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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가 어쨌다구?

herimo 2013. 4. 26. 01:15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서울: 새물결, 2008. 

Slavoj Žižek,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2.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저자
슬라보예 지젝 지음
출판사
새물결 | 2008-01-0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전체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도발적인 이의를 제기하는 책....
가격비교



누차 밝혔듯이 나는 지젝이나 라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것치곤 이것저것 많이 읽었지만...내 라캉 or 지젝에 대한 주저함은 버틀러의 지젝에 대한 비판과 공명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보다 정확히는 뭔가 불만스러운 부분들이 버틀러의 설명에 힘입어 명료해졌다고 봐야겠다). 다소 길지만 (그리고 번역의 가독성도 떨어지지만 나는 원문이 없으므로...ㅠㅠ)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지젝은 우리에게 광범위한 맥락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하나 제공하는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사례를 초월하는 동일성 구성 기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일군의 두려움과 불안이 출현하고 이 두려움과 불안에 하나의 이름이 소급적으로, 또한 자의적으로 귀속된다. 갑자기 저 두려움과 불안의 묶음은 단일한 사물이 되고, 그 사물은 교란하는 게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원인 혹은 근거로 기능하게 된다. 처음에 사회적 불안의 혼란스런 장으로 나타난 건 어떤 수행적 작용을 통해 규명될 수 있는 원인을 지닌 질서 잡힌 세계로 변형된다. ... 의심할 바 없이 이 정식화에는 대단한 분석적 힘이 있으며, 그것의 탁월함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사회 비판가로서의 지젝이 받아 마땅한 명성을 분명하게 설명해준다. ... 하지만 이 수행적 작용은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가? ... 그 어떤 맥락에서 그 어떤 대상으로도 이항될 수 잇는 도구로서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출현 조건을 부인하는 이론적 물신으로 작용한다. ... 지젝에게 비판적 계기는 우리가 이 구조가 무너지는 걸 볼 수 있을 때, 또한 이름을 통해 단일한 사물에 귀속된 실체적이고 원인적인 힘이 자의적으로 귀속된 것으로 드러날 때 출현한다(《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49-51)."


오지게 가독성이 떨어지는 번역이지만 주디스 버틀러가 지젝의 공식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은 지젝이 라캉적 실재를 다루는 방식으로 보인다. 예컨대 지젝은 '실재'를 상징계에 내속적인 것으로, 상징화에 저항하는 외상적 잔여로 설명한다.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다양한 설명들의 연쇄 속에서 '전체주의'가 실상 (자유)민주주의의 외상적 잔여이며, 민주주의에서 상징화할 수 없는 증후로서, 일종의 구멍마개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의견은 매우 전체주의적이군요?"라고 말하면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큰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재를 다루는 방식이 진정으로 라캉적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내가 수긍하기 힘든 지점은 '무엇이' 실재의 자리를 점유하는가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실재에 대한 불만은 특히 '성차'가 실재로 등재된다는 점에서 첨예해진다:


"초월적 근거로서의 성차가 단지 이해가능성의 지평 내에서 형성되는 게 아니라 그 지평을 또한 구조화하고 제약한다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초월적' 성차는 문화 내에서 이해 가능한 대안으로 간주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능동적이고 규범적으로 제약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 실로 지젝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흥미로운 차이는 아마도 기원적 폐제(foreclosure)의 지위에 관해서일 것이다. 나는 그런 폐제가 이차적으로만 사회적인 게 아니라 가변적인 사회적 금지들이 작용하는 방식이라는 걸 제안하고자 한다(《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209-210, 번역 일부 수정)."


예컨대 성차가 주체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실재로서 격상되는 것은 그것의 자리를 역사에 초월적인 것으로, 곧 결코 얻을 수 없지만 바뀔 수도 없는 판본으로 역사적 투쟁의 외부에 머무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지젝의 이에 대해 성차, 나아가 실재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완벽한 여성, 혹은 완벽한 남성이 결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성차의 실재적 성격이 더욱 잘 나타난다고 응수한다.


