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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이유" vs. "지젝의 공산주의를 오독 말라"

herimo 2014. 7. 8. 02:22


"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이유" 


vs. 


"지젝의 공산주의를 오독 말라"



시험이 끝난 김에 제일 재밌을 거 같은 글부터 써보자. 르몽드 12월호에 홍준기 박사는 지젝의 공산주의는 공허한 포지셔닝에 불과하다는 요지의 글을 썼다: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79

이에 대해 이택광 교수는 다시 지젝의 공산주의를 오독하지 말라며 반박에 나섰다. 그의 기고문은 아마 2월이 되면 정기구독자가 아니어도 읽을 수 있을 듯싶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기사의 링크를 올려둔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94)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택광 교수의 반론이 그렇게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나 자신도 이 글을 쓰면서 왜 그랬는지 스스로 이해할 기회가 되길 바란다.

먼저 홍준기 박사의 비판 중 몇 대목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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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지젝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공산주의라는 틀에 맞추어서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론적,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철학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지젝은 라캉, 헤겔, 유대-기독교 전통 등을 자신의 논의에 끌어들였지만, 지젝의 이러한 사상 원용 방식은 지극히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폭력적 혁명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고자 노력한 사상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자신이 이론의 근거로 삼는 다양한 사상적 유산들을 공산주의라는 ‘내용 없는 기표’를 중심으로 짜 맞추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비판의 핵심적인 내용은, 지젝이 공산주의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실제적 내용이 없는 구호에 불과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위선’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실천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이러한 논리 속에는 공산주의가 되지 않으면 그밖의 다른 실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흑백 논리가 깔려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의 진보적인 지식인, 학생, 연구자들은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금기로 삼아왔고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를 진보의 배신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의 현 시점에서는 오히려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사람이 더 진보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서로 갈등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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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은 이에 대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월호에서 홍준기가 공산주의를 뭉뚱그려 논의하고 있으며 정치학과 철학에서 논의하는 공산주의는 다르며 철학적인 의미에서 "공산주의라는 것은 당면한 해방의 이론으로서 유효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8면).

따라서 "철학적 의미의 공산주의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그 공산주의 체제와 동일시될 수 없다. ... 공산주의가 이렇게 선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정치에 대한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선언을 위한 대의인 것이지, 특정한 정치체제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상 내가 읽어낸 것이 맞았다면 이택광의 반론의 요지는 저것이 전부다. 이후 지면에서 이택광은 홍준기가 비판의 대상인 (지젝과 바디우의) '공산주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어떤 입장을 미리 세워둔 채, 그것에 비판의 논거들을 끼워맞추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홍준기는 ... 지젝이 진보적 지식인들의 도전에 직면하자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전향하는 손쉬운 해결책'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언제는 인기영합주의에 빠진 '대중심리학자'라서 이중적이라고 했다가, 이제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서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말이다. 횡설수설하고 있는 장본인은 누군가."

글쎄?

내가 이택광의 반론에 동의하기 힘든 건 그 역시 지젝을 비판하는 홍준기를 하나의 입장으로 종속시킨 뒤 그가 글을 시작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행동을 그 스스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논증이 있어야 할 자리에 주장이, 이론적 분석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도덕적 판단이 들어서 있다면 그것은 반론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게으른 추론’에 의한 글이 된다."

홍준기의 반론이 의미있게 읽힌 이유는, (그가 말하는 대로 지젝이 공허하다면) 지젝의 '실천'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사민주의도 아니고, 복지국가도 아니라면 도대체 지젝의 대안은 무엇이며, 그 대안으로 가기 위한 실천은 어떤 방향이 되어야 하는가? 즉, 이택광이 홍준기에 대한 좋은 반박문을 쓰기 위해서는 지젝의 '실천' 혹은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배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는 그런 글을 기대하고 무려 1만원이나 되는 돈을 지불하고 1월호를 샀으나 자신의 주장에 걸맞은 제대로 되지 않은 논증만을 담고 있는 글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싶다.


