대단히 작위적이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왜 하필" 저런 소재를 택했는가이다. 저 중 한 두 개만 꼽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고통스럽고 빠져나갈 수 없는 "정크"의 존재를 구상할 수 있다. 왜 하필이면 주인공은 "사생아로 태어난 비정규직 동성애자"인 동시에 "애인은 유부남인데다가 본인은 마약과 섹스에 중독되어 있으며 모친은 노래방 도우미"인 사람인가? 애초에 말했듯이 단순히 이러한 불행의 나열이 비상식적인 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불행을 하나의 솥에 넣어버린 뒤 녹여버렸을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거대한지만 빠져나올 길이 없으면서 뭐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는 고통의 구렁텅이밖에 없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저렇게 돼 버리면 고통과 불행은 특유의 결을 잃고, 묘사는 상투적이게 되며, 공감하기 어렵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만을 보여준다. 바꿔 말하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제외하면 저러한 작위적인 명세표를 뽑아낼 필요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계속되는 나열과 상투적인 심리 묘사 뒤에서 우리는 공감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해결 불가능한 상황에 답답함을 느낄 뿐이다. 또한 다소 논쟁적인 소재를 섞어 버리면서(사생아만 해도 그런데 어머니는 노래방 도우미에 본인은 동성애자에 마약중독자이기까지 하다) 그 어떤 하나도 "제대로" 다루었다고 하기 애매한 묘사만을 남긴다. 마치 그런 느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깔을 섞었을 때 그 합쳐진 색깔과 비슷한 색깔은 아무 것도 없는 느낌 말이다. 왜 하필 작가는 이랬을까. 만약 빠져나갈 수 없는 정크의 존재론이라는 문제 제기를 위해서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느낌이다.



-아버지의 자리


마지막으로 결말에 제시되는 아버지의 상징성은 다소 뜬금 없기도 하다. 주인공이 벌이는 고통의 리턴 매치에서 계속 쓰러지고 패배할 때 그의 모든 고통스러운 존재론의 근원은 아버지라는 기원으로(이 소설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문제로는 '사생아'의 문제) 소급된다. 마지막에 아버지의 화장터에서 목 놓아서 아버지를 부르는 모습이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만큼 아버지의 위상은 확고한 것이며 바뀔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문제의 기원을 탐색했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을 비춰 보려는 것인가.



-기술/서술의 예의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소설이 논쟁적인 소재를 동시에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이 소설은 그 많은 소재 중 어느 것 하나 진드거니 다루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런 논쟁적인 소재를 선택한 이유는 일종의 효과적인 형상화밖에 없을 것이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12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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