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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 트위터 게이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 자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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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 트위터 게이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 자원

herimo 2020. 8. 31. 02:51

Félix Valloton(1865-1925)이 그린 Lord Alfred Douglas(1870-1945).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그는 Oscar Wilde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념2 情念
1.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 (예문) 사랑의 정념.—«표준국어대사전» 중.

 

나는 원래 한국 사회에서 게이들이 다른 게이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써보려고 했었다. 다만 관계 맺는 방식으로 유형화하기가 까다로워서 이 계획은 계획 이상의 결과물을 내지 못했고 그 흔적은 아직도 이 블로그의 비공개 포스트 중 하나에 남아 있다. 일기보단 좀 더 무게 있는 걸 쓰고 자려는 마음에 블로그 글 주제를 공모했을 때 친구가 반쯤 농담(즉 반쯤은 진담)으로 건넨 주제는 '정념의 인류학'이었다. 정념과 인류학이라는 두 단어는 각각 떼 놓고 봐도 각각 너무 큰 주제라 내가 감히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이때의 '정념'이 주로 '트위터 게이'라고 부르는 (인류에 비하면야 당연히) 상대적으로 정의하기 용이한 집단 내에서 통용되는 입말임을 알았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보니 정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이 내가 원래 계획했던 글을 완성하기 위한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불현듯 깨달았다. 원래 나는 속을 짐작하는 글쓰기는 넘겨 짚기가 되기 쉽고, 넘겨 짚는 글에는 항상 반례로 뒤범벅된 지저분한 반론을 들이대기 쉽기 때문에 최대한 객관적인 분류법을 찾아내려고 애써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외적으로 두드러지는 행동 양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양식 바탕에 공유되고 있는 내밀한 속사정을 쓰는 것이었고, 애초의 계획은 내가 쓸 수 없는 것(혹은 쓰고 싶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글쓴이가 늘 빠져드는 패착이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기로 하였다. 아무튼 이 글은 정념이라는 단어가 트위터 게이들 사이에서 쓰이는 맥락을 살피는 것에서 시작해 이것이 어떤 종류의 욕구/욕망과 연관하는지 알아보고, 나아가 우리가 정념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지 고민해 본다. (이런 도입부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이 글은 친구가 써달라고 요청했던 정념의 인류학 같은 것과는 무관하다. 그저 정념이라는 단어를 듣고 생각난 단상을 글의 형태로 짜깁어 놓은 것으로, 술자리 농담 정도의 신뢰도를 지니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정념'이라는 단어는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을 일컫는다. 나 자신이 어찌하기 어려운, 내가 사로잡히게 되는 상념이라는 맥락에 주목하여 정념을 영어 단어 'passion'에 상응하는 말로 쓰는 경우가 있다. 특히 스피노자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스피노자에게 passion은 일단 수동성passivity를 함의하기에 정념이란 단어의 뉘앙스를 특히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트위터 게이들이 정념이란 단어를 선택한 것도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흘러 넘치는 맥락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이는 트위터 게이들 중 자기 통제 욕망이나 능력이 크다는 점을 생각할 때 특히 주목할 만하다. 트위터 게이들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게이의 인적 네트워크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여러 통계에 따르면 트위터에는 교육수준이 높은 이들이 다른 소셜 미디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트위터리안들 사이에서 최종학력이 대학원 재학이나 졸업인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지표뿐만 아니라 트위터 게이들이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트위터 게이는 소셜 미디어 '본진'이 트위터일 만큼 트위터를 열성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을 일컫는 용어이고, 트위터는 문자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매체다. 비교적 다양한 인간 관계를 소화하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문자와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현상은 이 현상이 분명 의식의 차원에서만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임을 보여준다. (이런 규정에 따르면 주로 사진과 동영상 등 영상물을 소통의 자산으로 삼는, 이른바 섹계는 트위터 게이의 범주에 원칙적으로는 포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트위터 게이들은 타인의 온갖 일을 자기 언어로 재구성하는 데 능하고, 그 타인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일 때 그 사람의 아픈 구석을 거의 감각적이라고 할 만큼 정확하게 짚어내고, 그 사람이 가장 괴로워 할 만한 어구로 '버튼을 누르는 것'에 능숙하다. 그만큼 풍족한 인지적 자원을 갖춘 이들이 자신의 어떤 문제에서만큼은 언어화할 수 없는 지점을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념을 스스로 통제하거나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이나 감정, 혹은 그 혼합물로 느슨하게 규정했다. 트게이들은 트위터라는 매체에서 군집 및 사교 활동을 일삼는 게이들을 일컫는다. 