아무튼, 나는 이 글, 그리고 아마도 한 번 정도 더 쓰게 될 다음 글에서 지젝의 행위act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지, 지젝의 글을 통해 조망하고 지젝이 도대체 사민주의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좀 짚어보고 넘어가길 희망한다.

내가 참고하고 있는 책은 버틀러, 라클라우, 지젝이 공동저술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이며 이 책이 1999년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지젝의 입장이 좀 더 정교하고 풍부해졌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지젝이 스스로 주저로 꼽는 <시차적 관점> 혹은 헤겔에 대해 쓴 그 두꺼운 책(한국에서는 <라캉 카페>와 <헤겔 레스토랑>으로 새물결에서 번역)을 참고하시면 될지 싶다. 나는 지제키언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성실한 따라가기는 사양한다.


- 실재가 상징계에 내적이라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상징계를 통해 실재와 접촉하는 게 가능"하다" -- 그것이 라캉적 정신분석 치료 개념의 전체 요지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분석적 행위act라는 라캉의 개념이 관계하는 지점이다 -- 정의상 행위는 어떤 불가능한 실재의 치원과 접촉하는 몸짓이다. 이 행위의 개념은 주어진 장 내에서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과 다름 아닌 이 장의 구조화 원리를 전복하려는 보다 근본적인 몸짓을 구별하는 바탕 위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행위는 단순히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의 경계인 주어진 지평 "내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 그것은 다름 아닌 가능한 것의 윤곽을 재정의한다. (지젝, "계급투쟁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입니까?",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179-180면)

지젝은 이에 대한 '최고의 사례'로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카이저 소제가 아내와 딸을 쏴 죽이는 극단적 몸짓을 든다. 즉,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쓰러뜨리는 '미친', 불가능한 선택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그러한 '자기 파괴적' 행위만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터를 닦을 것"임을 이야기한다 (위의 책, 181-182면). 

(그러니까 오바마의 의료개혁에 대한 이야기에 지젝이 동의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그간 '불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젝은 자신에 대한 반론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괄호의 힘을 빌려 내 짜증을 좀 더 토로하자면, 내가 인용하고 있는 책이 1999년에 쓰였다는 것이다. 도대체 언제적 얘기를 한국에서 2013년에 반복하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 그것보다 더 솔직하지도, 핵심을 찌르지도 않는다. 확실한 입장과 논거를 솔직하게 밝히기보단 자신의 입장과 결론 짜 맞추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가 -- 이 짜증의 대상은 이택광과 홍준기 둘 모두일까 아닐까, 아직 나도 잘 모르겠으나)

- (라캉의 개념에 대한 반론에 대해) 그 반론에 따르면, 우리가 단지 행위를 그것의 갑작스런 출현이 그것의 행위자 자신을 놀라게 한다는/변모시킨다는 사실만으로, 그리고 그것은 소급적으로 자신의 (불)가능성 조건을 변화시킨다는 사실만으로 정의한다면 나치즘은 탁월한 행위라는 것이다 (184면). 

지젝은 이에 대해 소위 '나치 혁명'은 진정한 행위로의 이행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곧, '나치 혁명'은 진정한 사회적 적대와의 대면을 회피하기 위해, 진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어나는 광란적 활동의 대표적 사례라는 것이다.

- 정신분석은 '허위적 행위들'의 전체 계열을 잘 알고 있다. 정신증적-편집증적인 격렬한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 히스테리적 행위화acting out, 강박적 자기 금지, 도착적 자기 도구화 -- 이 모든 행위들은 단지 어떤 외적 기준에 따라 그릇된 게 아니다. 그것들은 내래적으로 그릇된 것인데, 왜냐하면 그 행위들은 오직 그것에 의해 전치와 억압 등이 행해지는 어떤 부인되는 외상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온전히 포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186-187면).

결국 '실재'를 드러내고 변화시키는 '행위'와 편집증적 행위로의 이행, 히스테리적 행위화는 "다르다"는 것이 라캉의 행위 개념에 (그리고 지젝 자신에 대한) 반론에 대한 지젝의 대답이다. 레닌을 라캉에 접합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인데(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고 있는데), 지젝이 레닌을 가지고 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행위'이기도 하거니와 레닌의 질문 '무엇을 할 것인가'에 착안하고 있기도 하다.

