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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스파이더맨 - 노웨이홈〉 리뷰

herimo 2022. 2. 22. 23:48

일단 메인 포스터

* 소니부터 마블까지 모든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 다량 함유

** 초안 작성 대충 21년 12월 31일 / 정리하여 마무리 22년 2월 22일 (넘 늦었네)

 

지난해 12월 29일에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그동안 시간이 아주 없었어서 놓친 영화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다들 〈돈룩업〉을 보고 있으니까 넷플릭스만 켜면 될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스파이더맨 - 노웨이홈〉을 봤는데 스파이더맨 영화를 아주 성실히 챙겨본 타입은 아니다. 소니판 1편 보고… 처음 보는 건데 아무튼 유튜브 알고리즘이 워낙 이것저것 떠먹여 주기도 했고 영화 자체가 이 정도면 꽤 친절한 편이라 보는 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영화 얘기를 해보자.


그냥 빨빨대고 돌아다니는 게 귀여워서 넣어봄

스파이더맨이라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소년의 성장담을 다룬다. 심약하고 소심하고 어리숙할 정도로 착한 외톨이가 어느날 이상한 거미에 물려 슈퍼파워를 갖게 된다. 소년은 그 힘으로 사람을 돕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을 불편해 하는 빌런들이 나타나고 자기는 물론 몇 없는 지인들까지 말려들게 되면서 사회성 떨어지는(시리즈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10대 남자애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스파이더맨은 인기 히어로 투표에서 자주 1위를 하며, 스파이더맨 영화는 내가 알기로 근 20년 간 가장 많이 리부트된 블록버스터 시리즈이다. 흥행에서 참패했다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마저 세계 기준으로 7억 달러 이상 벌었다. 10대 남자애가 고군분투하는 얘기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이런 얘기가 이렇게까지 잘 팔리는 걸까? 10대 미국 백인 남자애가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어른들과 싸우고 상처 입고 좌절하고 간신히 극복하는 얘기에 왜 이렇게 열광할까? 우리는 모두 은밀한 사디스트여서 구원받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몸은 튼튼하다지만 그 튼튼한 몸 위로는 아주 얇은 옷만 걸친 미성숙하고 연약한 소년을 보면서 몰래 쾌감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고난을 이겨내는 영웅의 모습에 나를 동일시 시키고 자신의 근본 없는 자신감의 근본으로 현대의 영웅 서사를 우왁스럽게 포섭시키는 걸까? 요컨대 이 이야기는 우리를 사디스트로 만드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우리를 나르시스트로 만드는 이야기인가? 에둘러 가지 않고 답을 내리자면 이 영화는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이 영화를 포함한 여러 히어로 영화가 매력적인 아주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이다.

 

