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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herimo 2020. 3. 11. 02:22

9일

 

월요일 날이 밝자마자 밥도 안 먹고 휴학계를 완전히 처리하러 갔다. 코로나 때문인지 학교가 휑뎅그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정이 아주 사소하게 꼬이긴 했지만 별 문제 없이 휴학계를 제출하고 대출 도서를 반납했다. 도서관에도 무언가 돈 같은 것을 내야 할 줄 알았는데 2017년부로 휴학생의 도서관 이용은 별도 서류를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안심했다. 결과적으로 생각했던 시간에 맞춰서 일을 끝냈다. 내려오는 길에 학교에 두었던 만년필 잉크를 챙겨오는데 셔틀에 두고 내려서 얼른 길을 건너 방금 전에 내렸던, 되돌아온 버스를 잡아 두고 내린 쇼핑백을 찾아왔다.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원래 돈부리를 먹으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임시휴무라고 하여 그놈의 샤로수길을 뒤져 월요일 영업하는 식당을 겨우 찾았다. 팟타이를 먹었는데 그저 그랬다. 원래 가는 곳들은 다 월요일 휴무이기도 했지만 예전에는 이것보다 맛있었는데 내 입맛이 바뀐 것인지, 식당 맛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내 컨디션이 별로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것도 코로나 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남김 없이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어떤 음식을 짖이겨 먹을 때, 우겨 넣을 때의 감각을 퍽 좋아한다. 특히 목이 막히기 직전까지 먹거나 너무 큰 덩어리를 삼켜서 딸꾹질이 날 때에 무언가를 '먹었다'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지고, 그 불편함만이 식사를 증거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 팟타이도 무언가 맛은 없었지만.. 그런 감각을 즐기며 열심히 먹었다.

 

카페에 가서 커피만 먹고 나올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밖에 더 있고 싶다는 오기를 부렸다. 카페에 앉아서 문제집을 꺼내 문제를 조금 풀었다. 당연히 많이 틀렸다. 잠도 네 시간 정도밖에 못 잔대다가 카페 안은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답을 보고 문제를 다시 보니 또 다 수긍이 가서 별 생각 안 하고 덮었다. 집에 와서 훨씬 더 조용한 곳에서 마저 문제를 풀었다. 시끄러웠던 것 때문만은 아닌지 여전히 평소보다 많이 틀렸다.

 

그 사이에 부랴부랴 저녁 약속을 잡았다. 내가 아주 친한 친구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그런 자리였다. 안 늦으려고 열심히 걸어 갔는데 그래도 내가 제일 늦게 식당에 들어갔다. 대신 난 고기를 구웠다! 면죄부를 얻은 셈이다. 고기 굽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니라는 걸 알고 조금 놀랐던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굽는 사람만 또 굽게 돼서 이런 일이 영구히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이 들었지만 열심히 굽느라 사실 딴 생각을 할 틈은 별로 없었다. 지글거리는 소리, 흘러 내리는 돼지 기름, 그 위에 콩나물 무침과 적당히 익은 김치를 올려 다시 치직 거리는 소리가 나게 눌렀다. 고기가 다 익으면 적당히 잘라 불판의 위쪽으로 옮겨 열이 덜 닿게 했다. 다들 잘 먹었고 식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나로서는 세 친구 모두 오래 만난 친구들이라 아주 편했다. 밥도 한 그릇 시켜서 나눠 먹고 냉면도 한 그릇만 시켜서 나눠먹고 '아 그것도 먹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지 않는 풍족한 식사는 오랜만이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자주 가는 칵테일 바를 가려고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있는 휴무라 자주 안 가지만 좀 더 좋은 칵테일 바로 걸음을 돌렸다. 가는 길에 낙성대 최고 인기 빵집을 지나게 되었다. 확진자 동선에 나온 적이 있어서 그런지 출입을 위해서는 마스크를 꼭 써야 한다고 했다. 마스크를 쓰고 빵을 두어 개쯤 접시에 담고 있는데 마스크가 없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친구가 빵 하나만 대신 사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빵값을 받지 않았네. 심지어 밥값도 나누지 않았잖아..?! 내일 연락을 해봐야겠군..