- 오늘날 정치철학의 '윤리로의 귀환'은 파렴치하게도 굴락이나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궁극적 불안으로 이용하여 모든 진지한 급진적 참여를 거부하라고 협박한다. 이런 식으로 체제순응적인 자유주의 사기꾼들은 현존 질서의 방어 속에서 위선적 만족을 발견한다.

지젝이 대부분의 미국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혐오를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아무튼 간에 지젝에 따르면 "그들은[비판자들은] 위험없는 행위를 원한다. ... 그들이 원하는 것은 행위없는 행위이다. ... 우리는 위험을 떠안아야만 하며,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영역 그 자체의 일부이다"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11-2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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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논쟁에 부쳐 (2)

저번 글을 쓰고 시간이 좀 지났지만… 민족의 대고통인 설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쓰도록 합니다.

에, 그러니까 결국 댓글에서는 생각했던 대로 (1) 그래서 지젝이 실제로 하려는 게 뭐냐? + (2) 그게 사민주의와 도대체 뭐가 다르냐? 결과적으로 지젝이 주장하는 바가 그렇게 다르냐? 다르다면 어떻게 다르냐? 정도로 수렴한 것 같네요.

음, 이 글은 (2)에서 시작해서 (1)에 대해 답변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며, 역시 저번과 같은 텍스트에 의존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사민주의 혹은 복지국가 등에 대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슬라보예 지젝 간의 입장 차이를 조망하면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지젝의 입장에서 느끼는 곤란함 —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다룰 것이다 — 은 그가 정치에 대한 전면적 접근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결코 분명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한 지평 내에서의 부분적인 해결을 지평 그 자체의 변동과 대립시킨다. 지평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성의 논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같다는 전제 하에서 나는 그 정식화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의 근거인가? 복수의 이산적 투쟁들을 총체화하는 상상적 구성물인가? 지젝은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정확하지 않으며, 계급 환원주의의 정수인 청년 루카치 같은 저자를 언급하는 건 가능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 의문스러운 두 가지 점이 있다. 그것은 (a) 불가능성과 외적 대상의 관계가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점, 그리고 (b) 불가능성 그 자체의 순전히 자의적 투사를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는 점이다. (CHU, 272-273)

이 부분을 상술하려고 하다가 그렇게 하면 3편도 써야 할 것 같아서 바로 실제 정치적 대척점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중도에서 빌려 보시길~나름 재밌다능…)

계급투쟁, 그리고 지젝이 말하는 후-근대적 정체성 정치 간의 대립에서 시작해 보자. 양자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모든 건 우리가 계급투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다. … 계급 적대가 생산관계에 본래적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임노동’의 추상적 범주에서 양자 간의 적대가 논리적으로 추출될 수 있음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 하지만 그런 증명은 불가능하다. … 노동자의 요구 속에 본래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지젝의 다문화주의 비판은 어떤가? … 지젝이 우려하는 바는 — 나는 그의 근심에 공감한다 — 보다 전면적인 해방 담화에 연계되지 않는 특수주의의 번성이 현 상태의 보존뿐만 아니라 더욱 더 두드러진 우파의 행동의 자유로도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합당한 선입견이지만, 그것에 대응하는 방식이 오늘날의 세계에서 어떤 정확한 의미도 없는 존재자 — 계급 투쟁 — 를 부활시키는 건 아닐 것이다. (CHU 276-279)

뒤이어 라클라우는 지젝이 마르크스주의의 계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며, 다소 무비판적으로 마르크스 주의의 용어들 — 이데올로기, 계급, 자본주의 등 — 을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지젝은 상당히 분명히 답하고 있는데,