그렇지만 어째서 성차라는 실재는 늘, 혹은 적어도 라캉에게, '두 개'의 항 사이에 진동하는 주체들을 생산해내는가? '자기표상이 무너지는 제3항'으로서 실재는 분명이 주체의 구성에 있어 탁월한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실재'가 될 수 있는가? 지젝이 이것이 정해져 있다고 주장할 리는 없으나 라캉의 몇몇 명시적 주장들을 옹호하는 지젝의 모습에서 그러한 모습은 라캉의 모습을 실재화하려는 그의 욕망이 들어 있는 것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다시 '전체주의'로 돌아와 보자. 내가 생각하기에 지젝이 말하는 '전체성'은 일종의 근원적/급진적 혁명(Radical Revolution)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의 다분한 문제들은 파편화된 이해관계를 만족시키는 데서 절대로 완전히 해결될 수 없으며 이 사회(때때로 지젝은 이를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등으로 명시하기도 하는데) 자체에 대한 '판 갈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마치 '전체주의'인 양 오도되는 사회에서 지젝의 불만은 보다 더 구체화되고 있는 게 아닐까? 물음표로 끝나는 이유는 아직 3장까지밖에 안 읽었기 때문이다. 1~3장까지는 일단 전체주의에 연결되는 가장 보편적인 생각들, 예컨대 홀로코스트와 굴락, 히틀러와 스탈린 등을 특유의 재치와 입담으로 풀어내고 있다. '전체주의'라는 기표 아래에 무수히 많이 연결된 기의들, 생각들을 탁월하게 분석해내는 지젝 특유의 글발을 감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칸트와 같이 읽고 있기 때문에 더 재밌게 느끼는 듯도 하다.)


아무튼 여까지 대략적인 읽기 전~3장까지 리뷰인데...책 내용보다 인용문이 많다? 다 읽고 제대로 리뷰토록...올해 마지막으로 읽는 책이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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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올렸던 독후감과 이어서 읽어주시길(2012.12.28).


지젝은 '전체주의'라는 혐의가 그것에 대한 말하기 자체를 폐제시켜 버리는 일종의 '구멍 마개'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그로 하여금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스탈린주의 등을 분석하는 데서 멈추지 않게 하고 4장 <우울증과 행동>에서는 1장 <신화와 그것의 변천>과 연관하여 종교 및 종교적 심리에 대한 분석을, 5장 <문화 연구는 정말 전체주의적인가?>에서는 문화 연구와 과학주의(특히 진화론)를 견주도록 한다.


책 자체가 방대한 내용을 건드리기 때문에 일일이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영양가 없는 일이겠고, 5장 <문화 연구는 정말 전체주의적인가?>를 중심으로 리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지젝이 인용하는 도킨스의 다음과 같은 문화 연구 비판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일전에 나는 어떤 문학 비평가가 쓴 '이론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놀라지 마시라, 거기서 '이론'이란 오직 '문학 비평 안에서의 이론'을 뜻할 뿐이었다. …… 지극히 좁고 편협한 문학적 용도로 써먹기 위해 '이론'이라는 용어를 공중 납치해갔던 것이다. ─ 이건 아인슈타인이나 다윈에게는 이론이 없다는 식으로 떠드는 거나 마찾가지 아닌가" [John Brockman ed., The Third Culture, New York: Simon & Schuster, 1996에서 재인용한 것을 Žižek (2008)에서 재인용].


도킨스가 말하기에 '이론'이라는 것은 특정한 지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론이란 것의 지위는 이론이 아닌데 이론인 척 위장하는 '언사들'로 하여금 점유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짜' 이론가들에게는 모욕적인 일이다. "'이론'이란 오직 '문학 비평 안에서의 이론'을 뜻할 뿐이었다."라는 도킨스의 표현에서 보이듯이 도킨스는 이론이란 좀 더 넓은, 누가 보더라도 맞는 것들에만 붙여질 수 있는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도킨스가 주장하는 진화론이 인문학 내에서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가?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 진화론이라는 심각한 오역을 통해서만 인문학에 공유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킨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과학만이 이론이며, 이는 객관적 자료의 조사와 합리적 추론에 따라 누가 하더라도 동일한 결과에 귀착하는 활동에만 한정되어야 한다.'