트위터라는 환경은 이들이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함을 짐작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리고 이들이 공유하는 게이라는 사회적 위치는 정념이라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집합적 실천(나는 의식적으로 상당히 능동적인 함의를 지닌 단어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나중에 밝힐 것이다)을 경험하는 조건으로 기입되어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트게이들의 정념의 대상은 남자라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 설명은 이들의 정념에 수반하는 기묘한 광기를 해명하기엔 부족하다. 트게이들은 항상 어떤 형태로든지 남자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트게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네트워크이기에 네트워크로서의 트게이에 연결된 트게이 개인은 다른 트게이 개인들과 연결되어 있고, 이들은 쉽게 서로를 만난다. 만남은 친교를 위한 것으로, 온/오프라인을 가로질러 빈번하게 일어나며, 그 성질도 결코 성적이지 않은 것과 순전히 성적인 것, 혹은 애정 없는 것과 애정으로 충만한 것 사이를 오간다. 즉, 꽤 복잡하다. 더불어 그들은 사회적 존재로서 남자뿐만 아니라 남성성에도 익숙하다. 게이들은 성장과정에서 주류 남성 문화의 희생자가 되곤 하지만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충실히 다진 트게이들은 자신이 가진 인지적·관계적 자원를 활용하여 남성성을 조롱하며, 남성성 각본을 기민하게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기도 한다. (예컨대, 규범적인 남성성 각본에 도취된 남자를 골탕 먹이는 사이다 썰을 상상해보라.) 이들은 항상 남자와 남성적 문화에 침윤되어 있다. 물론,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비극적이게도 남자 때문에 정념에 휩싸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의 빼어난 인지적 자원이 남자라는 사회적 주체와 남성성이라는 문화적 각본을 하나의 단일한 대상으로 인식할 만큼 무디지 않다는 것이다. 트게이들은 인지적, 관계적 자원에서 비롯한 분석력을 통해 남자들과 남성성을 세분한다. 이는 게이 문화의 '식'으로 포섭할 수 없는 미세한 영역을 포괄한다. 예컨대, '식'의 용례가 다소 방만한 경향이 있어도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체형'에 대한 선호에 있다. 하지만 트위터에서 이러저러한 남자에 빠져든다는 트윗에 마음이 찍힐 때, 그 트윗이 욕망하는 대상은 상당히 세밀하게 소묘된다. 나는 최근에 지역성이 남성성 각본과 뒤엉켜 자신의 취향으로 선언되는 사례를 반복적으로 관찰했다. 개인이 선호하거나 선호하지 않는 지역성의 근거지는 서울, 수도권, 경기도, 경상도, 경상북도, 전라도, 제주도 등 지리적으로는 다양하다. 그리고 근거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특성은 그 지역이 다양한 만큼 모두 다르다. 이들은 서울 안에서는 구, 서울과 경기도를 구분하고, 경상도과 경상북도를 결국 구별해내고야 마는 예민한 취향의 소유자들이다. 취향의 문제는 정념의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트게이들은 자신의 취향을 세분할 능력이 있고, 그런 활동에 익숙하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위에 쉽게 도달했던 결론, '트게이들은 남자 때문에 정념에 휩싸인다'라는 결론으로 되돌아가자. 트게이들에게 남자는 다 같은 남자가 아님은 이제 자명해졌다. '어떤' 남자인지가 중요하다. 그들 스스로 구별하고, 구별함으로써 생산된 남자들 사이의 차이가 트게이 정념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남자를 여러 종류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자체로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내가 사귀고 싶은 (중의적 의미다) 남자와 사귈 수 없는 현실이 그렇게 아쉬울 필요가 있을까? 아이돌은 상징적 기호에 가깝게 인간을 다듬은 상품이지만, 아이돌과 사귈 수 없다고 한밤중에 잠들지 못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물론, 트게이들도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이랑 못 사귄다고 문제를 호소하진 않는다. 그런 남자들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그들의 '인식', 곧 교류의 가능성이 이들에게 모종의 불안과 불편함을 밀어 넣는다. 예전에 게이는 아니지만 성소수자인 친구가 나에게 '왜 게이들은 다른 남자들의 평가에 그렇게까지 집착하는지 모르겠다'는 요지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내게 직관적으로 떠오른 대답은 '게이들에게 남자는 곧 세계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무슨 말인지 단번에 파악한 친구는 몹시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말은 적어도 나와 그 친구 사이에서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직관에 이르게 된 과정을 역으로 분석하다보니 이게 그렇게 상식적인 이야기는 아니어서 어려운 설명을 몇 마디 덧붙이게 됐다. (샛길로 빠진 복잡한 얘기는 접어둔다. 그런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접힌 글을 펼쳐서 쭉 읽어나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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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들이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남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건 이들이 구상하는 사회의 모습에 '교환'의 공식이 여전히 뒤틀린 형태로 존재한다는 발상과 맞닿아 있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이제는 저명해진 인류학자(이지만 당시에는 대학원생이었던) 게일 러빈(Gayle Rubin)은 여성(women)의 교환이 친족의 구조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지적한다. 이론적으로 이 주장은 선물과 증여에 관한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와 그의 증여론을 친족 구조의 형성이라는 주제에서 나름대로 발전시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구조주의 인류학에 부분적으로 빚지고 있다.

