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knowledgement

8월 11일, 엑시트 후기 본문

쓰기/쓰기_영화읽기

8월 11일, 엑시트 후기

herimo 2019. 8. 12. 02:02

 

접어둡니다.

 

...더보기

 

[엑시트](2019, 감독 이상근)를 보고 왔다. 주변에서 다들 재밌다고 해줘서. 두서 없어 보이겠지만, 영화 본 직후에 영화를 복기하면서 순서대로 생각났던 것들을 적어본다.

 

1. 영화가 시작할 때 용남(조정석 분)이 철봉을 열심히 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다소 노골적인데, 이내 그 시선을 일치시키는 이들로 장년, 노년의 여성들을 비춘다. 눈매에서 이제는 힘을 잃은 욕망의 흔적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반면, 아이들에게는 동네 바보 형이고, 조카(김강훈 분)에게는 친구들한테 삼촌이라고 떳떳하게 밝히고 싶지 않은 삼촌이다.

 

2. 떳떳하지 못한 이유가 사실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것인데, 아마 용남의 조카는 자신의 엄마이자 용남의 첫째 누나인 정현(김지영 분)에게서 이런 태도를 배웠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용남의 집에서 세 누나는 모두 결혼을 해서 나가 살고 있고, 막내 아들 용남만 그의 부친(박인환 분)과 모친(고두심 분)과 함께 산다. 방을 꾸며놓은 방식들, 특히 어느 가정에나 있었을 법한 집기들(크라운 시계, 꽃무늬(?) 방석, 적당한 사이즈의 소파, 인터넷 티비 리모콘, 90년대 후반에서 00년대 초반쯤 유행했을 법한 수전 등)을 보니 약간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3.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좀 더 이어진다. 다음날 가르마를 넘기다가 엄마와 다투는 용남의 모습이라든가, 하필 투닥거릴 때 또 양복 바지도 안 입고 팬티 바람이라든가, 변변한 직장이 없어 용돈도 드릴 수 없으니 아무튼 아들로서 무언가는 해야겠다는 묘한 의무감 같은 것. 용남은 촌스러운 외장의 구름정원 컨벤션홀에서(영화를 보다 보면 용남이 굳이 여기로 골랐다고 한다) 대학 산악부 시절 고백했다가 자기를 차 버린 의주(윤아 분)를 만나고 벌써 취업해서 과장을 달았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는 구름정원 점장이 부점장 의주에게 집적거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노래방 기계 하나로 뽕을 뽑은 것 같은데 남은 음식 싸가려고 하필 자기가 좋아했던 의주에게 지퍼백까지 부탁하는 모친을 말리기도 한다. 아무튼 한국적 가족의 스테레오타입. 거기에는 관객들의 가족의 모습이 크든 적든 반영되어 있을 것이고, 용남에게 이입한 관객들은 아마도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4.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좀 식상했다. 그치만 뭐 있을 법하잖아..

 

5. 아무튼 영화의 본론인 탈출 장면들. 독가스가 퍼져서 사람들이 죽는 장면들은 무척 공포스러웠다. 미국에서 9/11 이후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그 재난을 겪지 않았어도 재난과 자기 삶을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쌍둥이 타워 주변의 학교의 얘긴데, 그 학교 도서관에 오는 학생들은 맨해튼 키즈답게 쿨하지만 사서가 자리를 비우면 그이가 영영 사라졌을까봐 무서워한다고 한다. 한국은 여러 국가 재난이 끊기지 않았고,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간 보았던 수많은 실제 재난들이 떠오른다.

 

6. 한국영화답게 이 영화의 재난은 자연재해 따위가 아니라 인재다. 비상구 관리 제대로 안 하고, 옥상은 닫혀 있고, 헬기와 구조인력은 모자르고.. 아무튼 시스템을 불신하지만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측면에서 공포를 자극할 만하다.

