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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knowledgement
십 년의 끝 본문
초등학교 때 방학 숙제로 꼭 일기를 일주일에 세 편 이상 쓰라는 숙제가 나오곤 했다. 나는 그런 것을 하나하나 챙기는 것을 그때부터도 무척 귀찮아했고, 방학마다 마지막 날에 스무 편 남짓 되는 일기를 몰아쓰곤 했다. 나는 이때부터 내가 무언가를 꾸준히 하기는 참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나는 게으른 아이였고, 내가 아는 나의 게으름은 그것이 내밀한 만큼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게으른 아이는 게으른 중학생, 고등학생을 거쳐 드디어 게으른 대학생이 되었다. 내가 2010년을 맞춰 대학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2010년부터 2019년까지의 10년동안 대학에서 지냈다. 10년을 배웠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배우고 있고, 가끔 직업으로서의 글쓰기를 한다. 문제는 이 직업으로서의 글쓰기가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게 된다는 것이지만, 몇 단락 뒤까지 이 이야기를 잠시 미뤄두겠다.
대학생이 되어서 내가 처음으로 배운 것들은 대개 무언가를 기념하는 인간 활동, 즉 종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학술적 대상으로 잘 여겨지지 않는 대상을 배우고 있다. 나의 친지들 사이에서 종교에 대한 반응은 둘로 나뉘었고, 이 구분은 꽤 선명했다. 종교가 비이성적이고 독단적이고 희생을 강요한다는 이유로 종교를 공부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편에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는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전자와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대학에서 몇 년간 공부를 하다보니 나중에는 대립하는 두 판단의 전제가 모두 어느 정도 일리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튼 내가 배운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구조나 형식, 내용, 상황 등에 관한 것이었고, 내가 가장 관심을 두었던 영역은 의례에 대한 것이었다.
의례에 대한 학술적 지식을 늘어놓는 것은 이 글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의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하는 것이 왜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도입부가 되어줄 것 같다. 내가 의례에서 아주 재밌게 생각하는 부분은 아무리 비합리적인 내용을 가진 의례라도 메타적 측면에서는 매우 합리적이라는 사실이다. 여러 지역에서 구비 전승되어 오고, 근대 유럽 학자들에 의해 채집된 다양한 형태의 송구영신 의례는 그러한 사실을 예증한다. 내가 사례로 언급하기에 가장 편한 의례는 아무래도 여러 수업의 교재로 쓰여 제일 여러 번 읽을 수밖에 없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송구영신 의례인데, 다른 여러 지역의 송구영신 의례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의 의례는 기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다시 질서를 되찾는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 섹슈얼리티를 공부하고 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기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가 난교라는 점이 꽤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무튼, 송구영신 의례의 교훈은 옛것을 보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10년을 넘긴다는 사실을 기념하고 싶어한다. 일기쓰기를 귀찮아 했고 여전히 불성실한 기록자인 나 역시 그런 기분에 도취되어 일기씩이나 쓰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하는 것은 분명히 선언이지만, 그 선언이 힘을 잃고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여러 가지 귀찮은 절차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의례적 동물인 셈이다.
종교에 대한 공부가 나의 개인적 삶을 해명하는 데 무용해썬 것은 전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했지만 학부시절의 공부는 정상과 비정상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기초적인 아이디어를 상당히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과 항상 불투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내가 뭘 원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항상 뿌연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런 불투명성이 나의 섹슈얼리티와 맺고 있는 관계는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지 10년도 더 된 오늘에 와서도 완전히 해부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것이고, 심지어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변하기도 했던 것 같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의 의식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와 나의 욕망 사이에 선후 관계나 인과 관계를 설정하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것들을 임시적으로나마 분리해 볼 때 상황이 분명해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복잡한 관계는 그저 내버려 둘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파고 들 수도 없는 영역으로 계속해서 내 주변을 맴돌고 있다.