 

모스는 선물 증여의 의미가, 교환 파트너들 사이에 어떤 사회적 관계를 표현하거나 확고히 하거나 창출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선물 증여는 참여자들에게 특별한 신뢰 관계, 연대, 상호 원조를 제공해준다. 사람들은 선물 제공으로 친밀한 관계를 확보할 수 있다.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선물로 보답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관계의 승인을 의미한다. 선물 교환은 또한 경쟁과 대립을 의미하는 상용 어법일 수 있다. 상대방이 답례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많은 예가 존재한다. (…) [뉴기니 산악 지방의] 빅멘은 답례 받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재화를 선물하려고 한다. 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정치적 위신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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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는 원시적 호혜성 이론에 결혼이 선물 교환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는 생각을 덧붙이면서, 결혼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여성이라고 말한다. (…) 근친상간 금기는 섹스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사건에 족외혼 및 혼인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부과한다(‹여성 거래›, «일탈: 게일 루빈 선집»[현실문화, 2015], 108-109면).

 

러빈의 독창적인 통찰은 결혼이 선물을 교환하는 행위라고 할 때 조직의 주체를 질문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거래되고 있는 것이 여성이라면, 연결되어 있는 여성들을 주고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성들이다. 따라서 여성은 교환의 파트너라기보다는 관계의 연결 통로로서 존재한다"(‹여성거래›, 110면, 강조 추가). 러빈은 여성이 교환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 근대적 의미의 여성 대상화와 다르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지적하면서도 여성 교환의 장면에서 "선물과 증여자 사이의 구분[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은 성이 둘로 구분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이때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성별의 이원성이 구성되는 정신적 과정을 추적하는 가장 방대한 이론 체계를 제공한다. 러빈에 따르면, 친족 체계는 오이디푸스 위기에서 따라야 한다고 제시되는 규칙과 금기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강제적 이성애는 친족의 산물이다"(‹여성거래›, 133면).

