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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세지윅 《사랑에 관한 대화》 발췌 번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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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세지윅 《사랑에 관한 대화》 발췌 번역

herimo 2023. 3. 5. 16:24

 

Sedgwick, Eve Kosofsky. “A Dialogue on Love.” Critical Inquiry, vol. 24, no. 2, Jan. 1998, pp. 611–31, https://doi.org/10.2307/1344181.


pp. 611–13

 

환자 (1992)

명백하게도 나는 환자가 되고 싶다. 섀넌은 "환자가 아니라 내 내담자(clinet)이라고 불러야 해요"라고 말하면서도 "대학원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바꾸기엔 너무 번거로운 것 같아요"라고도 말했다.


게다가 자는 환자(patient)가 좋다. 인내심이 많은(patient) 편이기도 하고 말이다. 섀넌도 그 말을 좋아하니, 환자
라는 단어가 나를 멀리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환자가 겸손한 단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단어

 

바람. 그렇다. 내 행복이라는 문제에 대해 대해 다른 사람이 많은 권한을 갖기를 바랐다.

 


 

메시지를 남긴 다음 날, 전화기를 통해 친근하고 남성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중서부의 단단한 억양이 섞여 있었다.

 "이브 세지윅? 섀넌 밴위입니다.

아! 저를 찾으셨나요?"

 

그리고 대기실에서 그 사람에 대한 머릿속 이미지가 떠올렸던가? 잘생기고, 날씬하고, 옷을 잘 차려입은 치료사 남녀가 햇볕이 잘 드는 넓은 진료실에서 환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환자를 안내하고 ….

나는 예상을 해보며 남자들을 한 명씩 바라본다.

 

그리고 희끗희끗한 부드럽고 덥수룩한 수염의 섀넌이 계단을 내려와 내 시야로 들어오면서 내게 주었던 기괴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던 그 충격을 지금 기억해내려고 애써 본다.

 

큰 얼굴에, 풍채가 좋은—

퉁퉁한 가슴, 긴 팔, 짧은 다리,

난쟁이 같아

 

그리고 의심 할 여지없이 아름답게 다림질 된

 

후식 사탕 포장지가 떠오르는

초록색 반팔 면 셔츠를

둥근 허리 춤에 집어 넣어둔

 

채였다. 9월 초 더럼(Durham)의 날씨가 평소처럼 더웠다면 그는 이마를 닦을 손수건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친절하게 소개하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와중에 내가 건넨 인사말은 잘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공간에서 덩치 큰 중년 여성과 부드러운 말소리를 나누는 첫 만남이 그에게는 평범했을까? 어쩌면 이게 어떤 편람에 있을지도 모를 우울증의 비밀스러운 정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위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앉아서 그에게 말했다), 우울하다는 말이 나에게 맞는 단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울하다는 말은

 

모두가 말하는 말이에요.

요즘 사무실에서

많이 우는 저를 두고요.

 

(이 말을 하는 동안 눈물이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우울증을 안다고, 내 우울증의 역사를 안다고 생각했다. 20년 전 우울증에 시달렸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도.

"그런데, 지금 울고 계시는군요."

 


 

pp. 624–26

 

"제가," 언젠가 섀넌에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가장 알리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관한 거예요. 아, 제가 지금 당신에게 무언가 고백하고 있는 거 같네요. 

 

내 부고를

속으로 적어보는

비밀스런 못된 버릇이 있다고


괜찮을까요?"

 

섀넌이 해보라는 몸짓을 한다.

 

"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거는 말이죠, 일과 사랑을 구분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거예요. 제 학술 연구 대부분은 게이에 관한 것이여서 제가 남자가 아니고 심지어 동성애자도 아니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어요. 그치만 그러게나 말이에요. 이 작업은 섹스, 사랑, 욕망에 관한 것이고요 (제가 떠올리기로는 당신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매우 내밀한 지점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 다음으로는, 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글쎄요, 저에 대한 하나의 진실을 꼽자면 제 사랑은 게이 남성과 함께하는 사랑이라는 거예요."