 

7. (제한된 계급상승의 욕망) 평범한 재난 영화일 수 있지만 영화는 이 재난이 모두에게 평등한 재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몇 가지 장치를 두고 있다. 일단 재난의 정체가 독가스이다보니 사람들은 계속해서 위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살아남으려면 위로 올라가라는 명령은 계급 상승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메타포이다. 실제로 용남은 의주에게 살아남으면 높은 빌딩에 있는 회사에만 원서를 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건물에 살거나, 그런 건물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런 높은 건물의 소유자들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을 가져보는 삶을 상상하는 것은 용남에게 이 재난을 탈출하는 것보다 어렵다. 용남과 의주는 대단한 생존 기술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이 지닌 육체의 힘은 (이런 재난으로 사회 시스템이 마비되지 않는 한) 더 이상 이 사회에서 어엿한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8. 처음에는 용남이, 그 다음에는 의주가, 그리고 둘이 같이 몇 가닥 로프에 의존해서 줄을 타고, 벽을 오르고.. 하는 장면들은 의도된 대로 몰입해서 본 것 같다. 주로 걱정스럽고, 때때로 공포스럽기도 하고(그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9. 자신들을 구조하는 대신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온 몸으로 신호를 보내는 장면은 아무래도 세월호를 떠올리게 했다. 영화 중반 즈음에 용남의 아버지가 용남에게 왜 가만히 있지 않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하느냐고 타박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그 장면도 아마 의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작진이 이 부분의 묘사를 꽤 많이 고민해서 찍었다고 들었고, 보습 학원 안을 비추는 카메라가 없어서 눈을 돌리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보습 학원이라니.. 공부한다고 그 건물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실 그 학원의 어떤 아이들은 용남처럼 백수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야무진 성격이어도 의주처럼 상사의 성적 추행을 견디는 것이 삶의 종착지일지도 모르는데.

 

 

10. 두 사람을 비추는 드론. 재난 본부가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을 사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두 사람의 탈출을 간절하게 바라면서 본다. 계속해서 잠깐씩만 번득이는 삶의 가능성들을 비추는데, 이것은 영화 내에서도, 그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죽음에서 눈을 돌릴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영화의 관객이 이 영화를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듯, 영화 속에서도 두 사람의 탈출 장면은 가족 정도를 제외하면 엔터테인먼트처럼 비춰진다. 물론 그들의 탈출을 바라는 마음까지 가짜인 것은 아니겠지만.

 

11. 미디어를 통해 매개되는 공포와 희망. 영화 중후반 부에는 위에서 말했던 장면을 포함해서 현실을 떠오르게 하는 메타포들이 많다. 아무튼 재난 현장에서 국가를 믿을 수 없어서 개인이 드론을 보내 그들을 찍는다든가, 그렇게 보낸 드론이 두 사람이 살아남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든가, 그 장면이 모두 촬영되고 있고 그 안에는 진심도 있지만 이 세상에는 그 진심까지도 자본으로 바꾸어놓는 함수 관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든가 등등. 영화는 이런저런 비판의 단서만 던져두고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은 채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이 난장판을 어떻게든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역시 헤테로 로맨스이다. 이 영화가 관객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상기하면서 현실 비판을 시도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는 것마저도 가족들이 같이 볼 수 있는 한국형 재난영화로서 잘 계산된 것처럼 보였다. 적당히 현실에 불만을 토로하고 비판도 하면서 그 안에서 연애도 하고 취직도 하고 잘 살아보라는 상업 영화다운 마무리. 메타적으로 참 현실 비판적이네..

 

12. 아무튼 윤아는 아름답고 때때로 숭고하며(여신이나 천사, 성모처럼), 조정석은 귀엽고 둥글둥글 잘생겼고 몸도 좋고(얇은 와이셔츠 아래 꽉 들어찬 근육). 그리고 둘 다 잘 운다. 우는 것이 현실에서 진실의 증거로서 많이 활용되는 만큼 영화에서 활용될 때는 영화를 비판하지 못하도록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되고는 하고, 이 영화도 그런 울음과 찡그린 얼굴, 절박한 표정을 잘 활용하고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