계급 적대는 분명 일련의 사회적 적대 중 하나로 출현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나머지를 지배하고, 그리하여 그것의 관계가 다른 관계들에게 서열과 영향력을 지정하는’ 특수한 적대다. ‘다른 모든 색채를 물들이고 그것의 특수성을 수정하는 건 일반적 조명이다.’ 다시 한 번 여기서 내가 예로 들 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의 번성이다. ‘계급투쟁’을 부차적 지위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이런 번성은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 소위 ‘후기 산업’ 사회의 진전이라는 맥락 하에 있는 ‘계급투쟁’의 결과다. 보다 일반적인 용어를 쓰자면, 여기서 나와 라클라우의 논쟁 지점은 헤게모니 투쟁에 진입하는 모든 요소들이 원리상 등가라는 걸 내가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적 투쟁, 정치적 투쟁, 여성주의적 투쟁, 생태학적 투쟁, 인종적 투쟁 등) 일련의 투쟁 속에는 언제나 그 연쇄의 부분이면서도 다름 아닌 그것의 지평을 은밀하게 중층결정하는 하나가 존재한다. (CHU, 433)

지젝은 따라서 ‘자본주의를 유일한 게임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비판적이며, 이에 대해 지젝이 받는 비판 — “지젝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도입하길 원한다고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는 생산수단을 사회화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폐지하길 바라는가? 그리고 이 다소 특이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그의 정치 전략은 무엇인가?” — 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을 하는 이들(그가 말하길 후-근대적 좌파)은 사실상 전면적 변화에 대한 포기와 수용을 배경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성취를 인정하더라도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노선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그 체제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간의 분열을 함축하고 있으며, ‘상징계급’과 ‘배제된 자들’ 그리고 그 ‘중간계급’을 산출한다. (그리고 이 세 계급의 구분에 다시 라캉의 삼항조를 연결시켜 분석하는데 이는 원 텍스트를 참조해주길 바람) 결과적으로 사민주의(혹은 보다 정확히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본주의)에 대한 지젝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상상계와 ‘현실 사회주의’의 상상계가 모두 소진된 이후 좌파는 실로 새로운 상상계(새로운 동원력을 지닌 포괄적 전망)를 필요로 한다는 라클라우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오늘날 복지국가와 사회주의적 상상계가 구식이라는 건 진부한 표현이다. 진짜 딜레바는 지배적인 자유민주주의적 상상계로 무엇을 할 것인가 — 좌파는 지배적인 자유민주주의적 상상계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다 — 다. … 오늘날 좌파 앞에는 선택이 놓여 있다. … 그것은 지배적인 자유민주주의적 지평(민주주의, 인권과 자유 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헤게모니 투쟁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바로 그 용어들을 거부하고, 어떤 근본적 변화의 전망을 제기하든 그것은 전체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닦을 뿐이라는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협박을 단호하게 기각하는 반대의 몸짓을 감행하는 것이다. ‘Soyons réalistes, demandons l’impossible!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는 68년의 낡은 구호는 여전히 유요하다. … 진정한 유토피안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우리에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가져다 줄 성형 수술 이상의 어떤 것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지평 내에서의 변화와 재-의미화를 옹호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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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젝이 실제로 하려는 것은 새로운 상상계를 구축하기 + 그를 기반으로 하는 전면적 혁명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2) 지젝은 사민주의 자체를 배격하기 보다는 그 배경이 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본주의)를 공격하고 그것이 얻어낸 성과들을 인정할 지라도 그것이 이 사회를 헤게모니 체계에 종속시키는 함정임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홍준기 박사의 "고작해야" 사민주의라는 표현은 이러한 지젝의 입장에 대한 반박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만...음, 지젝이 그렇게 사민주의를 깎아내린다는 인상보다는, 그것이 오히려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효과를 발휘하는 체계이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것부터 상대해야 하는 호적수로서 인정할 것 같은 느낌인데..?)


== Work Cited ==

이택광, "지젝’ 오독은 한국 사민주의자들의 반정치적 경향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1.
홍준기, "지젝의 ‘공산주의’가 공허한 이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12.
슬라보예 지젝, "계급투쟁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입니까?",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새물결, 2008.
— ,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음과모음, 2011.

주디스 버틀러·에르네스토 라클라우·슬라보예 지젝,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도서출판 b,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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