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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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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herimo 2013. 4. 27. 18:07

#북리뷰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2-08-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가는 것!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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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2012),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서울: 자음과 모음.


나는 김연수의 글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으로 처음 접했다. 즉, 내가 읽어 본 김연수의 소설은 딱 두 편이었는데 하나는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선 대표작이었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었다. 이 작가에게 받은 첫인상은 서사를 진행시키는 방법이 독특하다는 것이었다.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서는 산책이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서사를 얽어놓았었고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는 서술자의 위치를 조절함으로써 시간과 이야기를 얽어 놓는 수법이 독특하고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소설 작풍에서 서사 구조의 해체(dislocation: 탈구)와 재조립(relocating)은 하나의 뚜렷한 색깔을 나타내고 소설의 의미를 새로운 토대 위에서 강화하긴 하였다. 하지만 ‘글쎄?’라는 의문을 품고 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내 취향에 딱 맞는 작가가 아니라고도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꼬는 것보다는 정공법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전적으로 취향이라고 인정해줬으면 좋겠지만 아니라고 취향의 영역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한 김연수에 대한 거리두기는 2012년에 출간된 장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으면서 조금 가까이 갈 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가 2012년 한국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80년대의 사회적-역사적-개인적 상황에서 미혼모가 될 수밖에 없었던 지은의 이야기가 거꾸로 되감아진다.


우선 시작점은 카밀라이다. 2012년 현재, 태평양 연안에 살고 있는 카밀라는 양모 앤의 죽음 이후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골몰한다. 혹은 뿌리라기 보단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배했던 방황의 원인을 찾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자신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바를 받아들이고 상처를 보듬을 수 있게 되는 데는 유이치라는 연인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글을 쓰는 것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6박스 분량의 유년기에 대해 카밀라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전적으로 유이치 때문이다.


그 후 그녀의 에세이집이 출간된 후 그 책에 실려 있었던 사진 ── 자신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인이 자신을 안고 있는 사진에 대해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는다. 그녀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의 진남으로 향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찾는 일이 순탄치는 않다. 그녀는 양부 에릭과 인연을 맺은 서 교수의 도움을 받아 진남여고를 포함한 진남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기사도 내봤지만 별 달리 신통한 연락을 받진 못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찾기 이전에도 진남이라는 공간 자체가 카밀라에게는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는 공간이다. 진남에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바다에서 살게 되었고 바다를 좋아했던 것일까. 진남에 와서야 그녀는 서쪽으로 지는 해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을 도와주던 서 교수가 그들을 떠나기 전에 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이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혹은 어떻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며 어머니와 자신의 꿈의 접합점을 이야기한다.


[“…나는 오리건의 해변들을 순례하며 운동화를 찾아다녔는데, 그 일이 저를 구원했습니다. 어쩌면 그 여름 내내 내가 찾고 다녔던 건 운동화가 아니라 지난 꿈의 잔해들일지도 모르지만요.”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와 공유한 지난 꿈의 잔해들.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 (86)]


이렇듯, 카밀라에게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외상적 중핵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녀에게 100%의 어머니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어머니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는 어머니였으며 33.3%의 어머니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진짜 100%의 어머니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를 키워주고 길러준 어머니가 나의 100%의 어머니인 게 확실한가? 우리는 그런 어머니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갖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갖고 있다고 조금 더 쉽게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결코 우리 인생의 모든 진실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 사람들이 다 자기 인생의 진실을 아는 건 아니에요.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잘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나는 카밀라 양도 그런 경우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신혜숙의 말, 100)]


진남여고의 교장인 신혜숙은 그런 그녀에게 굳이 진실에 가까이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을 보탠다. 그러나 카밀라로서 자신의 근원을 알고자 하는 갈증은 그 시점에 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실의 집 앞에 선 신혜숙이 마침내 말했다. 거기에 나는 어떤 반응도 보탤 수가 없었다. 내 반응을 보고 신혜숙이 또 마음을 바꿀까 봐. (106)]


그녀는 이렇게 조금씩 진실에 다가간다. 그녀에게 어머니를 그리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과 동의어나 다름없다.