뭔가 사천왕 중 최약체 돼 버린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어스파

영화제작사 소니는 이 캐릭터를 어떻게 사용할지 내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가 얼마나 어수선했는지 생각해 보면 이는 꽤 자명해 보인다. 디즈니-마블은 이 캐릭터를 자기 유니버스로 데려오는 데 무진 애를 썼다. 마블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애초에 트릴로지로 기획되었지만, 나중에 공개된 마블과 소니 사이의 계약에 따르면 1편과 2편이 10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올리지 못하면 3편을 제작하지 못하는 특이한 약속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반대로 말하면 마블은 이런 계약서에 싸인을 할 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데….  〈홈커밍〉은 이야기를 세팅하는 과정이고 이 시리즈가 이전까지의 두 형제 영화와 어떻게 다른 길을 갈 것인지 제시하는 면이 있다지만, 〈파프롬홈〉은 이야기의 측면에서 매우 성의없는 영화다. 마블 팬이 아닌 입장에서 〈파프롬홈〉의 준수한 흥행(전세계 11억 달러+)은 그 원인이 궁금하다. 그 이유를 찾다 보면 디즈니-마블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기 어렵지 않다. 〈파프롬홈〉은 다른 영화들, 즉 〈엔드 게임〉이나 '아이언맨' 시리즈와의 연계 속에서 후견인의 상실과 그 후일담이라는 그리 얇지 않은 맥락을 획득하며,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재밌게 보았다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파프롬홈〉은 그 영화 안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이 아니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중요한 캐릭터 '아이언맨'의 후계자로서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의 고뇌를 다루었기에 흥미롭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이런 이유로 한 영화가 흥미로워진다는 감각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른바 '유니버스'나 '세계관'이라는 서사 패키지는 어떤 감각 속에서 호소력을 지니게 된 걸까? 표면에 흐르는 이야기의 흐름을 무시하고 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어떤 장면 뒤에 편집하는 과정이 관람자에게 모종의 편집자적 효용감을 주는 걸까? 아니면 남들은 찾지 못한 이야기의 경로를 찾아내는 퍼즐 맞히기나 미로찾기와 같은 발견의 쾌감을 선사하는 걸까? 세계관이라는 서사 층위에서 활성화되지 않은 정보의 다발이 어떻게 눈앞에서 보이는 장면을 '납치'해서 다른 맥락 속에 배치시키도록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서사의 독자, 영화의 관객이 지닌 해석 능력과 그 가치를 강조하는 움직임은 1970년대 이래의 비평 이론에서 뚜렷해졌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요새 한국에서도 나름 지명도를 얻은 RPS/팬픽션 등의 행위는 수용자의 역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팬덤 연구의 흐름 속에서 규범적 서사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다만, 이런 평가가 등장한 당대의 맥락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에는 작가가 지금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저자의 의도와 얼마나 더 가깝냐에 따라 해석의 의미와 가치가 측정되었다. 표층 서사 아래에 숨겨진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때로는 표층 서사 자체를 부정하는 수용자의 적극적 해석 활동은 이런 맥락에서 저항적이라고 평가되었다. 대표적으로, 남성 캐릭터의 동성사회적 유대로부터 동성애적 관계를 부각하는 여성 관객의 해석 실천은 강제적 이성애나 가부장제와 같은 젠더, 섹슈얼리티, 재생산을 규율하는 당대 사회의 제도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최근의 유니버스/세계관 소비를 비슷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 분명히 비슷한 측면은 존재한다. 〈파프롬홈〉을 상실에 대한 애도와 우울을 표현한 영화로 읽는 것은 상당히 밋밋한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톰 홀랜드가 연기하는 피터 파커의 조증을 바로 그만한 우울증의 거울상으로 다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맥락에서는 미스테리오와 같은 안티히어로와의 대립이 부각되는 것이 오히려 부적절하다. 미스테리오와의 대립은 피터 파커가 언제라도 겪을 수 있는 사건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 시기가 자신이 의존했던 유사-아버지의 상실 직후에는 전혀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영화의 주제 의식으로 발전된다. 이런 면에서 〈파프롬홈〉은 성장영화로서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특성을 적절하게 구현한다.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에서는 대척점에 서 있는 샘 레이미의 트릴로지에서는 첫 번째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벤 삼촌의 죽음이 서사적으로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노웨이홈〉에서 시리즈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슬로건으로 기입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도 여기에서 무게감 있게 등장한다.

 

샘 레이미 판이 진짜 좋은데 . . .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삼촌의 유언에 따라 자기 힘에 책임을 지는 히어로가 되고자 한다. 그린 고블린은 그런 다짐에 질문을 던진다. 그는 자연재해도 아니고, 스파이더맨이 보호해 주어야 할 약자도 아니다. 그는 의지를 가진 악당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을 방해하는 스파이더맨을 제거하려고 한다. 1편은 스파이더맨이 그린 고블린을 직접 살해하기보다는 악당이 자기 꾀에 스스로 넘어가게 함으로써 히어로에게 결정을 유보할 시간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의 대립, 즉 피터 파커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대결로, 더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그를 몰아 넣는다. 이에 비해, 〈파프롬홈〉에서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은 최소한의 선택을 수행한다. 그는 자신의 이웃을 지킬 힘을 충분히 지니고 있고, 이번에 등장한 악역 정도는 감히 그의 방호를 뚫지 못한다. 샘 레이미 버전에서는 피터 파커에게 선택의 순간이 주어졌었고 그 선택을 미룬 대가도 그가 치룰 몫으로 남아 있었다. 〈파프롬홈〉에서 피터의 선택은 미스테리오가 사기꾼이라는 사실 관계만 알아낸다면 누구라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선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이 영화의 유니버스 안에서의 의미 역시 모호하게 남는다. 마블 시리즈의 팬은 피터가 토니 스타크의 여러 상징물이나 유산의 계승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피터는 스타크 사에서 개발한 인공 지능 전쟁 병기의 관리자 자격을 계승한다. 하지만 히어로로서 스파이더맨이 아이언맨의 어떤 성격을 계승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상당 부분 관객의 몫이다. (아이언맨은 인간성과 기계신체 사이에서 정체성 고민을 겪는 히어로이지만, 스파이더맨에게 이 질문은 〈홈커밍〉에서 이미 해소되었다.)