 

러빈의 글이 출간된 지 10년 후,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Eve Kosofsky Sedgwick)은 여성 교환이 젠더-섹슈얼리티 범주와 맺는 관계를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세즈윅의 책 «남자들 사이 Between Men»(Columbia University Press, 1985)는 동성사회성을 분석적 개념으로 정제한 최초의 학술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책의 제목이 보여주듯, 세즈윅은 이 책에서 여성이 교환되는 장면에서 교환의 주체라고 여겨지는 두 남자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를 논의한다. 흔히 남성 동성사회는 동성애혐오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남성 동성애와 본질적으로 다르거나, 동성사회와 동성애라는 두 개의 사회적 관계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다고 여겨지곤 한다. 세즈윅은 여성 교환을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 사이의 관계로 적극적으로 읽어냄으로써 이 거리가 사실 매우 가까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즈윅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18세기 영문학에 나타난 동성사회성은 남자들이 서로 다른 계급을 가로지르게 허용하는 요인이다. 나아가, 남자들이 표출하는 동성애혐오는 그들이 다른 남자와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을 온순한 애정의 형태로 드러낼 수 없기에 취하게 되는, 또 다른 형태의 욕망이다. 욕망을 직접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제3자를 구해서라도 욕망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들의 욕망이 지닌 절박함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남성동성사회성은 서로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남자들의 동성애와 동성애혐오를 동시에 내포할 수 있는 사회적·심리적 삶의 양태에 붙은 이름이다.

 

게이들이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남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건 이들이 구상하는 사회의 모습에 '교환'의 공식이 여전히 뒤틀린 형태로 존재한다는 발상과 맞닿아 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과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 삶을 아우르는 공동체를 일궈가는 과정이 어느 정도 상응하고 그때 공동체를 세우는 과정이 여전히 여성, 혹은 여성의 자리에 놓인 선물을 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게이들에게 남자는 곧 세계'라는 농담이 성립하는 이유는 그들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매개항으로서의 여성을 소환하지 않고 남자들과 즉자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맥락에 있다. (이 가설에 존재하는 다소의 비약은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게이들은 자신과 다르면서도 자신에게 소중한 타자를 연결 통로로 이용하지 않는다. 대신 교환되는 대상은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 즉 남자의 일부이다. 게이들은 상대 남자가 남성적인 것을 원한다고 여기는 남자다. 이들에게 남성 동성사회와 남성 동성애의 경계는 희미한 것처럼 보인다. 

 