[나라는 존재, 내 인생. 엄마가 나를 낳아서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이제 내가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를 존재할 수 있게 해야만 했다. (117)]


그렇게 그녀는 어머니를 존재하게 한다. 그녀의 존재와 어머니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하나하나 안개를 걷어낸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우리의 진실을 알 수 있는가? 신혜숙 역시 본인이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카밀라에게 그녀는 카밀라가 지은과 그녀의 오빠 사이의 ‘불륜’으로 태어난 패륜의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본인의 근원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상처는 극적으로 부각되고 그 상처는 그녀가 유이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갈증과 허기에 가득 찬 존재로 만든다. 구성적 외상 앞에서 카밀라는, 지은의 문집에서 발견한 희재라는 이름을 쓰며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공고히 하려 하지만 그럴 수록 현재의 카밀라는 흔들리고 바뀌고 다른 존재가 된다. 유이치가 카밀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적고 있듯이.


[하지만 지금은 증오는 물론, 그런 고통마저도 다 지나간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야. 지나가면, 우리는 조금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 조금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겠지. (유이치의 편지 중, 146)]


제1부 카밀라의 결론은 끝없는 절망만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진실은 이렇게 잔혹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지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카밀라는 희재라는 이름 외에는 자신의 존재를 정박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은이 지금도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그녀의 말처럼 이제 희재가 된 카밀라가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를 존재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떨까?


다소 환상적인 상상을 통해 2부가 열린다. 2부의 서술자는 이미 죽은 지은, 혹은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유령이 되서 카밀라/희재를 보고 있는 지은이다. 제1부에서 지은의 출산을 통해 희재가 있었고 앤으로 인해 카밀라가 있었기에 그 과정을 역으로 더듬어가는 과정이었다면 제2부에서는 희재의 생각으로 인해 지은이 존재하게 되고 죽어버린 지은은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지은을 생각함으로써 다시금 현재(2012년)에 참여하게 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미' 죽은 지은의 생각, 228)]


1987년과 2012년은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함으로 인해 하나의 서사 안에서 이어진다. 생각은 ‘날개’가 되어 심연과 심연을 가로지른다. 카밀라/희재의 서사와 지은의 서사는 한 자리에서 얽히게 되며 전자는 후자의 의미를 일정한 틀 내에 고정시킨다. 동시에, 후자(과거)는 전자(미래)의 의미가 완전히 고정되지 않고 진동함을 주장한다. 과연 의미를 고정시킨다는 것이 진짜 가능한 일인가? 누가 진실을 아는가? 지은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누가 진실을 알고 있는가?


제3부의 서술자는 ‘우리’이다. 카밀라 포트만/?희재와 정지은이 서로를 생각함으로써 서로가 존재할 수 있게 된다면 정지은을 아는 사람들의 생각만큼이나 정지은의 존재가 다층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정지은의 친구였던 이들은 정지은과 그녀의 아이에 대해 회고한다. 그리고 그 회고의 숫자만큼의 진실이 한 겹 한 겹 자신의 표피 자체가 진실의 외피라고 주장한다.


신혜숙은 카밀라/희재가 최성식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그를 의심해왔다. 그래서 그녀는 적극적으로 태어난지 얼마 안 되는 아이를 입양보냈다. 자신의 과거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아이’가 최성식의 아이였다고 생각한다. 진실의 복잡성은 보다 겹겹이 둘러쳐진 외피 그 자체에 있다. 최성식은 정지은과 어떤 관계까지 맺었는가? 그 둘은 서로를 사랑했는가?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가?


카밀라/희재가 진실의 표피들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접근하게 되는 곳은 1980년대다. 1980년대에 정지은의 아버지는 노사분규를 벌였고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했다. 농성 뒤에 남은 것은 상실과 상처뿐이다. 조금 더 파고 들면 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 정지은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아버지가 내려오기를 간절히 희망했던 아이도 있다. 동시에 아버지가 떨어져서 사경을 헤맬 때 그를 구하기 위해 어딘가로 달려갔던 아이도 있다.


진실이란 것이 실론 어떤 것인지에 대해 카밀라/희재는 그 시절을 똑같이 살 수 없고, 지은은 말할 수 없으며, 지은을 아는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기 자신의 진실이라 믿는 바를 위해 생각을 이어간다. 그 시절에 접근하는 길은 이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을 때 제4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특별전이 열리게 된다.