 

수트 없어도 스파이더맨이라면서 수트는 일단 최첨단인 편

정리하자면, 수용자의 독해가 저항으로 평가될 만한 능력은 〈파프롬홈〉의 시작 장면 전에 〈엔드 게임〉의 마지막 장면을 끼어 넣는 편집 능력이 아니라 토니와 피터 사이에서 오고 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놓지 않는 끈기이다. 나는 2020년대의 수용자들이 비판과 저항의 역능을 잃었다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홈커밍〉에서 토니가 피터의 유사-아버지로 등장했을 때 많은 이들이 가난한 너드가 억만장자의 지원을 받는 것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홈커밍〉은 제법 영리하게 이런 불편함을 봉합할 수 있는 결말을 준비해 둔다. 이 영화는 가난하고 너디한 십대 청소년이 억만장자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있을 곳, '홈'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마블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피터가 홈을 스스로 규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을 영화의 그럴 듯한 결말로 제시함으로써 그 장면이 1편과 2편 사이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편한 의미 하나를 잘 보이게 않게 처리한다. 피터는 자신의 자신감을 보여줌으로써 스파이더맨은 아이언맨의 대자가 되는데, 이는 마치 아버지를 능가하지 않고서는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없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부자관계를 보는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늦었지만 오늘의 주제인 〈노웨이홈〉으로 돌아가자. 홈 트릴로지의 부제는 각각 홈의 구축과 혼란, 해체를 의미한다. 이번 영화는 피터가 자기 삶의 핵심이라고 여겼던 요소 중 하나인 익명성을 잃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익명성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해 그는 결국 가족(메이 고모)을 잃고, 연인과 친구에게 피터로서 기억되지 못하게 된다. 빌런들이 등장하는 과정은 〈파프롬홈〉과 마찬가지로 피터의 삶에서 어떤 형태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숨기고 싶었던 정체성을 들키고(이 부분에서 서사는 잠깐이지만 퀴어 서사의 면모를 보인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은 되돌릴 수도, 다시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그는 돌아갈 곳을 잃는다.

 

어나더 커밍아웃 스토리

영화의 결론은 앞선 두 편의 영화처럼 밝지 않다. 〈파프롬홈〉에서의 우울이 장면 뒤에 숨어 있었다면 〈노웨이홈〉은 우울을 전면화한다. 이때까지 스파이더맨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시련을 극복해 왔다.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시련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상실은 항상 예기치 못한 형태로 다가오지만 그 결과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는 깨달음이 피터가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히어로로서 살아가기를 택하는 계기가 된다. 그의 '홈'은 여전히 뉴욕이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구축된다. 피터는 가족이 머무는 공간을 박탈 당하고 혼자서 월셋방을 빌린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악당을 추적하는 그의 행위에는 선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 묻어있다. 선행의 강박적 반복이 히어로로서 그의 표피적 정체성을 유지하게 해주지만, 만인을 구원하는 행위 속에서 그의 자아를 구성했던 특수한 인간들과의 관계는 점점 더 희미해진다. 그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경험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소년에게 잃기 싫으면 먼저 손에서 놓으라는 기이한 가르침을 아로새긴다. 이것이 〈노웨이홈〉이 보여주는 성장의 진상이다.

 

이번 편에서 이런 표정 많아서 좋았음

피터가 다시 자기 집을 만들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을까? 영화 속에서 피터는 메이 고모의 죽음과 같은 거대한 상실이 자기만 겪는 일이 아니며, 다른 피터들도 겪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는다. 사실 평행우주의 피터들이 아니더라도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세 스파이더맨이 하나의 스크린에 등장해야 할 당위는 사실 없다. 마찬가지로 이전 시리즈의 빌런들이 이 세계로 소환될 당위도 없다.) 모든 이들이 상실을 겪는다는 사실은 그가 자기만의 애도를 끝내는 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토비 맥과이어가 연기하는 스파이더맨이 보여주는 태도와 유사하다. 그는 이제 늙고 지쳤으며 많은 상실을 겪었고 자기보다 어린 자기에게 현실의 냉혹함을 조근조근 가르쳐 줄 수 있는 성인으로 거듭났다.

 

나는 슬플 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엘 가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또 다른 가능성은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하는 '어메이징' 피터가 보여준다. 그는 이 세계의 피터가 메이 고모를 잃었듯이 자신의 연인 MJ를 지키지 못했는데, 위기에 빠진 이 세계의 MJ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울먹이는 그의 얼굴에서 과거, 더 정확히는 트라우마가 영원히 똑같은 모습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깨달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깨달음을 자기 삶과 엮어서 견고한 자기 이야기를 구축하는 것이 성장이라고 한다면, '어메이징'의 피터는 샘 레이미의 피터와 같은 층위에 놓여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메이징'의 피터는 아직 견고하지 않은 상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로 정리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인 얼굴을 보여준다. 그런 순간이 촉발하는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감각은 분명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어'의 서사와는 다른 것이다.