 

'패그해그(fag hag)'라는 말을 뭐라고 이해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게 요새 들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패그해그라고 하면 1950년대 술집에서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이 취해 있는 장면이 떠오르는데, 나는 술도 마시지 않는걸.
어쨌든, 가끔 패그해그라는 용어에는 거짓된 특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흑인 애호가(niggerlover,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과 함께 지내는 백인을 헐뜯는 말—옮긴이)'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에서 당연히 느껴야 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경멸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말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 용어가 나를 묘사하는 것인지 아닌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게이 남성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단 건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죠. 특정한 몇몇 게이들을 사랑할 뿐이에요.

그래도… 그래도 제 삶의 이런 측면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죠." 친밀성을 가장하는 데 재능을 타고 나지 못했으면 진짜 친밀성을 억지로 갖게 된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의 우스운 숙명이랄까?

 

"몇 년 전 첫 번째 퀴어 책의 서론을 쓰면서 제 자신의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막상 쓰다 보니 극단적인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죄다 모순적이고 극단적인 표현들이었죠."

 

섀넌이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지만, 지금 이 순간엔 아니었다.

 

"어떤 점에서는 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욕이 없고 성욕을 탐험하려 들지도 않는다고 해야 할 거예요. 평생 섹스 파트너가 세 명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저에게 '섹스'가 이보다 더 위생적이고 루틴화되긴 어려웠을 거예요. 섹스를 할 때는 법적으로 결혼한 지 거의 25년이 지난 이른바 이성의 사람과, 매주, 대낮에, 샤워 직후에, 정상위 바닐라 섹스를 했을 뿐이죠.

 

저는 그런 걸 즐기는(like) 법을 터득했어요. 오르가즘도 있고 기분도 좋아요. 그런데 제가 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에요. 떨림이 없어요. 어떤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어쩌다가 벌어지는 그런 일이죠. 그러다가 파트너에 대한 진정으로 심오하고, 심지어 진정으로 몸을 중심으로 한 사랑과 상냥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에요.

 

"그게," 나는 문득 발뒤꿈치에 힘을 쥐고 물었다. "이해가 돼요?"

 

"글쎄요."라고

차분한 섀넌이 말했다. "잘 모르겠다고 해야겠죠.

천천히 가볼까요. 조금 더 말해보세요.  

 

모순에 대해 계속 얘기해 보기로 하죠."

 

"좋아요, 여기에는 완전히 고립된 성행위가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있어요. 이런 면에서 나는 섹스를 하고는 있지만 내가 섹슈얼한 건 아니에요. 동시에 저는 정말 섹슈얼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기죠 해요. 저의 일과 정치, 우정, 해석하고 가르치고 강의하는 저의 삶, 대화, 농담, 독서, 생각 등 모든 것이 성적인 의미와 동기, 성적 관계(게이 관계)로 뒤얽혀 있죠

재밌게도, 제가 가정적으로 보이는데다 수줍음이 많은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비정상적으로 섹시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겉모습이 아니라요. 생각하고, 글 쓰고, 말하고, 섹스를 둘러싼 모든 사회성과 정치적 투쟁들 말이에요. 그런 것들이 제 인생에서 가장 떨리는 일이에다. 다만 저에게는 성적으로(genitally, 성기와 연관된) 연결되지 않을 뿐이죠."

 

"전혀요?"

 

"네, 전혀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다라고요? 그게

당신과 성기 사이에 있는

전부라고요?"

 

글쎄요. 아닐지도요.

 


 

pp. 628–31

 

"그래도 이런 환상은 분명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건 확실하고 그걸 실천하고도 있어요. 그래도 환상은 그렇게 있을 뿐인 거죠. 그저, 환상에 불과한 거예요. 실제 삶과 연결되지 않죠. 아무리 양식화된 장면이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그걸 실현한다는 생각은 요점을 완전히 빗나갔다고 느껴요.

물론 저는 그런 환상을 갖는 걸 두려워 했어요. 아주 강박적으로요. 계속 그런 환상이 제 남은 삶으로 새어 나올까 봐 두려웠어요. 특히 사디즘적인 (아니면 마조히즘적인) 성향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엉망이 될까봐 두려웠죠. 저는 폭력을 싫어해요. 저나 다른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견디질 못하죠. 하지만 적어도 지난 15년여 동안의 제 삶을 돌아보니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그가 신경을 곤두 세우지 않는 것을 보니 섀넌도 동의하고 있었다. 