정말로 그러한가? 도킨스뿐만 아니라 그의 적대자인 J. 굴드조차도 원하는 것은 어떠한 일관된 체계 속에서 세계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만물 이론'일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지젝에 따르면 헤겔 이후에 철학에서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젝에 따르면 칸트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해체론 및 프랑스적, 포스트모던 문화 연구들에서도 이는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여진다. 지젝이 과학에 대해 예로 드는 것은 양자론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지젝은 분명히 선을 긋는다. "나는 양자 물리학과 천문학을 이런 식으로 몽매하게 전유하는 것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반대하고자 한다." 다만 과학적 실재론의 옹호자들(브리크몽과 소칼 등)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양자 물리학이 상대주의적/역사주의적으로 오용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 같으므로 그들의 '주관주의적' 공식들을 그들 개인의 철학으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은 어떠한가?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들 개인의 철학에 머무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정설화된 물리학적 공식 해석이 아닌가? (지젝은 여기서 코펜하겐 해석을 이야기한다)


컨텍스트를 보다 급진적으로 바꿔보자. 경험주의적으로 단련된 인지과학적 진리들은 오늘날 윤리학에 있어서 어떤 진리치를 가질 수 있는가? 이것은 인지과학이 볼품없다거나 쓸모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으로 물리학을 설명할 수 없듯이, 자연과학적 진리가 인문학의 진리-가치에 개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지젝은 현대사회의 진리값(truth value)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최근 양자 물리학과 우주론의 급부상은 가장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질문들의 맹렬하고도 공격적인 복권으로 특징지어볼 수 있지 않을까?", 뒤이어 이렇게 덧붙인다. "역사주의적 상대주의가 과연 과학자들의 소박한 실재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336-337).


(아래 문장들은 지젝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분명히 문화 연구 역시 역사주의적 상대주의를 (역설적으로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고, 대중적 과학주의(지젝이 '제3의 문화'라 부르는 것) 또한 소박한 실재론을 절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서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 같진 않다. 문화 연구와 대중적 과학주의가 서로의 대안이 되기 위해선 각각 그들의 준거 지점을 포기하는 행위를 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푸코가 소비되는 방식도 이와 연관이 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자연과학 전공을 하는 친구로부터 푸코의 이야기가 '과학계'에서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예컨대 이렇다. "정신병이라는 병리학적 실재가 담론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푸코적 입장은 정신병에 대한 약물적 치료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일군의 학자들이 모두 이러한 오해를 받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내가 읽기에 푸코가 『정신병과 심리학』 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저러한 태도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것이다. 푸코는 인식론적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혹은 우리 사회는 정신병자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 이에 대해 고고학을 거쳐 계보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담론' 개념은 다양한 언어적/표현적 실천들을 다루는 개념이다. 명확히 말하자면 푸코는 담론을 통해 정신병자의 정신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푸코는 에이즈를 치료하는 것이 담론이라고 말했던 것이 아니라 에이즈에 걸린 사람을 '성적으로 문란한'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만물 이론적 욕망은 어떻든 이러한 것들을 하나의 체계 내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정신병을 치료하는 약물이 과연 병에 관련된 부당한 대우마저도 고칠 수 있는가? 모든 이의 병을 치유하면 그만이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혐오의 발화와 실천들은 분명히 어떠한 인식소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고 병자는 그것이 발화되는 계기를 제공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소들을 전환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적 탐구가 인간을 어느 곳으로 데려갈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미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든, 그것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기에 서로 다른 입장을 존중하는 태도는 필요하다. 인간의 미래는 각기 다른 이론이 거대한 모자이크를 그리는 것일 수도 있고 여러가지 재료가 한데 섞인 조형물(만물 이론)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상대방을 알기도 전에 깎아내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그러한 접근은 필연적으로 소통을 낳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우리의 소통과 실천에 '구멍 마개'가 되는 것에 저항해야 한다. 지젝이 전체주의라는 기표 아래에 깔린 다양한 사례들을 다층적으로 해석하며 도발적으로 묻는 것("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은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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