특별전은 말 그대로 특별전일 뿐이기에 우리는 꼭 이것이 오직 하나의 진실을 암시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제2부 마지막에 자신이 긁어 모은 진실의 단편들을 얼기설기 이어 결국 바람의 말 아카이브 앞에 도달한 카밀라/희재가 자신의 이름도 ‘희재’라는 남자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됐음을 다시금 상기한다.


미래의 사건은 결과적으로 과거의 사건과 조응함으로써 희재가 희재를 만나는 것이 가장 최후의 사건이라면 지은이 희재를 만난 것이 사실은 가장 ‘처음’의 사건이었음이 확실해지는 것은 두 사건이 맺고 있는 모종의 관계에 의해서다. 그것이 ‘시작’이어야 하는 것은 그 미래에 ‘희재’와 ‘희재’의 만남이 있기 때문이고, 반면에 이 둘의 만남은 지은과 ‘희재’의 만남으로까지 소급된다.


해체된 서사는 이제 그 외피를 긁어내고 하나의 꼬인 나선을 드러내는 듯하다. ‘진실’이라는 완벽히 도달할 수 없는 축을 점근선적으로 따르며, 과거와 현재가 나선을 그리면서 서로 꼬여 있는 셈이다.


1980년대, 미혼모, 2012년, 누군지 모르는 아버지와 같은 모티프들은 정확히 권여선의 『레가토』에서도 연주되는 주제어들이다. 권여선이 레가토 주법에서 착안하여 현실과 과거를 교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두 시대 사이의 연결점을 찾고 이를 특유의 문체 속에서 단단한 구조와 의미를 획득하도록 했다면 김연수의 전략은 일견 그 반대로 보인다. 하지만 말하고 싶은 바는 같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 아닐는지…


그(김연수)는 이야기의 시간을, 이야기를 말하는 화자(서술자)를, 사건의 의미를 단일하지 않고 진동하는 여러 겹의 메시지들로 중첩시키고 그것 사이에서 단일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결국, 모든 진실이라고 믿어졌던 것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부정된 뒤, 부정되지 않은 진실이 진실로 남는 셈이다. 진실이라는 부서지기 쉬운 가느다란 선을 싸고 도는 과거와 현재. 두 시간을 구출해내 같은 무대에 올리고 있는 작가의 역량이 새삼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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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발췌만.


총평 식으로 간단히 달면, 마음에 들었다. 『레가토』(2012)와 비슷한 구석도 있었는데 레가토가 선율을 타는 방식으로 80년대와 2012년을 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시점의 해체, 2인칭 화자의 도입, 무엇보다도 서사의 해체와 재조립을 통해서 서사를 도드라지게 부각함. 이야기에 매몰되지 않는 이야기의 가능성이랄까.


군데군데 아포리즘적인 문체도 나타나는데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라는 228페이지의 경구가 특히 좋음. 물론 이게 제목이기도 하지만. 제목을 참 잘 뽑아냈다는 느낌. 이 작가는 진짜 제목을 잘 짓는 듯.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2008),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2005) 등등. 제목이 참 이쁘다.


음 근데 이렇게 해버리니까 굳이 더 달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말을 가타부타 더 하는 것도 웃기니 그냥 이걸 페북용으로. 각잡은 리뷰는 싸이에 올려야겠다.



“…나는 오리건의 해변들을 순례하며 운동화를 찾아다녔는데, 그 일이 저를 구원했습니다. 어쩌면 그 여름 내내 내가 찾고 다녔던 건 운동화가 아니라 지난 꿈의 잔해들일지도 모르지만요.”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와 공유한 지난 꿈의 잔해들.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 (86)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 사람들이 다 자기 인생의 진실을 아는 건 아니에요. 자기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잘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나는 카밀라 양도 그런 경우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100)


진실의 집 앞에 선 신혜숙이 마침내 말했다. 거기에 나는 어떤 반응도 보탤 수가 없었다. 내 반응을 보고 신혜숙이 또 마음을 바꿀까 봐. (106)


나라는 존재, 내 인생. 엄마가 나를 낳아서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이제 내가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를 존재할 수 있게 해야만 했다. (117)


하지만 지금은 증오는 물론, 그런 고통마저도 다 지나간단느 사실에 그저 놀랄 뿐이야. 지나가면, 우리는 조금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 조금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겠지. (146)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28)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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