 

어쩌면 미결 상태라고 해야 할까. 나는 더 이상 S/M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 이상 자기성애적 삶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눈에 띄지 않게, 냉혹하게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암에 걸린 후에.

 

나는 깨닫는다. 내가 그리워 한다는 걸.

 


 

섀넌이 여기에 관심을 보인다. "환상이 없다고요? 어디로 갔을까요? 생각나는 게 있을까요?"

 

나는 열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기운을 차린다. "하지만 제가 드라마화하는 환상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었어요. 너무 이론적인 얘기가 아니길 바라는데요. 놀랍도록 구체적인 효과였어요. 환상 속 인물이 나 같으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걸 아시나요? 글쎄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게 환상의 필수조건이었던 거죠.

치료를 받으면서 몸이 점점 이상해지면서 계속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환상 속 여자는 가슴이 하나거나 두 개일 거예요. 머리카락이 있거나 대머리거나 둘 중 하나겠죠. 분명히 둘 모두일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 여자가 저라면, 가슴이 하나뿐인 대머리 여성이라면 그건 환상을 짓뭉갤 거고, 그 여자가 제가 아니고, 그런 특징이 없다고 하면 그것도 환상을 망친 거죠."

 

여기에도 재미있는 점이 있다. 암 치료가 끔찍한 복수의 방식이 아니라 '따뜻한' 방식으로 내 환상에 응답했다는 점이다.

모종의 이유로 환상은 항상 제도적 명목, 거의 관료적 명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학교, 교도소, 첩보기관 등 항상, 항상 대기실이 있는 곳에서 벌어진다.

 

대부분의 처벌 공간은 준 의료 공간이다. 접수실과 탈의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사람들이 들여다 본다. '시험/검사(examination)'. 두려운 단어! (예일대에서 나는 구술시험에 떨어졌었다.)

 

암 클리닉에서 대기 중인, 비스듬하고 움츠러든 한 무리의 환자들. 공포로 두터워진 특유의 중력. 내 환상 속에서 벌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양 기다리는 사람들. 인터콤에 뜨는 이름, 불러 들어오는 운명, 프라이버시라는 연약한 핑계가 베어진다.

표시되지 않은 새로운 이들을 스캔한다. 수줍게. 그들은 수치심과 상실을 경험 한 사람들이다.

 

다른 감정이 흘러 나온다.

참전 용사들로부터는 자랑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이, 한꺼번에

 

그 끔찍한 일과를 치르는 우리의 방식으로부터.

 

"제가 그 감정을 가장 취했던 순간을 얘기해 드릴게요. 완전히 분리된 두 세계가 맞닿는 순간이었죠.
6개월간의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이었는데, 이미 혈관이 좋지 않아서 걱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어떤 의사가 피가 좀 필요하다고 해서 채혈을 하려고 작은 대기실에 들어갔어요.
그날 거기에는 중년 후반의 작은 체구의 초췌한 자메이카 여성이 앉아 있었어요. 그 이후로 그 여자를 계속 봤어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뚱뚱한 팔에서 정맥을 찾기가 어려웠죠. 그녀는 한동안 다트 게임을 해야 했고, 결국 저는 그녀에게—  저는 항상 쉽게 어지러워지는 편이라서 알고 있었어요—곧 실신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
그녀는 짜증이 난 것 같았어요. 내내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죠.
그래서 그녀는 저를 일으켜 세우더니 복도를 가로 질러 있는 긴 방으로 밀어 냈어요. 길고 어두운 기숙사 같은 방이었는데 양쪽에 침대가 있었고 침대를 분리하는 이동식 스크린이 있었어요. 이미 다른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리고는 저를 눕히고 침대 옆 의자에 앉혔어요. 조급하게 뛰는 그녀의 맥박이 느껴졌어요.
방 안 어딘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이윽고 제 심장 박동에 신경을 덜 쓰게 되니, 누군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요. 소리 없이 흐느끼는 소리, 거의 들리지 않는 헐떡이는 소리.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가 속삭이고 있었어요. 단어를 알아들을 듯 말듯 했어요.
간호사가 긴장을 푸는 순간이 들렸어요. 그녀가 자기가 짜둔 조립 라인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저에게서 피를 뽑아낼 수 없고 그저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거죠.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제 손 위에 조용히 손을 얹었어요.
저도 깨달은 게 있어요. 채혈을 할 수 있을 만큼이라도 그녀를 미워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저는 눈을 감고, 주의를 돌리고, 모든 근육을 이완하려고 노력했고, '하얀 침대'가 주는 어린 시절의 자극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어요.