 

아무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칵테일바는 역시나 너무 만족스러웠다. 어두운 공간에 앉아 편하게 이것저것에 대해 험담을 했다. '걔네는 왜 항상 그러지?', '그거 너무 별로지 않니?', '너무 구려'... 그래도 싫은 것보다는 좋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고, 적어도 나쁜 것이 좋아질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혹은 희망한다).

 

그 와중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우정을 무조건적인 의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보자고 해도 일단은 그냥 볼 것 같다. 물론 싫어하는 티를 아주 많이 내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설적으로 보고 싶다든가, 봐야 한다든가, 그런 류의 부탁 혹은 요구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에게 거절할 자유는 없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면에서 나름 로맨티스트라 (내 친구들은 뭐 그런 것도 다 로맨스냐고 뭐라 할 거 같긴 한데) 장애물을 다 부숴버리고 다가오는 것이 그 자체로 흥미롭고 싫지도 않다. 스토커로 발전한다면, 음 그건 좀 곤란하겠지만.

 

아무튼 집에 와서 단어 100개 외우고 잤다. 머리가 아주 굳진 않아서 다행이다.

 

 

10일

어제보다 좀 더 단조로운 하루를 보냈다. 아주 가깝지는 않은 친구랑 약속을 잡아서 인천에 갈 계획이었는데 친구의 위염이 도져서 가지 못하게 됐다. 붕 뜬 시간은 허탈하게 여길 것인지 우연히 주어진 선물로 생각할 것인지 조금 고민스러웠지만,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밥을 먹고 빵을 샀다. 빵을 사고 나니 어느새 4시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집에 와서 문제집을 좀 풀어보려고 했지만 졸려서 잘 되지 않았다. 저녁 잠을 조금 자고 일어나서 문제를 풀었다. 거의 다 맞는 걸 보니 역시 어제는 피곤해서 문장이 눈에 읽히지 않았구나, 하고 안심했다.

 

코로나가 불러온 답답한 기후 때문에 밖에서 숨을 쉬는 게 버겁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한동안 미세먼지도 많았어서 정말 답답했는데 오늘은 마침 맑아서 산책 메이트를 공개 모집했더니 다행스럽게도 소중한 동네 친구 한 명이 응해주었다. 관악구 이곳저곳을 방만하고 비효율적으로 걸어 다녔다.

 

하지만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오뎅바(!)에 가서 얼큰한 어묵탕(오뎅이라고 하기엔 재료가 좀 부실했다..)에 맥주를 한 잔씩 걸치고 나왔다. 이 가게가 망하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후미진 데 있는 가게를 찾아가는데 멀리서 가게 간판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너무 반가웠다. 얼마나 반가웠냐면 오늘 본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반가웠다. 좋은 가게들이 말없이 사라지면 나는 좀 외로워져..

 

요즘 이 산책 메이트 친구를 만나면 순문학 욕하고 장르문학이 미래라는 얘길 하는 게 루틴화되어 있는데 이 얘기는 몇 번을 다시 해도 참 맞는 말이고 재미가 있다. 그래도 재밌게 읽은 순문학 얘기도 좀 하고.. 그외엔 대부분 실없는 얘기를 했다. 연예인 스캔들이 진짜였으면 좋겠다든가 뭐 그런 거. 바 끄트머리에 앉은 손님들이 게이를 인정하냐 마냐 얘기를 크게 해서 '아 이게 진짜 코리아지'하는 기분이 들어서 흥겨워졌다.

 

적당히 자제할 줄 아는 사람, 즉 어른이 된 것인지 우리 둘 다 한 시가 되기 전에 집으로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바로 결제하고 길을 나섰다.

 

친구랑 술집에서 반지를 맞출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친구가 무척 부러워해서, 아 이래서 결국 동성결혼 담론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거야, 정말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

 

우리가 너무 약해서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겠거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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