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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 차라투스트라

herimo 2013. 4. 27. 19:20

#북리뷰 - 차라투스트라


Friedrich Nietzsche (1883-5), Also sprach Zarathustra: Ein Buch für Alle und Keinen.

Giorgio Colli & Mazzino Montinari (eds., 1968), 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VI 1, Berlin: Walter De Gruyter Verlag.

정동호 역 (2000),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책세상.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전집 13)

저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출판사
책세상 | 2000-08-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철학 고전. 니체의 집필활동 정점에 씌여진 책으로 니체 철학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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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이 일찍이 어떤 한 순간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 일이 있다면, “너, 내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일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이 된다! (534)


아주 징하게 길었던 책. 원래 계획은 한 파트에 하루씩 해서 4일 안에 읽는 걸 목표로 했는데 읽다 말다 하고 딴 것도 읽고 해서 한 일주일 정도 걸린 듯. 주안점은 "영원회귀"와 "무게"(이 부분은 쿤데라를 읽은 직후에 읽었기 때문일 듯)에 두고 읽었다.


주요하게 읽었던 대목은 다음과 같다.


"세 단계의 변화에 대하여" (38-41).

"구제에 대하여" (235-242).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260-267).

"뜻에 거슬리는 열락에 대하여" (268-273).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특히 3절 (330-331).

"건강을 되찾고 있는 자" (360-370).

"몽중보행자의 노래", 특히 10절 (533-534).


난 대체로 긴 글이나 대작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없다는 생각에 독후감을 길게 늘여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글도 대작 중 하나이고 따라서 아주 짧게 줄여 쓰도록 노력할 셈이다.


글의 구성은 "세 단계 변화에 대하여"에 나온 다음 구절에 대체적으로 조응하고 있는 것 같다.


나 이제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38)


어린아이는 순진 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된다. (41)


짐을 지고 있는 낙타, 자유의지를 포효하는 사자, 그리고 유희로써 세계를 창조하는 어린아이의 세 단계 변화는 이 글의 2, 3, 4부를 나누는 데 어느 정도의 지침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행복의 섬에 머물며(2부), 자신의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를 가늠한다("낙타"). 그러나 그는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파하고, 자신의 창조를 향한 의지를 중력의 악령과의 대립 속에서 드러낸다(3부, "사자"). 4부 및 최종부에 이르러서는 여러 사람들("보다 지체 높은 사람들")을 모으고 유희와 창조를 위해 골몰한다("어린아이").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참고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너를 위로 불러 올릴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너를 내 몸에 지니고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족했으니! 나 여전히 종국에 나타나야 할 저 사자의 오만 방자함에 이를 만큼 강하지도 못했고.

너의 무게, 그것만으로도 나는 항상 두려웠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 너를 위로 불러 올릴 수 있는 힘과 사자의 음성을 찾아내고야 말리라!

내가 먼저 예서 나 자신을 극복하게 되면 나는 보다 위대한 일에서도 나 자신을 극복하게 되리라. 그렇게 되면 나 승리할 것이고, 그 승리가 나의 완성을 확인해주는 봉인이 되어주리라” (271-272)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은 인간을 고정점을 읽고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무엇이 인간에게 더없는 무게를 주지 않으면서도 방황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창조적인 인간에게는 어떠한 행동의 원리가 필요한가?


어떤 행위도 말살될 수 없다. 어떻게 그런 행위가 징벌에 의하여 행위되지 않은 것으로 될 수 있는가! 생존 또한 영원히 되풀이해서 행위가 되고 죄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생존’이라는 징벌에서 영원한 것이다. (240)


행위가 영원히 되돌아 온다고 할 때, 그렇다면 시간은 원형 회귀의 시간을 갖는 것인가? 내가 읽기에는 니체에게 시간이 원형적인 것은 아니다. 원형적인 것은 갱신과 회복을 전제한다. 원형의 시간에서의 회귀는 행위의 보존이 아닌 행위의 소멸에 이른다. 니체에게 영원 회귀란 일종의 "순간"의 영원한 되돌아옴이다. 동시에 그것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이다.


여기 순간이라는 성문으로부터 하나의 길고 긴, 영원한 골목길이 뒤로 내달리고 있다. 우리 뒤에 하나의 영원이 놓여 있는 것이다.

만물 가운데서 달릴 줄 아는 것이라면 이미 언젠가 이 골목길을 달렸을 것이 아닌가? 만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미 일어났고, 행해졌고, 과거사가 되어버렸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만약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었다면, 난쟁이여, 여기 이 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는가? 성문을 가로지르고 있는 이 길 또한 이미 존재했었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

그리고 되돌아와 우리 앞에 있는 또다른 저 골목길, 그 길고도 소름끼치는 골목길을 달려가야 하지 않는가. 우리들은 영원히 되돌아 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264-265)



그러나 나를 얽어매고 있는 원인의 매듭은 다시 돌아온다. 그 매듭이 다시 나를 창조하리라! 나 자신이 영원한 회귀의 여러 원인에 속해 있으니.

나 다시 오리라. 이 태양과 이 대지, 이 독수리와 이 뱀과 함께. 그렇다고 내가 새로운 생명이나 좀더 나은 생명, 아니면 비슷한 생명으로 다시 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더없이 큰 것에서나 더없이 작은 것에서나 같은, 그리고 동일한 생명으로 영원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또다시 만물에게 영원회귀를 가르치기 위해서 말이다. (369)


그리고 이 부분이 고통-쾌락-영원회귀로 이어지며 유희를 통해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위버멘시는 영원회귀를 익힌 새로운 종의 인간이 된다. (우생학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니체의 위버멘시는 우생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기 보다는 귀족주의적 함의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할 듯 싶다. 여기서 귀족이란 신분이 아닌 행위를 통해 결정된다는 점을 유의해야할 것이고)


그대들이 일찍이 어떤 한 순간이 다시 오기를 소망한 일이 있다면, “너, 내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일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로써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소망한 것이 된다!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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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 인용에 의거하였고, 내 생각은 최소한으로 밝혔다. 일단 나는 영원회귀가 일종의 행동의 윤리적 준칙에 대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해설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이 개념[영원회귀]은 스스로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는 무력한 상태로 영원한 반복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이 삶을 다시 그리고 또다시 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마치 노래의 후렴구처럼 삶 속에서 되뇌어보라고 요구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하고자 하는 것들의 무게를 재볼 수 있게 된다. (Ansell-Pearson[각주:1], 122)


무게가 제거된다는 것은 쿤데라의 말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 최선이 바로 "영원회귀"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니체의 다분히 엘리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면이 저어되는 부분이 있지만서도 새로운 인간, 새로운 윤리를 향해 골몰하고 "영원회귀"라는 나름의 답을 내놓았던 그의 사상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무리의 규칙과 조화시킬 것인지가 아닐는지. 이에 대해서 탁월한 해설서로 『니체와 악순환이라는 책이 있다고 들었다. 기회가 되는 대로 참고해야겠다.


아무튼 이로써 2월의 독서 끝!


  1. Keith Ansell Pearson (2005), How to Read Nietzsche,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서정은 역 (2007), 『How to Read 니체』,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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