게다가 특정한 욕망이 사회에서 갖게 되는 특수한 맥락이 있다. 그런 맥락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던 몇몇 사건들 때문에 당시로서는 말로 옮기기 어려웠지만, 나는 내 욕망이 나만의 것일 수 없다고 여기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그전까지 나와 '사회적으로 같은 집단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도 결심을 하면 실행에 옮기는 건 빠른 편이라, 간단한 이니시에이션을 거치고 한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 대학 성소수자 동아리를 내가 속한 집단이라고 말하는 게 거리낄 것이 없어질 때쯤, 2010년이 시작되었다. 나는 미숙했지만 일을 하기도 했고, 동아리 이름을 건 행사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내가 모르는 시점에서 정해진 이름이 아니라 새로운 이름을 쓰는 데 익숙해졌다. 이름을 새롭게 짓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아도 의례적이었다. 누군가 나를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를 때마다 나는 내가 있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몇 년 간 만들어져 온 나의 일부를 갑작스럽게, 그러나 차근차근 넘겨냈던 것이 나의 2010년이었다.
그 후, 몇 해 동안 나는 2010년에 만들어진 길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그 사이에 군대를 다녀왔고, 거기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지 못했던 대부분의 책을 읽었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활동 단체를 만드는 데 주력 멤버로 참여하기도 했고, 잠깐이지만 외국에 나가 있기도 했다. 한국을 나가서는 읽어야 한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텍스트들을 많이 접했다. 아무튼 사는 곳이 바뀌고 읽는 것이 많아지고 몇 해가 지나도 내가 보내지 못했던 과거의 나도 남아 있었다. 나는 10대 때부터 경제적으로 빨리 독립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은연중에 이루어지는 교정의 순간은 선연하고 공포스러운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교정이 뚜렷한 형태를 갖춰 나를 덮치기 전에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었다. 가장 위협적인 형태의 교정은 아무래도 가족을 경유해서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기에(사실 중산층 가족에서 성장한 나로서는 그 외에 어떤 형태의 교정이 나를 가장 위협하는 것인지 제대로 상상할 수 없었기에) 나는 가족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독립하고 싶었다.
하지만 욕망이란 건 역시 복잡한 것이었다. 나의 고집의 모든 부분을 교정 당하길 두려워하는 성적 욕망의 탓으로 돌리긴 어려워 보이지만 아무튼 나는 나의 욕망에 솔직하고자 수 년간 노력해왔었다. 즉, 고집이 센 편이었고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3, 4년 전쯤 내가 '직장'을 갖기에 부적합한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오랫동안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은 곤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수치스러운 경험이었다. 물론 내 안에서 이런 인정의 순간은 갑작스럽게 찾아왔긴 했지만 그게 그때까지의 내 삶을 앗아가거나 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겉보기에 평상시처럼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시간을 따로 떼어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면서 그때까지의 내가 아직 보내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떠내려 보낼 수 있는 의례를 준비했다. 새로운 공동체에 귀속되는 의례가 어린 나를 떠나보내기에 제격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 가족과의 관계도 이전과 닮았지만 분명히 다른 형태로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상상 속에서 나의 가족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교정자가 될 수 있을 법한 사람들로 그려졌지만, 애정은 그런 깔끔한 형상을 허락하기엔 점성이 높은 심리적 작용이었다. 나는 이 길이 나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설득했다. 아빠와 엄마(나는 여전히 슬하의 자녀이므로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는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수긍했다. 내가 여기 모두 적지는 못했지만 근 몇 년간 가족들 사이에서 잘 숨기지 못했고, 때때로 숨기길 포기했던 불안, 불만, 화 따위의 기억도 수긍 과정에서 약간은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다.
10년을 마무리하려는 지금, 나는 그때 비틀어 놓은 길 위에서 비교적 잘 살고 있다. 물론 나 개인에게 주어진 삶의 전망은 그때와 비교해서 크게 나아진 것이 없긴 한데, 아무튼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다. 아마 내년에는 또 다시 제법 큰 결과를 야기할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완전히 길을 트는 일은 아니고 예상했던 골목이다. 다만, 지금 기록하고 있는 과거의 순간들이 그때는 지금처럼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요 근래 하고 있는 몇 가지 일들, 어떤 관계들 중 몇몇은 다음 10년의 끝에서 지금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내 삶을 이루는 중요한 조각들이 될 것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과거를 복기해보니,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무언가를 보내고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두려움을 감수하는 법이다. 아주 단단하게 붙들려 있던 무언가를 보내는 일도, 보낸다는 게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만 아니라면 아무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속에 있을 아직은 알 수 없는 사소하지만 즐거운 변화를 기대한다. 곧 십 년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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