 

멈추지 않고

기절해버릴 때까지. 심지어 기절하는 것이

내가 굴복하는 것이더라도.

 

느껴졌어요. 이게

새로운 시작이라고

새로운 암 생활의 시작.

 

그녀의 손길에서 나는 이제 그녀가 나를 돕고 싶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환각이 아닌지 확신할 수 없긴 한데 (아니었을 거예요), 저는 어디에선가 (제 근처는 아니었는데) 낮은 목소리를 들었어요. 누군가에게 분명하게 말하더군요. '다리 벌리세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으세요? 저한테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나요?"
"네,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지금 시간이 다 됐어요."


며칠 뒤 나는 평소보다 꽤 일찍 회색 건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옆 은행 주차장을 지나 9번가를 가로질러 모퉁이에 있는 BP 주유소 직원에게 내 차에 대해 물어볼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다.

 

하지만 두 주차장 사이의 관목이 우거진 경계는 예상외로 가파르고 미끄러운 솔잎으로 덮여 있었다. 평소처럼 서투르게 굴던 나는 넘어질 뻔했다. 그런 다음 몸을 추스르고 

 

뚱뚱한 여자의 

서두름을 억누르며 

은행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보고 주유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섀넌이 회색 건물 쪽으로 모퉁이를 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보다 앞서 은행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나를 보지 못했다.

 

여동생과 같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내가 생각에 빠진 것 같은 꼴로 혼자 돌아 다니면 그녀는 내가 자기를 당황하게 한다고 심하게 비난했었는데, 섀넌이 그때의 나 같은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그가 몸을 움직일 때 차분한 기운이 더 눈에 띠었다. 마치 메이시 추수감사절 퍼레이드 풍선처럼 둥글고 크고 가벼워 보였다.

 

생각에 빠졌더라도 그는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수풀이 무성한 쪽에 가까워지던 풍선이 갑자기 우아하고 낮게 내려앉았다. 그는 내가 차 버릴 뻔했던 나무조각 길바닥에서 주워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몸을 일으켜 제자리로 두드리며 다른 나무조각을 손으로 살짝 다듬었다.

 

나는 보이고 싶지 않아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소박한 훔쳐

보기. 어떻게 그것이 나에게

숨겨진 보물을 안겨줬을까?

 

좌절감이든 두려움이든 간에 왜 다음주에 가져갈 반성의 대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나는 단맛이 갑작스럽게 응축되는 순간, 과거에 내가 사랑에 빠질 때 느꼈던 그런 순간을 경계한다. 내가 섀넌에게 더 끔찍한 존재(abject)가 되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이 수수께끼 같은 조약돌을 남몰래 만져보기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자신감 없이, 친구 팀에게 공간, 시간, 시각의 촘촘하면서도 가벼운 매듭 사이에서 지칠 줄 모르는 쾌락을 느낀다고 편지를 썼다. 하늘이 넓게 뻗은 중서부 풍의 작은 대학 도시의 9번가라는 작은 범위가 타임랩스 그래픽으로 바뀌면서 섀넌이 내가 있던 자리에 가앉고, 내 유령을 알아보지 못한 채 마주치고, 내 실수를 고쳐주고, 나는 돌아선 채 바라 본다.
그리고 그의 보살핌이 를 보살피고 있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팀은 이렇게 답장했다. "지루하기는커녕 드 퀸시(De Quincey) 같은 어떤 힘이 있는 이미지, 당신이 그걸 흐트러뜨린지 모른 채 (그러니까 제가 잘 이해했다면 당신이 흐트러뜨린) 나무조각을 집어 들기 위해 몸을 구부리는 섀넌의 이미지가 떠올리게 돼요—어쩌면 드 퀸시의 느와르 영화 버전일지도요. 제 머릿속을 떠도는 이미지는 그래요.

 

"즉각적이며 비자발적인 대체물: 남는 시간에 되돌리는 일을 하는 익명의 정신과 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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