게이들이 남자가 되는 것만으로 '자기 자신'의 주체 위치를 확립하고, 상대방에게 건넬 '선물'을 마련하고, 그 선물을 교환함으로써 자신이 욕망하는 남자를 '보상'으로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묘한 계산법을 구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남자', '남성적인 것'의 모습이 너무 다양하다는 인식이 또 다시 트게이들에게 엄습한다. 그리고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남성성의 영역은 섬세한 인지적 능력으로 추정해 낸 남성성의 영토에 비해 너무 좁다. 자신있게 건네기에는 부족한 선물을 그럴듯한 것으로 위조해서라도 건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째서 선물이 부족할 수 있을까? 이미 상대가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선물해서는 제대로 된 선물이라고 할 수 없다. 남자들 사이에서 남성적 표식을 선물할 때 상대방이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들의 섬세한 감식안을 통해 남성성에 가치의 위계를 부여한다면(실제로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상황은 훨씬 더 나쁘게 흘러간다. 어떤 트게이 A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남자다운 남자를 열렬히 갈망한다고 하자. 욕망의 대상은 위계상 자기보다 위에 있기에 자신이 건넬 수 있는 어떤 선물보다 귀한 것을 이미 지니고 있다. 그가 내 선물에 응답하지 않을 때 나는 내가 알아본 것 중 귀한 것을 손에 넣는 데 실패할 것이고, 응답할 때에는 내가 부당한 거래를 해버렸다는 죄책감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머릿속에서 그리는 가치 체계가 매우 헐겁고,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신의 가치 체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거꾸로 되짚어 찾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남성성의 외부에 있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큰 가치를 지닐 수 없는 세계 속에서 그 누구도 균형 감각을 지키기 어렵다. 내 요구에 응하는 상대방의 가치 체계에도 그들 고유의 남성성, 혹은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을 통해 독특한 형태로 일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소중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닌 사물'이 아니라, '자기'의 일부를 교환한다는 조건은 문제를 해결하기 좀 더 어렵게 만든다. 교환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떼어낸 어떤 기호는 교환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여성적 위치에 놓이고, 이로 인해 그 자신이 통째로 여성적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일종의 거세 공포 같은 것을 느낀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두 남자 사이에 놓인 관계의 통로가 반드시 여성, 혹은 여성적 대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통로의 형식적 성격은 그 역사의 침전물로서 구성된다.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정보나 기호가 통로의 역할을 할 때 이 역사에 반례가 생긴다고 볼 수 있긴 하지만, 이런 반례가 규범적 역사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반례 자체가 자의적, 타의적으로 은폐되는 상황 속에서 역사적 의미를 전복하기는 어렵다. 곧, 위계적 가치로 촘촘하게 짜인 세계에서 자기의 단면을 선물로 건네 교환을 시도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자신의 가치를 손상시킬 위기에 자기 자신을 노출시킨다.

 

지금까지 편의를 위해 남성적인 것으로 젠더화해 놓았던 것을 이쯤에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으로 되돌려 보자. 실제로 그 내용이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특성이어도 무관하다. 예컨대 A는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부드러움을 구현해 놓은 것 같은 대상을 수취하는 것이 그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의 보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그러진 가치의 교환 표를 참고하는 한 그런 대상이 정말로 매혹적으로 느낄 만한 무언가를 자신이 정말로 가지고 있는지 A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교환의 형태 역시 바라는 대상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형태를 언제나 취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최대한 많은 대상을 점유하거나 그것에 접촉하는 것을 통해 모종의 교환이 일어났다고 판단한다. 이 경우에 그는 상대방이 가볍게 여길 만한 제안을 하고 상대방이 그에 응답하고 그의 제안에 응할 때 거래의 상대가 자신이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자의적으로 수취한다. 예컨대 A는 자신이 최고로 치는 부드럽고 상냥한 남자들에게 가벼운 제안(커피를 마시자든가, 같이 영화를 보자든가, 같이 일을 하자든가, 아니면 감정 없이 기능적인 섹스를 하자든가)을 하고 상대방이 A가 그들의 가치를 매기는 기준이었던 바로 그 부드러움의 발현으로 그런 제안에 응할 때 (즉 그가 높이 사는 특성을 지닌 이들에게 가벼운 제안을 하는 것이 이런 거래의 핵심이다) 자신이 자신이 갈망하는 대상과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보상은 불완전하다. 제안의 당사자인 A 자신으로서는 외면하기 어려운 위상의 차이가 A가 건넨 제안의 표면과 그 제안에 담긴 그의 바람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환의 대상이 반드시 다른 사람일 필요도 당연히 없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가 매겨지는 어떤 틀을 구상할 수도 있고, 그런 반응형 채점표와 교환 게임을 펼치면서 나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의 속성을 세밀하게 구분하게 하고, 나의 자원과 상대의 자원 사이의 교환비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풍부한 인지적 자원이 오히려 독이 되어 이들을 왜곡된 가치 체계의 혼란에 빠뜨린다고 할 때, 그리고 그 교환의 형태 역시 다채롭게 변형될 때, 이 끝없이 이어지는 치킨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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