 

이쯤에서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은 거의 완수되었다. 이 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목적을 밝혔는데, 첫 번째는 〈노웨이홈〉에서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이다. 나는 〈노웨이홈〉에서 상실과 멜랑꼴리를 부각해 볼 때 이 영화가 좀 더 재미 있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디즈니 영화라지만 최후의 결전을 캡아 방패 든 자유의 여신상에서 하는 건 너무 성의없는 거 아니냐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은 〈노웨이홈〉과 관련되어 있는 세계관 혹은 유니버스가 이 영화를 보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피는 것이다. 첫 번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두 번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몇 가지 재료를 마련했다. 영화를 해석하는 수용자의 힘을 어떻게 볼지에 대한 내 입장을 밝히자면, 유니버스에 몰입한 독자들의 해석과 그 힘을 순전히 창조적이거나 저항적인 해석으로 추앙해서는 안 된다. 유니버스의 맥락을 자유롭게 이끌어 오는 해석 활동이 창조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스타트렉을 불경하게 해석했을 때와는 달리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속한 작품들을 해석할 세계관의 판본은 전제되어 있다. 유니버스를 강조하는 근래의 흐름이 독자/수용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제작자(디즈니)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의 자유에 불과하다. 우리 시대의 문화산업은 수용자의 자발적 해석 역시 제작자의 이익으로 이어지도록 정렬된 돈의 순환 회로를 전례 없이 촘촘하게 설치해 두었다(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를 보라). 이런 세계에서 유니버스의 수용자 친화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자본의 잠식 능력을 찬양하는 것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대환장의 리부트쇼! 스파이더맨이 너무 많아

나는 〈노웨이홈〉을 읽기 위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도 언급했지만 소니와 마블 사이의 계약서가 가리키는 현실 세계나 비평 담론을 통해 구축한 상실과 애도의 세계를 언급하기도 했다. 물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그 자체로 나쁘다거나 미적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수용자의 해석 과정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지침을 뒤틀거나 그것과 경쟁하는 다른 세계가 개입하는 것을 (공식의 이름으로) 막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떤 해석이 옳고 그른지 제작사가 규정할 권리를 지닌 유니버스를 통해 개별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어떤 관객에게 즐거움을 줄 때 그런 즐거움에서 (100%는 아니더라도) 해석 자원을 독점하는 권력, 더 크고 강한 권력에 동참하기에 주어지는 쾌감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쾌감에 심취한 관객은 온갖 해석을 자랑하며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열성적 해석 활동은 거대 자본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나팔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우리는 후기 산업사회의 특징 중 하나를 바라보고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비판 역시 상품으로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갱신한다. 서사가 선사한 즐거움, 그 즐거움에 휘둘린 자기 자신을 걷어내고 사태를 보면 이 사태는 지나치게 명확하다. 유니버스는 상품이다. 그 세계는 자기와 경쟁하는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막기 위한 전략을 자체적으로 포함한다.

 

돌아갈 길이 없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은 〈노웨이홈〉의 피터 파커에게 주어졌던 질문이지만 새로운 맥락에서 그것을 보는 독자들에게 또 다시 제시된다. 이제와서 문화자본 바깥으로 어떻게 나가란 말인가? 우리는 21세기의 네오 러다이트 운동가가 되어야 하는 걸까?

 

서사의 즐거움이 수용자로 하여금 세상(유니버스, 나아가 우리가 숨쉬고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가리키는 중의적 표현으로 읽히길 바란다)을 상품으로 보게끔 유혹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순전히 상품으로 소비할지 수용자와 해석자로서 자신의 역능을 펼쳐내는 역동적 운동의 집결지로 번안할 수 있을지 결정된 것은 아니다. 〈노웨이홈〉에서 피터는 그 자신의 나르시시트적인 애착, 그로부터 나온 동일시를 통해 자기 삶이 다르게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향수를 추억하며 '시네마'가 존재하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우리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네마'는 이미 우리 현실에 함께 존재한다. 그것이 예전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다는 말은 시네마를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는 꾀임에 넘어간 것이다.) 우리가 서사가 보여준 다른 세상을 정말로 애착한다면 세상을 상품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 그것과 경쟁하는 더 많은 세계를 떠올리고 불러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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